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대통령, ‘수출이 아니면 죽음!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

여동활 2014. 9. 1. 10:18

박정희, ‘수출이 아니면 죽음!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

나라와 세계를 改造한 정치가들 ② 박정희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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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s년 박정희 대통령이 안성에 있는 한독 낙농시범 목장을 시찰하고 있다./조선DB

한국은 1961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89달러로 세계 125개국 가운데 101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당시 북한은 320달러로 세계 50위 안에 든 잘사는 나라였다. 그 무렵 한국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963년에 민정 이양하면서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963년부터 1979년 10월 26일에 시해(弑害)될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하여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는 수출주도형 개방경제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1)

어떤 삶을 살았는가?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에 태어났다. 그는 구미보통학교에 이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는 1940년에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를 졸업하고, 194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6년에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으로 입학하여 졸업 후 대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육군 소장이던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2년 동안의 군정 후 1963년에 민간 정부로 돌아서면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7년에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는 1차에 한해 대통령직 중임이 허용되는 제3공화국 헌법을 1969년에 개헌하여 자신이 대통령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길을 텄고, 이어 1971년에는 유신 헌법을 채택하여 자신이 계속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되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 원조로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한국이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이 그치지 않던 시절에 미국 원조가 보릿고개를 도왔다. 미국정부는 잉여농산물 재고 처리와 이를 통한 군수물자 판매를 목적으로 1954년에 공법 480호(PL480)를 제정하여 원조 수단으로 삼았다. 미국 원조가 들어오면 한국정부는 동일한 액수의 화폐를 특별계정에 적립했는데, 이는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고 불렀다. 대충자금은 한미 합의에 따라 10~20%는 한국 내 미국기관이 사용하고, 나머지 80~90%는 한국정부가 사용했다. 한국정부는 이 돈의 대부분을 생필품 수입을 위해, 나머지는 미국산 무기 구입을 위해 사용했다. 미국 원조는 1954년에 시작하여 1970년에 끝났다. 미국 원조는 PL480에 따라 2억 264만8천 달러, 여기에다 국제개발처(AID) 차관을 포함하면 20억 8834만 달러에 이르렀다. 미국 원조는 양면성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이 미국 원조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고, 정부가 재정파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비전은 ‘가난 극복’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5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네 번째 공약은 이렇다―“절망과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그는 군정 시절인 1962년에 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1961년 11월에 정래혁 상공부장관이 이끈 한국 대표단이 서독과 협상을 벌인 끝에 1억 4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받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독일에 인력을 수출하고, 이들의 월급을 3년간 독일 은행에 예치한다는 조건으로 서독 차관의 지불 보증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1차 5개년계획이 실행에 들어갔다. 한국은 서독 파견 광부를 모집했다. 고운 손이 결격 사유가 될까 봐 연탄에다 손을 비벼 일부러 거칠게 만든 지원자도 있었다. 광부 1진 123명이 1963년 12월에 독일에 도착했다.

일 년 후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했다. 그는 광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나는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중략).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이 날 이 자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참석한 광부들이 한 데 엉켜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어떤 업적을 쌓았는가?

첫째,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박정희는 1963년부터 1차 5개년계획 실행에 들어갔지만 돈이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1963년에 서독에 광부를 파견하고,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게 되었다. 1966년에는 서독과 정식으로 특별 고용계약을 맺고 광부 3천 명, 간호사 3천 명을 더 파견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는 7천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기본생활비를 제외하고 월급의 70~90%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그 돈은 연간 약 5천만 달러로, 한국 국민총생산의 2% 정도에 이르렀다. 이 돈이 제1차 5개년계획을 실행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 박정희는 한일국교 정상화로 경제발전의 불씨를 당겼다. 1948년에 한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역대 지도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였다. 뜨거운 감자는 박정희에게 굴러왔다. 박정희는 한일국교 정상화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군정시절인 1961년에 박정희는 미국 방문 길에 일본에 들렀다. 그는 일본에서 국민의 여론과는 달리 한일국교 정상화 의지를 밝혔다. 이로 인해 나라 안팎이 떠들썩해졌다. 정부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막기 위해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 1965년 6월 22일에 마침내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협정 4개 및 문서 25개가 서명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무상공여 3억 달러, 10년에 걸쳐 균등 분할되는 유상 재정 차관 2억 달러, 양해 사항으로 민간 차관 3억 달러를 받기로 했다. 한일국교 정상화의 결과 한국은 일본에서 들어온 돈으로 1966년에 무려 12.2%의 성장률을 달성했고, 1차 5개년계획을 연평균 8.5%로 초과 달성했고, 2차 5개년계획 목표를 2년 앞당겨 1969년에 초과 달성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선택은 옳았다.

셋째, 박정희는 1965년 베트남 파병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2005년에 공개된 베트남전 관련 외교 문서는 베트남 파병이 박정희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혀주었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한국이 얻게 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군사 원조 증가분 10억 달러, 미국의 한국군 파월 경비 10억 달러, 베트남 특수 10억 달러, 기술 이전 및 수출 진흥 지원 20억 달러 등 모두 50억 달러나 되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1965년 5월에 박정희는 워싱턴에서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미국이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감사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존슨 대통령은 한국 지원에 감사하면서 공과대학을 하나 지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이 주역이 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뒤이어 대덕연구단지가 설립되었다.
 
넷째, 박정희는 ‘수출이 아니면 죽음!’이라며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고 수출을 독려했다. 1963년에 수출은 8,680달러였는데 박정희의 독려로 1964년 11월 30일에 1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날이 ‘수출의 날’(지금은 ‘무역의 날’)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박정희는 15년 동안 이 회의를 매달 주재했다. 박정희의 수출진흥정책은 결과적으로 굶어죽는 나라 한국을 2013년에 수출·입 규모 1조 달러가 넘는 세계 7위의 무역대국, 경제규모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으로 그 위상을 높였다.

다섯째,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의 원조다. 그는 도농(都農) 격차에 따른 농촌개혁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새마을운동은 급속한 산업화와 공업화로 도시와 농촌 간 불균형이 심화되어 갈 때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새마을운동은 중국이 수입하여 농촌에 보급했을 정도로 나라 밖에서도 높게 평가받았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농촌 지도자들이 한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 한국말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하고 외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볼 때는 콧잔등이 찡해진다.

박정희 평가

박정희의 업적은 ‘굶어죽는 나라 한국을 가난으로부터 탈출시켜 경제대국의 길로 들어서게 이끌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공로로 박정희는 산업화 세력에게는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고, 일반 국민으로부터는 ‘국민이 존경하는 지도자 1위’로 평가받는다. 반면에 그는 민주화 세력에게는 ‘민주화를 막은 독재자’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 조정되리라고 기대된다. 여기에서는 한 때 민주화 세력의 대표 격이었던 두 사람의 평가를 소개한다.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가 전향한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는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과거에 그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 박정희 식 군부 독재가 아니었다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다.”2) ‘급진 좌파의 주역이었고, 위장취업 1세대였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번이나 감옥에 갔다’고 자신을 밝힌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는 시장경제 예찬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대한민국은 「수출입국」3)을 통해서 발전했다. …. 등소평 시대에는 개혁개방정책을 도입함으로써,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지금의 중국경제를 만들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북한 인민을 굶기고 있다. 박정희의 수출입국은 대한민국 국민이 웰빙하고, 다이어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4)

박정희는 시장경제 선도자(先導者)

1973년쯤일까? 박사과정에서 한 교수님이 ‘Export-led Outward-looking Economic Policy’(수출주도형 개방경제정책)라는 논문을 읽도록 했다. 저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논문은 당시에 후진국 경제발전 방향을 제시한 소중한 논문으로 평가되었다. 그 논문은, 후진국은 경제를 개방하여 수출, 구체적으로 노동집약적 제조상품을 수출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모델로 그 논문은 한국을 비롯하여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예로 들었다. 당시에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언급한 경제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얼마나 시대에 앞서 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5)

‘수출이 아니면 죽음!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고 강조한 박정희의 ‘수출진흥정책’을 요즘 말로 바꾸면 ‘개방정책’이다. ‘개방’은 시장경제의 핵심 키워드다. ‘개방’으로 성공한 나라는 리콴유의 싱가포르, 덩샤오핑의 중국, 아일랜드 등이다. 박정희는 이미 1960년대 초에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을 잘살게 한 시장경제 선도자다.
 
각주
1) 김성진(2007), 『박정희』, 살림. Wikipedia. 박동운(2008), 『CEO 정신을 발휘한 사람들』, 三英社.
2) 김성진(2007), 『박정희』, 살림.
3)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 초기에 썼던 ‘자주경제 재건’이라는 용어 대신 1964년부터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1965년 연두교시에서 심지어 ‘수출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로 수출입국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수출입국 1970년 1월 6일 대통령 박정희”라는 한글 휘필(揮筆)을 남겼는데, 이는 2014년 한 경매에서 최저 입찰가 1,500만 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4) 김문수(2006), 『나의 길 나의 꿈』, 미지애드컴.
5)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배경에는 박 대통령에게 수출의 중요성을 건의한 전택보 등 몇몇 측근들의 이야기가 깔려 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