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정욱·전 과학기술부 장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창립된 지 40년이 되었다. 10명 미만의 육·해·공군 과학기술자들로 발족한 ADD가 지상무기·해양무기·항공우주무기·유도무기·통신전자·감시정찰정보·신특수에너지·시험평가 등의 분야에서 조사·분석·연구·개발을 주도하는 거대 연구소로 성장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1960년대 들어 북한이 GNP 20% 수준을 군비에 투입하고, 김신조 등 무장공비 침투 등으로 향토예비군을 결성해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에서 창립됐다. 특히 미국이 주한미군 병력을 감축해 자주국방이 시급했던 때였다. 하지만 당시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해 군 장비의 국산 개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때였다.
ADD가 산·학계(産·學界)에 자문을 구했지만 대포나 군함·항공기·미사일·전차 등을 개발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얘기라고들 했다. 소총·기관총 등의 개발엔 15년에서 20년은 걸리고, 통신전자장비는 아예 수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ADD는 군복·식품 등을 검사하는 정도일 것이란 생각이 많았다. 이런 비관론 때문에 군 장비를 개발하여 전력화(戰力化)하겠다는 의지는 이내 사그라질 형편이었다.
그러나 197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ADD에 '번개사업'을 지시했다. 소총·경기관총·박격포·로켓포·수류탄·대인지뢰·대전차지뢰 등을 시험제작하라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일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뜩이나 과학연구·기술개발의 기반이 취약한 한국에서 할 일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ADD에 대한 채찍이었다. 이로써 ADD의 경영진이 바뀌고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앞에 나서게 됐다.
번개사업에 내 분야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나는 평소 마음먹었던 분대용 무전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주변은 냉소적이었다. 부품은 수입하되 우방들의 무전기와 공용하여 가격과 납기를 최적화하고, 민생용으로 겸용할 수 있고 수출이 가능한 품목은 국산화하기로 했다.
1972년 7월 나는 연구실에서 대통령과 통화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하시오"라고 했다. "정식사업이 아니어서 연구원·연구비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냥 격려려니 생각했는데 곧 문제가 해결됐다. 이런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KPRC-6 무전기는 물론이고 지금의 ADD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국산 개발에 회의적이던 군(軍)도 통신장비품의 개발에 더하여 포병용 계산기, 지뢰탐지기, 땅굴 탐지기까지 개발하라 하고, 방산업체에도 ADD의 품질보증을 받으라 요구하고, 한·미 공동생산사업까지 관리하라고 했다. 이로써 한국은 군용 통신장비품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ADD에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은 나중에 CDMA 등 국책사업 성공에도 크게 공헌했다. 산업계·학계·연구소에 과학기술 인력 공급처 역할도 했다. 선진국 무기를 보고 배우기 바쁘던 우리가 지금은 K-2소총, KT-1터보프롭 훈련기, K-9 자주포 등을 수출할 실력을 갖췄다. 지금의 ADD를 창립 초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 국력이 커질수록 국방 연구개발은 국제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장거리 크루즈 미사일 개발에 대해 주변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기술과 지혜, 안목이 모두 필요한 상황이다. 연구소도 오래되면 침체의 늪에 빠지기 쉽다. ADD만큼은 끝까지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기관이 돼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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