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 초청된 전국의 노인들이 육여사에게 몰려들었다. 시골할배가 육여사의 손을
덥숙 잡으려 하자 여사님께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신다. 1968년 봄, 내가
국민학교 1학년때였나보다.
저 시골할배도 시골에서 테레비는
몬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박정희대통령을 친견하러 올라
왔을 것. 맞며느리처럼 소탈하게
자신을 대하는 육여사의 손을
자신의 흙뭍은 손으로 꼬~옥 잡아주고
싶었으리라.
60년대 그리도 어려웠던 농촌을 너무나 자주 들렀던 육여사. 꼭 우리네 할매같은 농촌 할매가
육여사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고있네, . .
뭔 할 말씀이 더 남았는지, 그저 붙든 손을
놓지않는다.
'할매, 여사님 바빠요, 바빠 . .'
경호원이 거든다.
육여사는 저렇게 전국을 나다녔나보다.
내가 어려서, 국민하교 1학년 때,
시골엔 테레비도없어 저런 뉴스는 듣지고,
또 보지도 못했고, 지금에야 영부인의
저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서울에 면세점이 첨 오픈하고 첫 쇼핑에 나선 박대통령 내외분. 박대통령이 마트 카트를 직접
끌고, 육여사가 생필품을 일일이 가격을
확인하고 수십개를 사서 카트에 담는다.
대통령 부부가 저러고 나와다니니,
슈퍼에서 함부로 생필품 가격으로
장난을 칠 수 있겠나? 하니면,
미국 소고기로 국산 한우로 사기치며
팔수가 있었겠나?
배추가 한포기에 18,000원이었다면,
아마 그 슈퍼사장은 육여사에게 귀싸대기
아니면 억수로 혼쭐나고 왜 폭등하였는지
경유를 소상히 보고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1970년 박대통령 내외는 호주에 이어 뉴질랜드를 전격 방문한다. 이 때 대통령내외는 맞딸인
박근혜를 데리고 간다.
아버지와 함께 호주 시드니 앞바다에서
같이한 짧고도 짧은 한 여유있었던 시간.
그 아버지의 강인함과 당당했던 외교력이
그대로 박근혜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미 그녀 20세 앳된 나이부터
朴의 외국정상과의 교류 - 외교는 시작된 것.
누가 朴의 외교력에 대해 신기해 하는가?
이 글을 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무릎을 탁하고 칠 것이다.
유독 엄마 육여사와 함께했던 朴. 그러기에 엄마의 유연성과 도덕성, 그리고 어려운 국민들을
향한 정성스런 마음이 엄마의 유전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저렇게 육여사와 붙어서 다녔으니,
어찌 엄마를 쏙 빼닮지 않을 수가 있으리.
난, 이 사진을 보며 朴에게서 어릴 적
육여사의 체취를 맡는다.
어머니 육여사는 매우 많은 바자회를 여셨다. 파월장병들의 가족들의 생활비를 모으는
그런 바자회도 열었다.
그 바자회에 참석한 박대통령이
웃으며 바지에서 돈을 모금함에
넣고 파안대소한다.
파월장병들이 떠난 자리, 그 외로운
가족들의 생활비까지 모금을 해주는
대통령과 그 영부인이었다.
박대통령은 절대 군 미필이 아니기에
군생활의 궁핍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이다.
내가 떠주는 데로 마이 먹어~ . . 용산 군인휴게소에서 휴가를 떠나는 장병들에게 국밥을
직접 떠주는 육여사.
마치 우리 군인들이 자신의 아들인양
보듬어 주신 군인들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군인의 아내로 평생 살아온 그이기에,
그렇게 군인들과 동고동락을 했다.
재좀봐~ 멀 저렇게 쑥쓰러버 하나?
육여사님께서 떠 주시는 국밥 빨리
더 받아먹지않고?
1972년 미국 샌프란~ 닉슨대통령과의 정상회담차 방문.
외국을 방문할 때면 저렇게 많은
구름같은 환영인파가 몰렸었다.
그 누구처럼 뒷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망쳐 나오진 않았다.
대중들과 만날 때면 항상 저렇게 구름같은 군중이 육여사를 에워쌓다.
어릴 적 집에 테레비가 없어서
저런 광경은 지금 이 글을 올리며
첨 본다.
마치, 朴이 구름같은 군중을 몰고
다니듯, 예전 내가 몰랐던 육여사의
모습을 난 지금 朴에서 보고있다.
온 국민들의 축복 속에 개통된 '경부 고속도로'를 박대통령 내외분이 첫 시승을 하며
고속도로 톨 게이트를 막 스타트
하고있다.
온 국민의 축복 속에 개통된,
그 대 역사,
'경부 고속도로'
4대강이니 대운하는,
70%의 국민들이 짜증을 내지않는가?
바로 저 손 길, 수천명과 악수를 해도 지칠 줄 모르는 저 육여사의 손길이 눈을 끈다.
한명 한명 아이들을 정성껏
접견하는 육여사를 보며,
매년 그 뙤약볕에서 수천명의
숭모제 참석자들을 모두다
악수로 손을 잡아주는
朴을 떠올린다.
난 어려서 육여사를 보진 못했지만,
8 15 숭모제와 국회에서 가끔
朴을 만났고 朴은 내 손을
엄마가 그랬듯 꼬~옥 내 손을 잡아주었다.
1972년 경희대학교에 초청되어 대학생들을 만나러 가는 육여사.
육여사 주위에 한명의 전경도 보이지 않고
육여사 주위에 교수와 학생들이 뒤석여
모두 너무나 반갑데 맞아준다.
전경 기백명을 대동하고 모교를 찾은
모 영부인은 이 사진을 꼭 봐야한다.
이날,
육여사는, 청와대에서 늘 박대통령께서
자신보고, '야당보더 더 독한 야당인사!'
라고 하셨다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육여사가 1972년 전라도의 어느
나병촌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며,
나병 어린이 환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다.
어머니 육여사가 나병촌을 자주 찾아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듯,
朴은 최근 소아암(백혈병) 환자들에게
제대혈(탯줄혈액)에 대한 법령을
발제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있다.
엄마 아빠, 부모도 버린 우리 문둥병 아이들을 보듬고 안아주고 손을 매만져준 육여사.
꼬~옥 다시오세요.
나병촌을 떠나는 육여사도 그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해 못내 고개를 돌릴 수없다.
'그래 내가 다시 올께!'
'맛있는 거 많이 싸가지고 올께!'
'건강하게 잘 먹고 잘 뛰어 놀고 기다려~ 응~'
그렇게 소록도와 전국 나병촌을 돌고 돌았던
육여사,
한국의 테레사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엄마이기에 朴의 유전자를 누가 의심하는가?
아버지가 17대인가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관중석을 떠날 때, 朴은 조용히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이 사진에선 제일 뒤에 걸어가는 흰색 원피스가
朴으로 보인다.
항상 이 나라 정치의 核에서 이나라의 풍파를 지켜
봐왔던 朴이기에
'정치 권력의 생성과 쇠퇴, 그리고 그 무상함'을
설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정치인이 이렇게 이 나라 정치의 核에서
이 나라의 가야할 길을 분명히 하고있는 자가
朴외에 그 누가 있는가?
사족 : 이 글을 보고 안티들의 논쟁이 예상된다. 세습? 세습같은 소리하지말라. 朴의 지금의 위상이
언젯적 박정희, 언젯적 육영수여사의 입김으로 성숙된 것인가? 미국 최고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이후
출몰했던 케네디가의 출중했던 정치인 그러면 세습을 일삼는 부정한 정치인들인가? 나는 육영수여사의
동영상을 보고 이제서야 지금 나의 정치적 관점으로 박정희-육영수를 판단할 수 있었고, 당시 내 나이
너무 어려 그분들의 살신성인을 지금에서 알아차린게 너무나 부끄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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