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사람을 불러 모으는가
11월이 가고 있다. 낙엽 쌓이는 길거리의 쓸쓸함을 지나 저만치에서 기다리는 엄동(嚴冬)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는 어깨 움츠린 가장(家長)의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11월이 가고 있다. 주식이 폭락하고, 시장과 백화점이 썰렁하다. 분열과 대립, 냉소와 기만, 무능 천박한 정치권력 하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 없이 꼬이고 뒤틀어지고 주저앉고 자빠져 뒹구는 것들 속에서, 걸핏하면 깃발 들고 나와 길거리를 점령하고 갖가지 이권을 쟁취하려는 파괴적 이기주의의 횡행과 함께, 도처에서 이런저런 절박함으로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 세상을 하직해 버리는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11월은 가고 있다.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들뿐인 허망한 세월. 따뜻함이 사라지고 살가운 말들이 흩어져 사라진 망각의 물살 속에서도 희한한 하루가 있었다. 잊지 못할 어느 하루,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하루를 기억해 사방팔방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동작동 높은 산허리의 숲속으로 모여들었다. 애틋한 추모의 정이 모인 지난 10월26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통령 박정희의 묘소 앞이다. 언젯적 박정희인데,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참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은 어인 일인가. 11월14일은 그의 생일 제삿밥을 올리는 날이다. 구미에도 서울에도 문경에도, 그의 자취가 있는 곳을 찾아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박정희,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로 사라진 그날이 언젯적인데 그는 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가.
■이 시대를 동행하는 박정희
서울 인사동을 종로에서 들어가노라면 낙원상가 앞 갈림길의 왼쪽 들머리에 초상화를 그려주는 말총머리를 한 화가의 포장 화랑이 있다. 거기에 국내외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진열해 놓고 있는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대통령 박정희 내외의 초상화가 있다. 박정희 것의 가격을 물으니 옆쪽에 붙여놓은 배용준의 것보다 훨씬 비싼 최고가라고 한다. 하긴 누렇게 변색된 친필 휘호 한장이 경매시장에 나오면 수천만원에서 억대를 넘실거린다. 잘 쓰는 글씨가 아님을 스스로 알아 자기는 서예가가 아니라고 아호 낙관을 쓴 적도 없다. 예술미에 빌붙기를 거부하듯 단순 강직한 기백의 일필휘지로 생전에 1천 점이 넘는 휘호를 썼는데도 경매시장에 잘 나오지도 않고 어쩌다 나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삼청동의 한 라이브 카페에는 그의 사진과 휘호가 걸려 있다. 그뿐이랴. 전국 곳곳의 복고풍 술집이나 냉면집들까지도 박정희 마케팅을 하고 있다. 그가 다녀간 국밥, 곰탕, 설렁탕을 파는 집들은 불황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가 다녀갔다는 이유 하나로 지존(至尊)의 맛을 의심치 않아 대통령들이 바뀌고 정치와 경제가 난리법석을 떨어도 끄떡없는 음식 명가들이다.
대체 언젯적 박정희인데 그는 왜 이 시대를 동행하는가. 1917년 11월14일 출생이요 1979년 10월26일 별세라는, 역사 인물이면 누구나 같게 생몰 연월일을 갖고 있으면서 왜 박정희는 역사와 지금의 이 시대를 넘나드는 선명한 돋을새김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합성시키는 홀로그램으로 갈마드는 것일까.
■대한민국 지금 몇시인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그림 중에서, 외국 순방길에 나선 대통령 탑승기가 마닐라 상공에 이르렀을 때의 장면을 정지 화면으로 잡아본다. 노스웨스트 기내에서 수행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대통령 박정희는 마닐라 시가를 내려다보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기자들에게 “지금 몇시요?”라고 물었다. 그의 시계는 고장이 나 있었다. 그것을 알고 어느 기자가 시계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고물시계라 어차피 쓰지 못할 것이니 기념품으로나 기증하시라는 말이었다. “천만에! 이건 5.16혁명 이전부터 차던 시계란 말이오.” 1967년 12월, 호주와 뉴질랜드 순방 항로 중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 멈추어 버린 시계바늘을 움직여 보려는 듯 손목을 흔들면서 어이없는 웃음을 웃고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마닐라 시내의 광경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번영의 상징인 마닐라 하이웨이를 내려다보면서 시계를 보았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각은 어디쯤 와 있을까.’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머리는 그런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야 말겠노라고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박정희가 아닌 것’의 차이
“오늘의 역사가 있기까지 찬반의 의사가 무수히 솟구치는 가운데 소신으로 중요한 일들 하나 하나를 결단을 내려 실행해오신 아버지의 생을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아버지 얼굴만 딱 봐도 우리나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1977년,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섰던 박근혜가 ‘대통령 아버지와 역사’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1977 송년 TV회견)
사주명리학자로 일컬어지는 한 사람은 박정희의 사주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 팔자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 역사도, 인간 박정희의 생애도 파란만장 그 자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진다. 1917년생 박정희는 뱀띠이다. 부인 육영수가 싫어하는 것이 뱀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양잠을 해서 누에를 거리낌없이 만지면서도 뱀은 징그러워서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뱀띠 남편을 만났다. 역사의 인물 중에 충무공 이순신이 뱀띠였으니 그를 숭모했던 박정희와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우연이라면 우연이기도 할 터이다.
어느 글에 보니 뱀띠생들의 인간형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은 될 성싶은 대목이 있다. 뱀띠생들은 뱀이 허물을 벗듯 새롭게 변하는 행동과 결단으로 남들을 놀라게 하고 목표를 실현하는 불같은 의지를 갖고 있으며, 독하고 용맹스러우나 가슴속에 남모를 원한이 맺혀 있어 고독하다는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고독했다. 고속도로, 종합제철, 자동차, 조선 등 어느 한가지도 반대에 부딪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열화같은 반대 여론은 옳은 것이었다. 세끼 밥을 먹기가 힘든 세월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독한 정열로써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산업화의 길을 달려간 박정희가 더 옳았다. 그는 역사를 호흡했다. 당대가 아닌 미래를 보는 역사의 안목으로 국가경영을 지휘했다. 박정희와 ‘박정희가 아닌 것’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당대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고, 후손에게 물려줄 국부(國富) 창출을 위해 당대의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고통을 요구했으며, 모든 조국근대화의 일정을 역사의 시간표에 짜놓고 수시로 ‘대한민국은 지금 몇시인가’를 스스로 묻고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박정희 시계
그의 습관 중의 하나가 시계를 자주 보는 일이었다. 어느 곳을 시찰하면 그 일대의 중요한 산업시설을 모조리 돌아보는 식의 일정을 짜고 그것에 따라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시각을 확인하곤 했다. 생애 마지막 날인 1979년 10월26일에도 오전에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KBS 시설인 당진송신소로 가서 거기서도 준공식을 하고 도고호텔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귀경 후 궁정동의 만찬장 식탁에서도 저녁 뉴스 시간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차고 있었던 시계가 흔해빠진 세이코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로 가는 항로 중 마닐라 상공에서 고장이 났던 그의 손목시계는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녹이 슨 타피카 구형으로 잘 봐주어 시가 2천원 정도라고 했다. 미국 대통령 존슨이 박정희에게 금시계를 선물한 일이 있다. 한미정상의 만남에 박정희는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해 겸연쩍어했지만, 그렇다고 미국 금시계가 그의 환심을 살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몸에 무언가를 요란하게 걸치는 것을 거추장스러워하고 간단한 소지품이라도 ‘묵은 정’을 쉽게 떼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대통령 생일에 바치려고 명품 시계를 준비한 인물이 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스위스에 금으로 된 최고급 파텍 회중시계를 특별 주문했다. 대통령을 가장 잘 알 법한 김재규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덮개에 봉황 무늬와 대통령 사진이 들어가 있고 ‘근축 탄신 1979’라고 새긴 시계였다. 1979년 11월14일 대통령 생일을 위해 ‘충성의 시계’를 준비해 두고, 그래 놓고 저지른 10.26사건이다. 최근 TV에 나와 ‘침뜸의 달인’으로 유명해진 침술사(김남수)는 김재규의 침술 주치의였다면서 10.26사건의 전날인 10월25일에도 김재규에게 침을 놓았다면서 닷새 후인 10월30일 침술과 관련해 대통령 면담 일정이 잡혀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침술사는 김재규의 주선으로 청와대 면담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놓고 저지른 10.26사건을 오래 전부터 계획한 ‘민주거사’라고 했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가져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모든 것을 털고 가지 않았다. 번뇌를 끊지 않고 기만의 더께 속에 묻혀서 갔다. 죽음의 진정성과 인간의 근본가치를 능욕하는 연기, 연출이었고, 그건 상(傷)한 영혼의 비극이었다. 극과 극은 가깝다. 신임 속에 배신은 생겨나고, 충성과 배반은 동심원(同心圓)으로 함께 존재한다. 사랑과 미움, 충성과 배반의 감정은 수시로 갈마들고, 그래서 1인칭 앞의 2인칭은 항상 돌발사태의 가능성 앞에 노출되어 있게 마련이다. 박정희 시대는 돌발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에게 저항하고 맞섰던 국가원로의 고백
얼마 전에 필자는 박정희 시대로부터 격동의 역사 한복판을 지켜본 증인 한 사람(김두영)을 만났다. 그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의 비서실에서부터 공보비서실 행정관, 사정담당 비서관, 정무 제2비서관등의 직책을 맡으며 청와대에서 19년의 세월을 보내고 1980년대 말에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1980년대 초의 어느 하루, 정치 현실과 이해관계가 없는 국가원로들을 모시고 산업화의 현장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며 전에 한 월간지에 기고했던 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었다.
일행이 경주를 둘러보고 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중 한 사람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했다. “박정희씨는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놓았어. 혁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도로, 항만, 도시계획을 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보다 나았어.” 그 말이 예사롭지 않음은 10.26 후 박정희 시대의 저항세력이 고개를 들어 유신정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이 휘몰아치던 시대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에 충성하던 인물들이 변신 또는 침묵으로 돌아앉고, 또는 낭인처럼 정치무대의 변두리를 맥없이 배회하던 그 시절에 그 원로의 말은 용기있고 진솔한 고백이었다. 그가 바로 4.19후 장면 정부로 이어지기 전의 과도정부 수반을 지낸 허정이었다. 게다가 허정 그는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윤보선과 함께 구 정치세력의 양대축을 형성하고 있던 그는 박정희에게 끈질기게 맞서며 그기 주도하는 정책들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런 그가 박정희를 앞세우는 고백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허정의 회고록(<내일을 위한 증언>)을 펼쳐보았다. 거기 보니 대통령 하야성명을 내고 이화장으로 돌아가 있던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로 휴양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비밀리에 망명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 허정이었다.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였다. 한때 비난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악감정이 뒤엉킨 정치 소용돌이를 끄떡없이 헤쳐나왔다. 그의 정치 신념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본 박정희는 어떤 인물일까. 정치 권력만을 좇아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군상들과는 의식구조 자체가 다른, 국민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지가 펄펄 끓는 새로운 인간형을 그는 보았을 것이다. 5.16의 해 1961년, GNP 80달러 수준으로 세계 125개국중 101번째의 최빈국 한국이었다. 곡창지대라는 전라남도에 절량(絶糧)농가가 16만4천42호나 되고 총94만6천명이 대책없이 굶고 있었던 어느 해나 다름없이 그해의 춘궁기도 비참했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가 국가예산의 8할이나 되는 나라, 그렇게 미국에게 얻어먹지 않고는 대책이 없는 불쌍한 한국의 실정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남도지역이 엄청난 식량난에 시달려도 총리와 각료 중에 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지역을 한번이라도 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썼다.
박정희는 말했다. “한국 사람들의 비극은 유럽 사람들의 비극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유럽의 비극은 힘차고 억세게 운명적인 것과 대항하다가 장엄하게 쓰러지는 것이므로 부정을 다시 부정해서 이를 이겨내려는 힘과 긴장이 있는 데 반하여, 우리나라의 슬픔이나 애수는 사실 비극이 아니라 가엾음이요 체념하는 새김질인 것이다.” (박정희 지음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5.16은 굶주림과 무기력, 절망과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공(時空)을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5.16으로 역사에 등장한 박정희는 정치판을 갈아치웠다. 국민의 거칠고 부황증 걸린 손을 잡기를 거부해 오뉴월에도 야들야들하게 무두질한 가죽장갑을 끼고 다녔다는 어느 유명 정치인처럼 당시 처절한 극빈과 아무런 상관없는 특권의 정치를 단숨에 엎어버렸다. 그리고 시대적 과제와 목표 앞으로 국가 구성원들을 몰아 세웠다. 그렇게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의 세월을 숨가쁘게 달려가 환골탈태한 한국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그는 갔다.
■그의 볼품없는 시계가 역사를 움직일 줄을 누가 알았으랴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 나라 서민들 옆에 세워놓고 보자. 잘 어울리는 유일한 사람이 박정희다. 막걸리 따라 마시는 조선 막사발 같은 박정희만이 이 땅의 서민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박정희와 ‘박정희 아닌 것’의 또 다름이다. 그는 선거 때 표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거 때 도벌과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것을 엄벌했다. 쓴소리만 하고 달콤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무섭게 눈을 부릅떠 엄포를 놓아 으시시했는데도 지금 사람들은 그의 앞으로 모여들고 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해도 구미 생가에 하루 1천명이 다녀가고, 험한 세상살이에 고달픈 인생길을 허위단심 헤매다가도 10월26일, 11월14일이면 사람들은 잊지 않고 모여들고 있다.
우리에게 박정희는 무엇인가. 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그가 만들어 놓고 간 환골탈태한 한국을 보는 사람이 어찌 앞에서 언급한 국가원로 허정뿐이랴. 한마디로 박정희 시대는 역사 창조의 장엄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비록 낡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그의 시계는 항상 역사의 시각을 가리켰다. 대한민국의 시각을 가리켰다. 그의 볼품없는 시계가 역사를 움직일 줄을 그때 그 시절에 누가 알았으랴. 예측이 어려운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의 안목은 따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