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피의 드라마’ 베트남전 참전

여동활 2010. 8. 14. 22:11

`남편을 조국에 바쳤다` 베트남전 미망인들의 눈물

한국 현대사에서 국민에게 군은 애증의 존재였다. 월남에 가서 피를 흘리면서 돈을 벌어오고 북한의 도발과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최근엔 이라크에 가서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군은 민주화를 외치는 국민에게 총을 쏘았고 12·12 쿠데타로 한국사회를 뒤집어놓았다. 무기도입 비리라는 부끄러운 얼굴도 있다. 국군의 영욕과 성장이 한국 정치 40년의 마지막 드라마다.


피의 드라마’ 베트남전 참전
눈물 아직 마르지 않은 미망인과 어머니들


월남파병
1966년 월남가는 맹호부대 아빠가 딸에게 입맞춤하고 있다. <중앙포토>

중앙일보가 창간된 1965년 이후 40년 동안 가장 피가 많이 흐른 드라마는 베트남전 참전이다. 1965~1972년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했고 전사자만 4601명에 이른다. 월급·사상자보상금 그리고 무역으로 벌어들인 외화가 5억여 달러. 말많았던 대일청구권 자금과 엇비슷하다. 이 돈이 산업화의 종자돈이 됐다.

유혈의 드라마엔 통한(痛恨)의 배우들이 있다. 전쟁미망인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 이름을 들어보지고 못하고 가보지도 못한 동남아시아의 낯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남편과 아들을 바쳤다. 그때 장병들은 ‘자유수호’ 투사들이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용병(傭兵)’ 운운하면 기가 막힌다.

김주인(60)씨는 지금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라는 환송가를 들으면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25세 때인 1970년 9월 백마부대 중사였던 남편(장무평)이 어린 아들 둘을 남기고 전장으로 떠났다. 3개월 후 전사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니노이 부근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남편 대신 ‘인헌무공훈장’과 보상금 70여만원을 받았다.

김씨는 아들들을 데리고 경북 상주의 친정으로 내려갔다. 땅 8마지기를 사 농사를 지었다. 이를 악물었다. 78년 서울로 올라와 보험설계사를 시작했다.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하나님을 택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사는 외로움을 신앙으로 달랬다. 그는 지금 교회 권사다.김씨는 전쟁미망인을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씁쓰레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70~80년대만 해도 매년 전쟁미망인 연금 지급 행사를 거창하게 열었는데 미망인들을 쭉 세워놓고 정부가 생색을 내는 거예요. 남편을 국가에 바치고 정당하게 받는 돈인데도 왜 그렇게 창피하던지…. 지금은 조용히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니 다행이에요. ”

아들 둘은 장성했다. 김씨는 “한많은 35년을 살았지만 그래도 아들들을 보면 뿌듯하다”며 “나라를 위해 남편을 바친 여성들이 불행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가영 기자



그 때 그 비밀 - 핵심 관계자 증언
“조국 핵개발 도우러 동포과학자들 날아왔다”


김철 전 아주대 교수

1965년 이후 한국의 국방역사 40년 중 압권은 월남파병과 자주국방계획이다. 자주국방 프로젝트의 클라이맥스는 핵개발이다. 이 드라마에는 묵직한 배우가 많았는데 김철(66) 전 아주대 교수도 한 사람이다.

74년 8월 그는 미 육군 내틱(Natick) 연구소 연구원이었다. 고국의 주재양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 찾아왔다.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는 주저없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과학기술처 산하의 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부에 배치됐다. 그처럼 정권이 해외에서 데려온 젊은 두뇌들이 많았다. 핵개발본부였던 것이다.

그의 업무는 1년에 우라늄 4t을 재처리해 핵폭탄 원료인 ‘플루토늄 239’ 20g을 추출하는 시설을 짓는 것이었다. 75년 원자력연구소와 프랑스 생고뱅사 간의 계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이듬해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생고뱅사의 계약에 대한 승인을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98년 공개된 미 국무부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74년께 이미 주한 미 대사관 등이 수집한 정보를 통해 한국의 핵개발 계획을 확인한 상태였다. 그는 “미국이 프랑스에 압력을 넣었다고 들었다” 고 회고했다.

핵개발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압력은 거셌다. 76년 초 국무부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미 대표단이 과기처에 들이닥쳤다. 최형섭 장관,주재양 원자력연구소 부소장과 그가 회의에 불려갔다. 그는 아직도 미 관리들의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한국이 핵개발을 강행하면 원전 연료 제공을 중단하고 핵우산을 거둬들이겠다.”
한국은 핵개발을 일단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완전포기는 아니었다. 대덕에 핵연료개발공단이 만들어졌고 김씨는 이곳에서 일종의 위장사업을 지휘했다. 우라늄 정련과 방사성 폐기물 처리 등 핵 재처리 과정을 엉뚱한 이름으로 각각 진행해 외부의 눈을 피하는 ‘짜깁기식 핵개발’이었다.

미국은 물론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김씨는 “로버트 스텔러라는 주한 미 대사관의 과학담당관이 수시로 나타나 사무실·창고는 물론 화장실까지 뒤졌다”고 말했다. 결정타는 10·26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이 사업마저 추진력을 잃었다. 신군부는 80년 12월 아예 핵연료개발공단을 원자력연구소로 통폐합했다. 조직은 사라졌고 연구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도 그해 공단을 나와 아주대로 옮겼다.

채병건 기자
김 철 전 아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