정치

토인비 역사관으로 본 박정희 시대

여동활 2011. 6. 5. 21:18

토인비 역사관으로 본 박정희 시대
‘박정희 군사독재’ 비판이 서구식 평가로 통하지 않는 이유
2010-09-08 정일화(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역사에 취약한 한국 유학생들


▲“박정희 시대가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나, 군사독재였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은 서구식의 과학적 분석방법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 사진은 1961년 10월 9일 5.16혁명 후 첫 수확철을 맞아 경기도 수원에서

 벼베기작업을 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 국가기록원

내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앤더슨이라는 역사학과 교수는

한국 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도무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실망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유학 온 한인 학생들(대학원생)은 다른 과에서는 잘 한다고들 하는데

유독 역사학과에서는 영 빛을 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한국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서류상 재질이

높게 평가된 사람들인데 역사학과에서는 한 학기 수업을 해 보면 많은 경우 C학점을

 받아 본인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실망한다고 했다.

앤더슨은 한국에 평화봉사단원으로 와 일한 일이 있기 때문에 더욱 한국 학생에 대한

관심이 컸다.

한국 학생들은 역사학 분야에서는 기초단계가 잘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역사학은 사초(史草)를 얼마나 잘 나열하느냐가 아니고 그 사초를 근거로

그 시대가 받았던 도전이 무엇이며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그리고 그런 처리과정에서 우리가 뒷날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학의 체계가 한국 학생들에게는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면 C를 받고 만다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게 망한 역사를 공부할 때 우리는 흔히 조선왕조가 내분으로

 힘을 잃었고 여기에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매국노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면

 정답이 되고 이것을 좀 더 구체적 자료를 갖고 쓰면 A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앤더슨과 같은 서양 역사학자들이 생각하는 역사학은 다르다.

그것은 마치 경제학에서 말하는 입력(Input)과 출력(Output)은 동등해야 한다는 논리나,

 모든 반응(Response)은 일정한 자극(Stimulus)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아야 한다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같이 역사학도 원인과 결과, 그리고 경과가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왕정이 분열된 것이 조선 멸망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분열은 과연 멸망으로

 이끄는 것인가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 우선 있어야 한다.

모든 분열이 반드시 그 모체를 멸망으로 이끌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는 분열은 융합과 마찬가지로 힘의 원천이 된다.

물질이 분열되면 분열과 동시에 힘이 배출되는 것이며 분열이 강하게 일어나는

우라늄235의 경우 이 분열의 힘을 이용하여 원자폭탄도 만들고 원자력발전소를 통해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기도 생산한다.

그런데 왜 조선왕조 세력의 분열이 반드시 멸망으로 간 것인가.

이완용과 송병준이 대한제국 멸망의 원인이라면 이완용 없는 조선, 송병준 없는

 조선이었다면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전개되어야 이론이 된다.

‘박정희 군사독재’ 비판은 서구식 과학평가로 통하지 않는 논리

역사는 일정한 도덕적 잣대나 오늘날의 특정이념을 갖고 정리해서 안 된다.

박정희 시대, 이승만 시대를 가끔 특정한 도덕적 기준 또는 오늘날의 어떤

이념적 기준을 갖고 비판하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역사평가에

혼란이 오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군사독재 시대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든지,

박정희는 경제발전은 이룩했으나 인권탄압을 했기 때문에 나쁘다는 주장은 적어도

서구적인 과학적 분석방법으로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논리이다.

그 시대를 통해 변화 발전된 상황을 파악하여 이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리더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면 박정희 시대는 좀 더 투명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고,

어쩌면 박정희 신화의 중요한 대목이 사실은 이승만의 신화를 이어받은 것일 수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요인의 하나가 한국인의 높은 교육수준이라면 그것은

이승만 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으로 지적하는 것이 옳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이 시작될 즈음에는 부모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세계일류의

교육받은 노동자원이 한국에 깔려 있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생명줄과 같은 소와 몇 마지기의 논밭도

 서슴없이 팔았다.

자본과 일자리만 주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받은 국민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경탄할 경제발전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 고급교육을 받은 노동인력은 이승만 시대, 어쩌면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박정희 시대가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시대역행 사례로 종종 거론되는 인권문제는 공정한 판단으로 볼 때

그것은 오그라든 것이 아닌 늘어난 것이라는 결론도 난다.

‘가난 구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역사적 의미

동양에서 살다가 서양에 가면 한동안 어리둥절한 시기를 거친다.

서양에서 살다가 동양에 돌아오면 역시 이해 안 되는 일들을 많이 만나곤 한다.

동양의 역사관은 원(圓)의 철학으로 되어 있다.

일정한 궤도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가는 길이다.

한해를 춘하추동으로 나누고 이런 춘하추동은 해를 두고 반복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상대방의 나이를 물을 때 우리는 “봄과 가을을 몇 번이나 지냈습니까”라는 뜻의

 “춘추(春秋)가 어떻게 되었습니까”라는 말을 오래동안 써왔다.

그리고 그 춘추가 60번을 돌면 다시 새로 셈을 시작한다. 갑자, 을축, 정묘…로

시작되는 해의 셈이 60년을 돌면 다시 갑자, 을축, 정묘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역사를 이렇게 둥글게 보는 것, 반복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은 과거를 늘 현재로

 인식하는 사관을 갖게 하고 과거의 관행을 별다른 비판 없이 현재에도 적용하는

 현상을 낳게 한다. 공자ㆍ맹자의 사상이나 철학은 유학자들에게는

 2천몇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이 현존하는 사상과 철학으로 존중된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인식은 원이 아닌 선(線)의 개념이다.

먼 옛날 그 어느 때에 하늘과 땅이 만들어졌고 그 이후 수많은 도전과 응전으로

역사는 발전되어 왔으며 이런 역사가 가는 끝은 결국 지구의 종말 때가 된다는 것이다.

AD 1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BC 몇년으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며 앞으로는

 AD 1년에서 2008년, 2009년 등으로 한없이 앞으로 가게 계산되어 있다.

돌고 도는 역사관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과거를 현재의 기준으로 역사를 비판하는

전통적 사고로는 한국역사에 대변혁을 가져온 박정희 시대를 인식하지 못한다. 

시간이 오고 가는 세월이야 동(東)과 서(西)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역사란 과거를

되풀이하여 옛사람이 하던 일을 오늘날 되풀이할 수도 없고 되풀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말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전통적 역사인식을, 역사는 창조할 수 있는 것이며 가난은 물리칠 수 있다는

발전적 역사인식으로 바꿔 거대한 경제발전을 하게 한 것이 박정희 시대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하우스만이 본 박정희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 육군대위 하우스만〉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하우스만이 은퇴해 살고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을 찾아가 그와 1주일간 얘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에 파견되었던 하우스만 대위는

미군고문단 선임장교, 참모장, 한국군 참모총장 고문, 유엔군사령관 고문자격으로

국방경비대 창설 시절부터 내리 40년간 한국군과 함께 살았다.

창군 과정과 한국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으며 이런 그의 업적을 알고 있는

미 국방성은 보통 3년이면 전근시키는 미국방성의 관례를 깨고

긴 세월동안 한국에 머물게 하면서 중요한 정보업무를 수행하게 했었다.

그는 정말이지 한국군과 관련된 것은 인물이나 사건 어느 것 하나라도

 처음과 끝을 꿰뚫고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해서도 그의 초급장교 시절부터 대통령 시절까지도

비교적 상세히 기억했다.

그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꽤 오랫동안 박정희와 같이 생활했고

또 후일 박정희가 숙군(肅軍)작업에 걸려 큰 죄를 받았을 때 그의 사면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를 회상하면서 자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여순사건에서 상당히 가까이 지냈고 그의 구명운동에도 관여했지만

그 후 오랫동안, 5.16군사쿠데타가 날 때까지 박정희란 인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여순반란사건 때 하우스만은 미군 대표로 현장에 내려가 있었고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과 소속 대위 신분으로(필자의 착오.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음 : 편집자 주) 반란군 소탕을 위한 정보작전을 주관하고 있었다.

자연히 하우스만과 박정희는 한 막사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박정희는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하우스만과의 친교를 위해서는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있다.


▲1948년 여수순천반란사건 진압에 나선 박정희 소령(맨 왼쪽)

이 작전사령관 송호성 준장(왼쪽에서 둘째)과 지도를 들여다보며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 자료 사진

박정희는 첫 임지인 춘천의 8연대에서 무슨 일도 미고문관에게

“미국 놈이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한 것이 원인이 되어 미군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하우스만과의 친교를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우스만은 박하 냄새가 나는 살렘담배를 즐겨 피웠는데 박정희도 이 담배를

좋아한다면서 하우스만에게 살렘담배를 한대 줄 것을 자주 요청했고

하우스만은 그런 박정희를 존중하면서 담배 대화를 갖곤 했다.

 박정희가 하우스만에게 살렘 한대를 달라고 했을 때 하우스만이 갑채로 건네면

한개비를 꺼내는 대신 갑채로 가져가면서 “당신은 늘 살 수 있으니

이것은 내가 갖겠다”면서 갑채로 가져가버리곤 했다.

가끔은 진지한 내용을 토의한 일도 있었고 꽤 애정있는 과정으로 진행된 일도 있었다.

 아마도 박정희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시 군부의 실권자인 미군 책임자에게

우정을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이런 일을 직속 선임자였던 김점곤 장군에게도 하곤 했다.

 김점곤은 육사1기로 들어와 육사 졸업 후 춘천의 8연대 중대장으로 있었는데

 육사 2기인 박정희가 첫 임지로 김점곤 중대의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박정희가 육본 정보과를 들어왔을 때 김점곤은 정보과장으로 그의 직속상관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김점곤은 박정희보다 나이가 6살이나 아래였다.

박정희의 한국군대 입대가 늦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6살 아래인 이 직속상관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궁리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생명인 군의 기율을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박정희의 성격상 아부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술 마시고 밥 먹은 외상값을 김점곤 이름으로 달아놓고는 “과장님 오늘 술

 잘 마셨습니다”라고 넉살 좋은 보고를 하곤 했다.

김점곤은 전라도 갑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넉넉한 주머니를 갖고 있었고 박정희는

작은 월급봉투를 늘 고향에 송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궁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김점곤 이름으로 외상을 단 행위는 그런 재정적 이유이기보다는

 “당신을 존경합니다”라는 애정의 표시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에 대한 도전과 응전

하우스만은 박정희가 첫 소대장 임지로 향했던 춘천8연대의 연대장이었다.

박정희가 육사 졸업 후 춘천으로 갔을 때는 하우스만은 막 서울의

 미 고문단 선임장교로 전근해 버려 직접적인 상하관계는 아니었지만

 하우스만이 전임 연대장이어서 ‘연대장님’이라고 불렀다.

하우스만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오랫동안 머리에 잊고 있었던 박정희를

다시 머리에 정리했다.

그는 광주 토벌대 본부에서 하우스만에게 “초가집을 없애야 합니다

”라는 말을 가끔 한 일을 기억할 수 있었다. 살렘 담배를 뻐꿈뻐꿈 피우다가

“우리는 저 초가집을 없애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초가집을 없애겠다”는 말은 가난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표현이었다.

사진은 1963년 5월 27일 전남 목포지역을 시찰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일행.

ⓒ 국가기록원

미국인을 싫어한 인물로 알려진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경호원도 없이

별판을 가린 지프차를 타고 하우스만 사저를 찾았다.

여름날이어서 하우스만 아들 짐(James)이 얼음을 가득 넣은 콜라잔을 들고 나와

 박정희 앞에 놓았다.

박정희는 콜라잔의 얼음이 다 녹는 것을 보면서도 콜라를 마실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콜라잔만 바라보고만 있다가 “하우스만씨, 미국을 좀 가줘야 겠소”라고 말했다.

5.16군사혁명 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최대 관심은 혁명 주동자인 박정희가

혹 좌익세력이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이 우려를 더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우스만은 기꺼이 박정희의 제의를 수락했고 이후 둘은 매우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

역사를 원으로 보는 것과 선으로 보는 시각의 결과는 적어도 20세기 문명의 결과에서

 보면 서양과 동양의 현격을 보일만큼 문명발달의 차이를 보였다. 가난을 예로 들면

 동양의 원의 시각에서는 가난을 흔히 운명으로 본다. 

그러나 서양식 사고, 즉 역사는 창세(creation)에서부터 지구 종말에 이르는

긴 선을 타고 끝없이 달리는 마차와 같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가난은 이어받는 것이 아니며 그 가난을 내가 극복하든지 아니면 가난에 스스로 묻혀

역사에서 사라진다. 없어지든지 아니면 발전하든지의 어느 하나가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명저〈역사의 연구〉에서

 ‘도전과 응전’이라는 선(線)의 역사관을 갖고 세계사를 정리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인간적 및 환경적 도전을 받는데 이 도전을 이기면 살아남고

 도전에서 적절한 응전을 하지 못하면 살아진다고 봤다. 그는 역사적으로

 세계에는 26개의 문명권이 형성되었으나 도전과정에서 거의 다 쇠퇴하고 지금

 서구문명만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살아남은 문명권은 문제를 문제로 보고 이것을 성공적으로 응전했기 때문에 살아남고

 또 발전할 수 있었다.
초가지붕을 없애겠다고 한 청년장교 시절의 결심은 5천년 동안 내려온 우리 역사의

가난을 문제로 보고 이를 성공적으로 응전하기 시작한 시발이었다.

 박정희는 아마도 초가지붕을 없애야 한다는 도전의식을 갖고

 정치ㆍ경제 철학의 기초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에게는 초가지붕은 운명이 아니라 도전이었다. 해결책도 자연히 강구하게 되었다. 


▲아놀드 토인비(1889~1975)와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전12권)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역사서이다. ⓒ 자료 사진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

박정희는 기업인들의 철학을 바꾸게 했다.

 경제는 열심히 노력해 개인재산을 늘리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기업인들의 돈을 버는 재능은 사되 경제 범위를 국가적 수준 또는

국제적 수준으로 넓히게 했다. 국가의 가난을 물리치고 국가가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한국경제의 범위를 넓혀가게 한 것이다.

그는 5.16을 통해 풀이 죽어 있었던 이병철이나 정주영 같은 경제인을 찾아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게 하겠소”라고 물었고 경제인들은 정부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으며 국가경제 발전이라는 보다 큰 테두리를 놓고 경제발전에

도전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경제발전과 국가안보 증강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공식으로 풀어갔다.

 박정희 시대의 초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참으로 미약했고

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초라했다. 예를 들어 여학생의 머리를 깎아 가발로 팔고,

 공과대학 졸업생들을 서독 광부로 보내는 그런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창대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경제기획원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가난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해결책이 있으며 이런 해결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정책을 수행해야 되는지를

국가가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서구경제가 발전하고 동양경제가 침체한 원인은 무엇인가를 찾아 이것이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이 났을 때 어떻게든

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계산으로 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만들고 과학기술처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5천년 역사를 살면서 지난 1백년 동안 두번의 큰 외부적 도전을 받아

한번은 완전히 죽었고 다른 한번은 거의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첫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여

5천년 역사가 멈춰섰던 일이며, 두번째는 대한민국이 김일성의 불법남침을 받아

부산앞바다로 밀려 던져질 뻔했던 일이다.
아직 우리는 이 두번의 도전에 대해서도 분명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1910년을 전후에 조선반도에 밀어닥친 외부적 도전의 힘이 얼마나 강했으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만한 힘을 어떻게 길러야 했던가를 잘 계산해 내지 못하고

 있다.

매국노인 이완용이나 송병준만 나무라면서 이들만 아니었더라면 조선왕조는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정도로 역사는 기술되어 있다.

1950년 북한군이 소련제 최신탱크 T34 2백대와 야크전투기 6백대,

150mm장거리포를 비롯한 엄청난 화력을 몰고 남침했을 때

 M1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교훈을 얻어내지 않으려 하거나 왜곡하는 편이 많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과 국가안보 강화 역사는 대한민국이 현재와 미래의 도전을

 어떻게 응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끌어내고도 남을 만한 기록을

 갖고 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재정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