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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하는 대통령, ‘농심의 혁명’ 스토리 ①

여동활 2009. 5. 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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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하는 대통령, ‘농심의 혁명’ 스토리 ①
2009-05-21


가난한 농민의 아들

소년 박정희가 사는 시골 마을에 부잣집이 하나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의 모내기를 품앗이하던 날, 박정희는 그때 따라가서 얻어먹은 밥과 반찬 맛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호박잎에 싸서 먹은 자반고등어 한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고 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5.16혁명으로 최고 권력을 잡았다.
그때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7할이 농민인 농업국가이면서도 1년에 식량을 200~300만톤씩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그가 권력을 잡고 혼신의 열정을 기울인 것이 아득한 날로부터 대물림되던 가난과 춘궁기를 없애는 일이었다. 가슴에 응어리진 소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5.16혁명후 처음 맞은 1961년 6월 10일 권농일, 수원에서 모내기를 마치고 농민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 정부기록사진집


▲1962년 6월 3일 김포에서 모를 심고 논두렁에서 농부에게 막걸리를 따르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후일 그는 청와대 직원들과 안양 근처에서 모내기를 하고 돌아와 청와대 이발사(박수웅)에게 “역시 논바닥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먹는 막걸리가 최고야”라고 말했다 한다.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1962년 6월 3일, 이날 민관군(民官軍) 합동 모내기 작업 도중 그가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의장님이 오시는 데 맞추었는지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헬리콥터로 가뭄지역을 돌아보면 보리가 타들어가는데도 저수지나 관정(管井)의 물을 그대로 두고 있는 곳이 적지 않았고, 그가 직접 물을 푸고 모를 심어도 젊은이들은 나무 그늘에서 빈둥거리고 노인들은 담뱃대를 물고 나와 구경을 했다.
그는 오랜 가난에 찌든 농촌의 좌절과 무기력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농촌의 가난을 연민의 정으로만 대하지 않고, 항상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면서 게으른 자에게는 절대 공짜가 없다고 강조했다.


▲1963년 6월 10일 모내기하는 박정희 의장(오른쪽에서 두번째). ⓒ 국가기록원

그러나 1963년 여름은 인간의 한계를 모질게 시험하는 풍수해가 전국을 덮쳐 박정희 혁명정부에 최대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6월 22일(토) 어젯밤부터 호우. 전국적으로 풍수해가 심하다. 보리 흉년에 벼 흉년이 겹칠 듯. 혁명정부 지도자 박정희 의장도 운이 나쁜 편이다. 내리 2년을 흉년이니.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간명하게 기록한 한 방송작가(박서림)의 공개된 일기 대목이다.

해마다 200만 이상이 굶주려야 하는 식량부족에다 1963년에는 엄청난 풍수해로 쌀값이 폭등했다. 해방후 일찍이 없었던 살인적인 쌀값이 국민을 절망케 하자, 농림부장관이 물러나고, 주미 한국대사는 미국에 잉여농산물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박 의장은 6월 27일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들을 굶기지 않겠다”며 울먹였다.

“막중하고 두렵고 힘겨운 자리”

그는 1960년대에는 1964년을 빼놓고 해마다 권농일 행사를 주재했다.
1963년 10월 군복을 벗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첫해인 1964년, 그를 맞이한 것은 격렬한 한일회담 반대 시위였다.
1964년에는 권농일 행사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6.3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긴박한 시국 때문인 듯. 

그해 7월 5일 지방시찰을 마치고 기동차 편으로 귀경하던 그는 차창 너머로 고랑에 물이 흐르는데도 모내기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된 마른 논바닥을 보았다. 대구를 지나 약목역에 이르자 비서실장에게 기동차를 다시 대구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대구에서 예정에 없는 1박을 하고 이튿날 시골 군수들을 경북도청에 모아놓고 가뭄대책회의를 열었다.
“옆에 물이 흘러가는 수로가 있어도 물을 퍼서 모를 심지 않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오?”
따끔하게 질책을 하고, 가뭄이 심한 칠곡, 금릉, 선산, 달성, 성주 등 8개 군의 군수로부터 모내기 상황을 보고 받았다.
칠곡군이 72퍼센트로 가장 저조했다.
“군수, 그 팔뚝이 뭐요!”
칠곡 군수의 흰 팔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일 게으른 군의 군수 팔뚝을 보니 가장 희구만. 들에 나가 모내기 독려를 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요!”
군수와 면장들이 앞에 나서라고 다그쳤다. 비가 안와도 물은 지하에 얼마든지 있으니 관정을 파서 양수기로 끌어올리라는 것이며, 게으른 농민들을 끌어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7월 15일 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시원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전화로 부산시장을 불렀다.
“거기도 비가 와요?”
“네 각하,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부인 육영수와 함께 지프에 올랐다.
지프는 빗속을 뚫고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를 돌아 경기도 과천 쪽으로 내달려 물이 흥건히 괸 논두렁 옆에서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단비를 머금고 생기가 오른 못자리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육영수는 그때 비를 흠뻑 맞고 선 대통령 남편의 자리를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막중하고 두렵고 힘에 겨운 자리인데, 이 자리에 앉아 다른 잡념을 가질 수 있을까요.”

 
▲1965년 6월 10 권농일 행사는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했다(왼쪽에서 두번째 박 대통령). 가양동은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에 속해 있다가, 1963년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되고 1977년 신설된 강서구로 나뉘어 나왔다. ⓒ 국가기록원

-딸라값은 해마다 곱절씩 오르고 / 원화값도 해마다 곱절씩 내리고 / 우리 월급값도 해마다 반값으로 깎이어 / 너절하게 아니꼽게 허기지게만 사는것도 괜찮다 / …그렇지만 / 어찌할꼬? / 어찌할꼬? / 너와 내가 까놓은 / 저 어린것들은 어찌할꼬? / ….
시인 미당 서정주가 1965년 정월 초하루에 발표한 ‘신년유감’ 중의 한 구절이다.

해마다 춘궁기에는 먹을 식량이 없는 이른바 절량농가(絶糧農家) 소식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모내기철에는 가뭄이 겹치기 마련.
대통령 박정희는 6월 12일 충남지방의 가뭄 실태를 돌아보고 서울에 돌아와, 날씨 영향을 받지 않는 전천후 농업국토를 조성하기 위한 연차 계획을 세우라고 정일권 총리에게 지시했다. 전국적으로 지하수 개발에 중점을 두어 어떤 가뭄도 극복할 수 있는 장기대책을 세우고, 이를 위해 보유외화나 외국차관의 일부를 사용있는가를 검토하여 재원을 마련하도록 시달했다.


▲1966년 6월 10일 수원에서의 모내기 행사. ⓒ 정부기록사진집
 


▲1967년 6월 10일 권농일 행사도 수원에서 열렸다. ⓒ 국가기록원

“낮은 데서 올라오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조금만 당겨주면 되지만, 주저앉아 남이 업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올라올 수 없다”


▲1968년 6월 10일은 제20회 권농일이었다. 단비가 내리는 가운데 전국의 모내기 상황보고를 받는 장면. ⓒ 국가기록원

오랜 가뭄 끝에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모내기에 큰 도움이 된 것을 기뻐한 그는 “다목적댐 건설, 저수지와 소류지를 만드는 일, 지하수개발 사업 등은 정부 예산이 허용되는 한도에서 최대한 추진하겠지만 농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마 전에 영동 지방에 한해가 심하다 해서 가 본 일이 있습니다. 과연 동해안 일대 금년도 한발은 대단히 심했습니다. 특히 보리라든지 감자라든지 하는 경작물은 거의 7,8할 정도가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부락을 지나다 보니까 밭에 감자를 심어 놓았는데 감자가 바짝 말라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감자 밭에서 2,30미터 떨어진 곳에 개울물이 흘러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농민들이 이 개울물을 퍼다가 감자밭에 고랑을 파서 아침 저녁으로 물을 길어다가 주어서 감자를 살리지 않고 말라 죽도록 가만히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농민들이 이러한 자세와 사고방식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농촌에 투자를 하고 농촌개발이니 농사 소득 증대니 농촌의 근대화니 해 봐도 소용없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비가 하늘에서 떨어져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울에 흐르고 있는 물 그것을 가뭄 때는 아침 저녁으로 물지개를 지고 가서 전부 길어다가 물을 주어서라도 살리겠다는 이런 농민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지, 꼭 무슨 관개시설이라는 것은 돈이 들어야 되고, 예산이 들어야 되고, 정부가 지원해 주어야 한다 하는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는 우리 농촌이 일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그해 7월 9일 헬리콥터편으로 경부고속도로의 대전-대구간 공구를 시찰한 그는 양택식 경북지사로부터 모내기 현황을 보고 받고, 수행한 이계순 농림장관에게 “7월 20일까지 모내기를 못하는 논을 전국적으로 기초조사를 해서 내년부터 반강제적으로라도 밭농사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으며, 수익면에서도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못지않다는 것을 농민에게 인식시켜 물난리, 비난리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1969년 6월 10 수원 농촌진흥청 시험답에서 모내기하던 중 쉬는 모습. ⓒ AP통신

이날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내외 귀빈, 4H클럽 청소년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분무기, 경운기 등 새로운 농기구의 연시 등 기념행사를 열고 모내기를 하며 풍년을 기원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권농일 치사를 통해 “1972년도까지는 전국의 수리 불안전답 43만 정보를 완전히 해결, 비가 오지 않아도 물 걱정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며 농민의 자조 노력을 거듭 강조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농촌을 부흥시키려고 아무리 애써 봤자 되지 않는다, 빨리 뛰어가려는 사람은 조금만 밀어주면 빨리 가지만, 전연 갈 생각이 없어서 땅바닥에 앉은 사람은 도저히 끌고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낮은 데서 올라오려고 버둥버둥하는 사람은 위에서 조금 당겨주면 쑥 올라오지만, 전연 자기 힘으로 올라올 생각이 없고 남이 업어다가 올려달라는 이런 사람은 올라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도 스스로가 노력을 해서 빨리 잘 살아 보겠다는 이런 의욕이 왕성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부가 여기에 대한 많은 시책을 쓰고 농촌에 투자를 많이 하더라도 농촌이 빨리 부흥할 수 없다, 결국은 정부와 농민이 합심해서 같이 노력을 해야만 농촌이 빨리 부흥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오늘 권농일에 우리 전국 농민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당부를 하는 바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