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밀광복군’ 1980 년 육군본부의 ‘창군전사(創軍前史)’가 발행된 이 책은 지금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실과 군사연구소,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돼 군사(軍史) 연구 자료로 쓰이고 있다.
1980년 8월18일 육군본부가 펴낸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군으로 위장한 비밀광복군으로 등장한다. 1939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간 것도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이며, 1945년 초 광복군에 가입해 제3 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박정희는 1979 년 10 월 26 일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화로 인하여 흉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료에 의해 1980 년 8 월 18 일 창군 전사에 기록 되었다.
한동안 박정희가 독립군을 수천명 학살하고, 수백회 토벌에 나섰다는 좌경주의자들의 글을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 다녔으나,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에 비추어 보면,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져야 하겠다.
김일성 시절부터 박정희가 죽어야만 적화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주사파들과 386 좌파 세력들은 북한 공산당이 날조 왜곡한 기록들을 가지고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지금도 그들은 박정희를 철천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며 활동하고 있다.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사람으로서,.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이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벅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거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한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으나,
박정희는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고 순국 선열들의 미기록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만약 박정희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하였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이승만도 아닌 박정희가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 하였다.
김희선 열린 우리당 의원이 자신의 백부라고 환부역조 사기 행각을 벌였던
조선 독립군 영웅 김학규 장군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제 2 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고 날조되었던 것을 우리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그렇게 박정희를 씹고 또 씹으면서 부관참시를 하여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신기남,김희선.이미경 등 진짜 악질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말 그대로 3 대를 떵떵거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친할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친)인 박성빈씨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던 1892년에 경북 성주 지역의 접주(지역 책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viewer.php?mgz_part=weekly&n=200505200500063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에 따르면
당시 22세의 나이었던 박씨는 경북 성주에서 동학혁명의 접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작성된 선산군지에는
"고령 박씨로 자는 화익이고,
관직에 제수됐으나 세난으로 불취하여 동학난에 연좌되어
성주와 선산에 우거하여 교류를 끊고 독서 과농으로 종로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유족회 측은
"동학자료집이나 현지에서 전해지는 얘기들을 종합하면 박씨의 동학활동이 확인된다"며
"박씨 묘비에도 '동학농민운동의 접주'라는 내용이 적혀있다"고 밝혔다.
유족회는 지난해 초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박씨의 당시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으며
박씨는 청년시절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 영변지역 부사(또는 함남 지역부사)로 발령받았으나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하고,
성주에서 동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박씨는
동학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 전여옥 대변인은
"박 대표는 유족회 측으로 부터 이 같은 사실을 접하고
'그런 훌륭한 분이 계셨느냐'고 경의를 표했지만
일부러 부각시키지 말 것을 당부 했다"고 전했다.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치 고갯마루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살을 에는 찬바람을 뚫고 몸을 날렸다. 그들의 손에는 죽창과 낫, 괭이 등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도구들이 들려 있었지만, 이들과 맞선 일본군은 총으로 무장했다.
이들의 싸움은 애초부터 무의미했다. 반봉건, 반외세를 주창했던 농민혁명군들은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일본군의 총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의 절규와 함성이 사라진 지 110년이 지난 2004년 2월9일, 16대 국회는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그러나 매우 의미 있는 법안 하나를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근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제7177호)’이라는 긴 이름의 이 법률은 고부(정읍), 무장(고창)을 비롯해 당시 전국에서 봉기했다 사라진 동학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첫 번째 진혼굿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법률이 통과됨으로써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동학농민혁명군이 햇볕 아래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동학농민 후손들 비참한 삶 … 참여자들 명예회복 시급
특별법 공포에 따라 2004년 9월 정부는 국무총리실 소속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유족 등록 및 결정,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 3개 분과로 구성, 운영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들은 동학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호남과 영남, 충청을 돌고 또 돌았다.
그 과정을 통해 짐작으로만, 그리고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동학 주역과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절손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도 아직 유족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경북 성주 및 구미 지역을 중심으로 구전돼오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할아버지 박성빈 옹의 동학 접주 활동을 간접 확인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순봉 전 의원을 비롯해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장관, 대학총장들도 동학농민군의 후손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족 신청 건수는 아직 미미하다. 2005년 5월 현재 신청 건수는 40여건에 불과하다. 정부는 올해 사업비로 3억6000만원을 배정, 위원들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동학농민의 후손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교도 진압작전을 펴면서 잔혹한 학살과 재산몰수라는 극단적 처분을 자행했다. 때론 참여 마을을 통째 소각하는 무자비함도 보였다. 목숨을 부지하자면 고향을 등지고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다. 만주 유랑에 나서고 의병에 참여하는 후손들도 부지기수. 이도저도 못한 후손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현대사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철저히 유린돼 숨어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금껏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은 보이지 않는 연좌제에 묶여 핍박과 수난의 세월을 살아왔다. 쌓이고 쌓인 한을 끝내 추스르지 못하면 그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1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부와 국민은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인색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대상황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적의 난, 동학 비도의 난, 동학변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등 이름과 모양이 각기 다르다.
같은 이념과 목적을 가진 하나의 농민혁명이 이리도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나, 때론 의문이 든다. 정치적 목적이 진실을 감추고 익명과 오명의 수모를 안긴 것은 지역과 세대의 장난이었을까.
근현대사의 기점은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동학농민의 정신과 실체를 파악, 희생자 한분 한분을 모두 역사적으로 복권시켜야 한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찬란한 미래가 열린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산 자들은 그들의 정신에 경건한 예를 표해야 한다.
중국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있고, 일본에는 자유민권운동 기념관이 있다. 독일은 유대학살 위령관을 운영하고, 멕시코는 농민혁명 기념관 등을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업을 통해 과거를 반추한다. 현실적 모순을 투영, 극복하고 자기 성찰을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거와의 대화에서 출발한다. (끝)
박기수 / 국무총리 소속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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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5 년 05 월 24 일 (486 호) |
쪽수 : 92 ~ 92 쪽 |
http://www.donga.com/docs/magazine/viewer.php?mgz_part=weekly&n=200505200500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