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군의 가장 강력한 전차인 K1A1은 유사시 북한 기갑부대와의 전차전이 벌어질 서부전선에 집중 배치되어 있다. 원래 300대 남짓 생산될 예정이었지만 최종적으로 484대로 증강되었다.
정렬한 K-1 전차대 K-1 전차는 국방 과학연구소 기술진과 미국의 공동 개발로 단가를 절감하고 일부 부품은 해외에서 직도입하는 방식으로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K-1 전차의 존재로 인해 북한 기갑부대의 도발은 어려워졌다( 그들이 재차 도발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T-80U 이상의 전차가 필요하지만 최근의 잇따른 핵 실험과 미사일 연사로 인해 러시아가 이들에게 최신 전차를 제공할 가능성은 더욱 요원해졌으니 )
승세를 타고 있다해서 방심은 금물! 1944년 06월 13일, 의기양양하게 노르망디 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던 영국 제7 기갑사단 22 기갑여단 예하 4 런던 의용 기마병 연대는 비에흐 보까즈 읍내에서 무장 친위대 제101 독립 중전차대대 2 중대장 미하일 비트만 SS 중위의 일격을 얻어맞고 단숨에 전차와 장갑차 28대 이상을 손실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미하일 비트만 SS 중위가 직접 지휘한 타이거 전차에게 격파당한 제5 기마 포병연대 소속 로이 던롭 대위의 크롬웰 포병 관측전차이고 후방의 크롬웰 전차 잔해는 A중대 2소대 소속으로 역시 미하일 비트만 SS 중위에게 격파된 차량이다. 06월 06일 현충일은 여러 국가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현충일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국가들에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날이기 때문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독일군을 점차 내륙으로 몰아내며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행된 06월 06일에는 주요 국가의 수반들이 참석해 그 날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수월하게 전투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 잘 아시다시피 암호명 "오마하" 해변에서는 그야말로 대량의 인명피해를 내야했고 비교적 운좋게 상륙한 영국군은 06월 13일, 비에흐 보까즈( Villers Bocage ) 읍내에서 미하일 비트만( Michael Wittmann ) SS 중위가 이끄는 무장 친위대( Waffen SS ) 제101 독립 중전차대대 2중대의 공격을 받아 전차와 장갑차 합계 28대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 애써 점령한 비에흐 보까즈 읍내를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다. ▶ 비에흐 보까즈 전투 열람하기 ◀ 강철의 사신 "미하일 비트만" SS 중위 동부전선에서 숱한 실전 경험을 통해 110대 이상의 소련 전차와 자주포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고 노르망디로 이동해 비에흐 보까즈에서의 전과를 통해 06월 25일, 백엽검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야말로 전차병들의 우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이며 제2차 세계대전 독일 전차병들의 격파 스코어 4위에 랭크되었다. 현대전에서 미하일 비트만 SS 중위가 수립한 전차 격파 138대, 대전차포/기타 차량 격파 142대의 기록은 쉽게 깨지기 어려울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털어 이와 같은 기록을 수립한 연합군이나 소련군 전차병은 전무하다. 연합군은 이후 점차적으로 증원된 제102 SS 독립 중전차대대와 제503 독립 중전차대대 등의 타이거 대대와 기타 기갑사단들로 인해 적지않은 전차 손실을 입어야 했고 종전 이후 전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우리라고 해서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50년 06월 25일, 새벽 04시 30분! 북한군이 소련제 T-34/85 전차를 앞세워 38도선을 넘었고 동부전선에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7 보병연대가 춘천 일대에서 선전한 것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전 전선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오늘날 당시 치열한 격전을 벌인 화천과 춘천 일대에 제2 군단 예하 3개 보병사단이 집중된 것만 봐도 이 지역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북한군 제105 기갑여단이 주공으로 삼았던 서부전선은 어떠할까?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잠시 포성을 멈춘 이후 한국은 그간의 혼란을 극복하고 1961년 05월 16일,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전차 전력 확보에 만전을 기했다. ◀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전차 전력에 고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집권 이후 전차 전력 확보에 만전을 기한 고 박정희 전 대통령 그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오늘날 한국군은 강력한 기갑여단, 기계화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차 전력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에 대처하고 있다. 특히 그가 추진한 율곡사업 등으로 대표되는 국방정책 덕분에 기존의 M48A1 전차를 A3K와 A5K로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보급의 용이함과 더불어 북한군의 T-54/55 전차대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함으로써 M16A1 소총 등을 비롯한 각종 신무기들을 대거 도입해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치하에서 한국군은 기계화 사단을 보유하는 등 전력의 확장에 만전을 기했고 그 결과 북한은 함부로 재침공을 시도하지 못했다. 이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로 전차를 지원할 기계화 보병들의 리베로 K-200이 탄생했고 1987년에는 자랑스러운 국산전차 제1호 K-1이 데뷔했다. K-1 전차는 그 동안 미국제 전차를 도입해왔던 방식에서 이제 당당하게 공장을 세워 전차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군의 전차를 생산하는 중추 로템의 전신인 현대 모비스가 바로 K-1 전차의 생산을 위해 설립된 회사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비록 박정희 전 대통령은 K-1 전차가 지축을 울리며 한반도를 호령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채 김재규의 흉탄에 운명했지만 그가 다져놓은 기반으로 인해 오늘날 한반도의 지상은 평온하다 할 수 있다. 아직 XK-2 "흑표" 전차가 실전배치되지 않았지만 총 484대가 생산될 K1A1 전차가 배치 완료될 시 한반도의 안보는 더욱 공고히 다져질 것이다.
K-1 전차는 105mm 강선포와 K-6 12.7mm 중기관총, M60D 7.62mm 기관총을 장비해 주무장과 부무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어지간한 국가의 주력전차보다 낮은 전고와 높은 지상고로 인해 매복 전투가 많은 한반도의 지형에 최적화 되어 있다. 물론 설계에 미국이 관여해 M1의 한국형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군의 전차병들을 묵묵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결국 아무리 전차의 성능이 어쩌고를 따져도 평균적인 수준이라면 우수한 전차병들의 기량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K-1 전차는 총 1,027대가 생산되어 북한 기갑부대의 주 진격로인 서부전선 일대의 기갑여단과 기계화 보병사단,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제9 보병사단 "백마부대" 등에 배치되었으며 최근에는 동부전선의 제102 기갑여단에도 배치되었다.
해병대의 K-1 전차 만약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차 확보 노력이 없었다면 해병대는 이 시각까지도 아래의 M47 "패튼"을 운용했을 것이다.
"우리만 아니라 전방 보병사단들도 마찬가지였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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