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교수 가족을 돌봐 줘라”
서강대 경제학 교수 남덕우가 중앙청 국무총리실에서 열린 경제개발계획 평가교수단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대통령 앞에 섰다.
“각하, 남 교수는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어 이제 평가교수단 회의에는 안나오게 되었습니다.”
총리실 관계자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주 갑니까?”
“아닙니다. 1년 뒤에 돌아옵니다.”
남덕우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초청으로 1년간 교환교수로 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럼 나 좀 보고 가시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평가교수단 회의는 대통령 이하 국무총리, 각부처 장관과 학계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상황을 평가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대통령이 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토론하는 자리에서 남덕우는 경제문제를 조목조목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후진국의 경제개발에는 무엇보다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따로 차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갔다가 반드시 돌아옵니까?”
“예.”
“집안의 처자와 부모는 어떻게 하고 갑니까? 누가 따라 갑니까?”
“그냥 두고 저 혼자 갑니다.”
대통령은 ‘壯途’라고 쓴 봉투를 그에게 주었다. 미리 준비한 금일봉이었다.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연구 열심히 하고 돌아오시오.”
그러면서 비서실장에게 남덕우가 없는 동안 그 가족의 생활을 돌봐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관심과 배려는 전혀 뜻밖의 놀라움이었다.
대통령의 뜻을 알게 된 것은 1년간 교환교수로 나가 있다가 돌아온 후였다.
1969년 6월 미국에서 돌아와 그해 가을 식자층(識者層)에 널리 읽힌 저서 <가격론>의 수입으로 화곡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있다가 라디오에서 ‘재무장관 남덕우’가 포함된 개각 발표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공사 현장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청와대에 들어가 얼떨결에 임명장을 받았다. 그리고 신임 장관들과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남 교수, 정부 정책을 많이 비판하던데 이제 맛 좀 보시오.”
그 말에 남덕우는 꼼짝없이 사로잡힌 심정이 되었다.
대통령에게 재무장관 남덕우의 임명 사유를 그렇게 건의한 사람이 있었다. 경제부총리 김학렬이었다.
“남덕우 교수가 평가분석회의 때마다 비판을 잘하는데 장관 일은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맡겨서 혼 좀 내십시오.”
김학렬의 말에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해 10월21일, 교수를 천직으로 알던 남덕우에게 관직이 그렇게 씌워졌고, 그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그는 5년간 재무장관직에 머물렀다가 1974년에는 경제부총리에 올라 중화학공업육성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지휘했고, 79년에는 청와대 경제담당 특보로 자리를 옮겨 조국 근대화에 기여한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가 박정희 시대와 함께 한 세월은 10년이나 되었다.
대통령이 보낸 쇠고기 통조림
그 시대에는 적지 않은 인재들이 장기 근무를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들을 국정의 전면에 포진시켜 맘껏 일할 수 있게 정치 외풍을 막아 주었고, 장기간 중책을 맡기는 인사 정책으로 이들의 능력과 경험을 최대한 국정에 반영했다. 이른바 엘리트 관료들의 전성시대였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공은 우수한 관료들의 열정과 헌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세계은행 등 외국의 전문기관과 경제학자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엘리트 공직자들이 놀라운 열정으로 국가 발전에 헌신하도록 어떻게 유도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고위 공직자들을 권력으로 복속시키지 않았다. 그들을 국익 창출의 동반자로 대우했으며, 때로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의 인간적 교감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1972년 인도 총영사로 나가 있던 노신영의 이야기가 있다. (<노신영 회고록>)
그해 6월 그는 처음으로 대통령 친서를 받았다. 외교행낭 편으로 온 한통의 친서를 받아 보니 봉투 겉면에 ‘서울特別市 朴正熙’라고 적혀 있었고, 서신과 함께 격려금이 들어 있었다. 미수교국인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는 의미의 활동비였다. 그는 감사의 답신을 보내면서 소를 높이 여기는 인도 국민의 생활상을 간단히 보고했다.
그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부터 뜻밖의 전문이 왔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항공편으로 쇠고기 통조림을 보내니 수령하는 대로 회답해 달라는 것이었다.
쇠고기 통조림은 영사관 직원과 가족들에게 여간 고맙고 반가운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쇠고기를 먹을 수 없는 사정을 살펴주는 대통령의 알뜰한 온정에 모두는 가슴이 뭉클했다.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해 반드시 외교적 과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고, 쇠고기 통조림은 서울에서 오는 손님 식탁에 내놓거나 직원들의 특별한 회식 때에 가끔씩 먹으면서 소중히 아껴 두었다. 노신영이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도 쇠고기 통조림은 꽤 많이 남아 후임 대사에게 인계되었다.
노신영은 재임 기간에 북한이 끈질기게 반대해 오던 인도의 남북한 동시 수교를 이루어냈다.
“조국을 위해 우리는 그저 미친 듯이 일했다.”
그가 박정희 시대를 회고하는 말이다.
“오 수석은 국보야”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움직이게 했을까.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의 발로였을까.
대통령 박정희는 권력에 굴종하는 충성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직자들을 국익 창출의 전위에 내세우고 그들을 독려했다.
1977년 박정희는 창원기계공단의 방위산업체와 기계공장들을 시찰하고 한국이 현대 공업국가 탈바꿈하는 모습에 여간 흡족해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내지.”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은 매우 기분이 좋아진 대통령에게 푸짐한 저녁을 얻어 먹었다.
그날 술을 한잔 걸친 대통령 박정희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한 경제제2수석 오원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오 수석은 국보야, 국보.”
대통령의 공개적인 찬사에 얼굴을 붉어진 오원철은 참석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대통령의 신임은 바로 엘리트 관료들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부패비리에 대한 역발상의 특별상여금
사명감 높은 공직 사회에도 불명예스런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안동댐 건설 현장의 한국수자원공사 직원 하나가 납품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일이 있었다.
댐건설 등 민생에 직결되는 국토개발의 중요한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수자원공사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각별했다. 한달에 두번씩 들러 애로사항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자리에서 해결해 주었으며 직원들에게 애정 어린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었다.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은 대통령에게 비리 보고를 하면서 머리 숙여 사죄했다.
듣고 보니 생계형 비리였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랬겠소.”
그러면서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예산담당 장관을 전화로 불러 한국수자원공사 전 직원에게 특별 상여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한 직원의 작은 허물로 국토개발 일꾼들의 명예와 자긍심을 망가뜨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리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조치일진대, 단순히 비리를 처벌하는 것과 박봉에 고생이 막심한 그들에게 상여금을 주어 격려하는 것 중 어느 쪽의 효과가 클까. 작은 허물을 덮어주는 상여금이야말로 바로 박정희 특유의 인간경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박정희의 분신’들
그 시대의 공직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밤잠을 설쳤어도 신바람 났었다.”
수출 1백억달러 달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시기의 상공부 수출 담당관(이동훈)이 하는 말이다.
“황폐했던 우리 국토가 푸르게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면 밥을 안먹어도, 잠을 안자도 힘이 솟았다.”
내무부 새마을 담당관(고건)의 말이다.
국가가 커가는 것이 보일 때 그들의 성취감과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개인적 친분 관계에 냉혹했다. 인간경영에 전혀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오직 국익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최고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그는 이들과 때로 막걸리 마시며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했고, 국익 앞에서는 대통령의 권위도 벗어던졌다.
▲좌-빈곤에 허덕이던 한국 경제에 불을 붙인 장기영 제2대 부총리(왼쪽). ‘왕초’라는 별명답게 실질 권한을 갖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연평균 경제성장률 10%, 수출 1억달러 돌파를 이끌었다. 1967년 6월 AID차관 조인식 장면.
우-탁월한 이론과 질풍노도의 열정으로 2차5개년계획을 이끈 김학렬 제4대 경제 부총리(오른쪽).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 건설 전담반’을 두고 포항제철 건설을 지휘했다. 그가 재임중 지병으로 사망하자, 박 대통령은 “내가 그를 죽였다”며 오열했다. 1970년 4월 포항제철 기공식 장면. ⓒ 국가기록원
▲좌-최장수 재무장관(4년11개월), 최장수 부총리(4년3개월)의 대기록을 세우며 박정희 정부의 후반부 9년 1개월간 경제핵심으로 군림한 남덕우 제6대 부총리(오른쪽). 수출 1백억달러, 국민소득 1천달러 돌파와 함께 쌀생산 4천만섬 돌파 등의 업적을 쌓는 데 성공했다. 1975년 10월 주한 외교사절 초청 리셉션에서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중앙), 스나이더 주한 미대사(왼쪽)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
우-1969년 10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최형섭 소장(왼쪽)으로부터 KIST 시설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최형섭 소장은 KIST에서 5년, 그리고 7년간 과학기술처장관을 역임하면서 획기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국가기록원
그런 대통령과 더불어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남덕우로 이어지는 경제 사령탑과 과학기술연구소장 최형섭, 새마을운동본부장 김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건립에 기여한 대통령 특보 박종홍, 최고지도자의 통치철학을 보필한 비서실장 김정렴 등 인재의 행렬이 조국 근대화의 역정을 동행하였다.
이들의 열정과 헌신은 대통령이 아닌 국가로 향했다. 박정희가 그렇게 방향을 분명히 잡아주고 사명감과 긍지를 높여 주었다.
조국 근대화의 성공을 이끈 인재들은 모두가 박정희의 분신이었다. 부하가 아니라 또 다른 박정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