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파'가 아닌 '광복군'

여동활 2011. 1. 9. 19:12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닌 '광복군'


김구는 박정희를 광복군 중대장 임명

 

세계 2차대전 종전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간의 내전이었던 동족 상잔은

중국의 동포간에 먼저 시작될 뻔하였다.

팔로군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의 명령을 따랐으며,

팔로군의 적군 국민당 군대의 동맹군 광복군은 팔로군에게 적군으로 간주되었다.

본토에서

여운형의 건준이 세우려던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였는데,

건준이 중국 공산당의 적군인 광복군을 승인하는 것은

그가 중국 공산당 동지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좌우가 첨예하게 갈라져 있는 세계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 초창기에

모 인사가 광복군 박정희의 활약상을 저술한 책을 대통령께 선사하였는데,

박대통령은 몹시 역정을 내며 책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독립운동 경력이 출세의 프레미엄이었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평소의 과학도의 정직으로 무장되어 있던 박대통령이

그 책의 과장된 내용에 화를 내셨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 일로

박정희의 광복군 활동상은 감히 아무도 언급할 수 없었으며 역사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광복군 박정희를 다시 추적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자마자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이 땅을 치며 한탄하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미스테리이다. 평생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하였던

어른이 조국 해방 소식에 기뻐 춤을 추신 것이 아니라,

땅을 치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이 그의 눈물의 이유이다.

해방의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상해임정은 슬픈 분위기에 쌓였다.


1945년 4월 하순 독일의 항복 직후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였으나,

일본 지상군의 위력을 일본과 연합국 모두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전과 달리 지상전에서는 미국이 몹시 불리하였다.

지상전을 위해 지상군을 미국 본토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수송할 방법이 없었으며,

또 그런 느린 병력 수송으로

막강한 일본군 사단들과 전투를 치룬다는 것은 몹시 불리한 여건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병대 상륙 작전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며

중국 본토 상륙을 위한 파트너로 광복군을 선택하였었다.

그리고 8월 중에 광복군과 미해병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광복군이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해임정의 귀국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역시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지휘관도

일본 패망 이후 자신이 건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 기회를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해병과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으니,

김구 선생의 모든 수고가 헛탕이 되었다. 그날부터 상해임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즈음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광복군 중대장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상해임정은 외교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는 광복군의 활동에 김구 선생이 정치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그 해에는 광복군이 상해임정의 전부였다.

해방 조국에서 상해임정이 건국의 꿈을 실현할 것이냐 아니면

국내파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몰락하느냐가 광복군에 달려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6일 전에

러시아군이 만주국을 침략하여 만주 사회가 급격히 붕괴되자

상해임정은 만주 인근 지역으로 모병단을 보냈다.

중국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도 병력 규모를 늘리기 위한 모병을 하였으므로

만주의 조선인들,

특히 조선인 장교들이나 군인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이때까지 박정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주국 군관 박정희의 광복군 입대는 조선인들의 광복군 지지와 더불어

조선의용군이 광복군을 공격하는 것을 예방하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가 해방 전에도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설에 반대하는 이들은 만주의 동포들은 1945년 8월 중순부터서야

광복군 명칭을 처음으로 들었으므로 그 이전에 광복군과 박정희 사이에

연락이 있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복군 비밀요원 설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김구 선생이 청년 박정희의 유망함을 보고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권했다고 말한다.

그 시점은 실제로 박정희가 고향을 떠나 중국 대륙을 여행한 시점,

그리고 김구 선생이 광복군 창군 시점과 일치하기에 충분히 그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박정희가 작전장교였다는 사실이 그 개연성을 높인다.

만주국 보병8단 작전참모였던 박정희는 유능한 작전장교였다.

국군 하급장교 시절에 북한군 남침 예정을 그 시기와 침투 경로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이가 바로 박정희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대륙의 일본군 동향 정보를 광복군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더욱이 8월 하순에 예정되어 있었던 미해병대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아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김구 선생은 일본군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겠는가?

첩보없는 광복군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첩보는 일본군 주둔 위치 지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는 박정희 뿐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작전참모였기에,

그리고 지리학과 지도와 측량 분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였기에

그의 만주국 보병8단 사무실에는 팔로군, 만주군, 일본군, 러시아군 등 배치도가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편지와 증언이 박정희의 독립운동설을 뒷받침한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보도하기 위해

특집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기자들을 대거 그들의 고향에 보냈다.

그러나 증언은 뜻밖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일본인 몰래 학생들에게 한글과 애국가를 가르쳤고,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의 긍지를 일깨워주었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러면, 일본인 지인들은 박정희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우리나라에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학하였으니

일본군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사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소리이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 있다면 진학 안할 이가 누가 있었는가?

조선인이 검사가 되면 조선인이 축하해 주던 시대였기에

김재규 아버지는 김재규를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기 위해

일본에 가서 백방의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 있었다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완전 평등 대우였다. 그러나,

식민지화 초기에 왕족과 귀족에게 일본 육사 진학 특전을 베푼 적은 있었을 뿐

아무에게나 일본 육사 문이 열려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조선왕조 왕족이었는가?

더구나

황국신민교육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찍혀있던 자였는데.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겠는가? 그렇지 않았다. 단지,

만주국 군관요원으로서 위탁교육을 2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면 대구사범학교 교련 교관이 본 박정희는 누구였는가?

박정희는 작사 작곡을 하는 음악가였으며,

어느 화가 못지 않은 미술 실력을 지녔고, 그의 서예 작품은 일품이다.

그리고 수학에도 천재였던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꼴찌를 유지하였다.

그 이유를 대구사범 교련 교관이었던 일본인 아리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교과과정이 황국시민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백지 답안으로 항거하였다.


만주국 군관학교는 조선인 아무나 지원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다.

박정희의 문경 교사 시절

관동군 대좌로 부임하였던 '아리카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하라는 유언을 편지로 남겼다.

이무렵 '아리카와'는 남태평양에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로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이런 유언을 박정희에게 편지로 보냈다.


이 짧은 유언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직업적 군인은 이런 편지를 쓸 줄 모른다. 이것은 군인 정신에 관한 것이다.

박정희에게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준 이는 아리카와 대좌였다. 그리고,

만주국이 아닌 조선을 위한 군인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기에 해방후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암시가 있었다.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는가?

바로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독립운동을 위해 준비할 때임을 유서로 남겼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 아닐까.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한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있다는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사석에서

"우리 조상이 나라를 잘못 가꾸어 일본에 빼앗겼어.

그 후 일본 돈을 끌어다 쓰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영원히 그들에게 굴종하고 있을 수는 없지. 꼭 따라잡아야 해.

그렇게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곤 했다.

또 "우리는 남북통일을 해야 해. 우리 힘으로 해야 해.

그 힘을 하루 빨리 길러야지"라고 했다.

이런것만 보아도

박정희의 애국애족 정신과 그의 정체성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지 않겠는가.[펌]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 광복군이었다.                   글쓴이 : 동일   


   

    만주국군 군관으로 근무하면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였던 조선인 장교들 명단 및 그 활약상이

    문건 중간에서부터 약술되어 있으며 끝에서 두번째 줄에서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출처 :  창군전사 병서연구 제11 265쪽        

                                          작성일 : 10-01-04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