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동훈 전 청와대 비서관이 말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청와대 명함 찍지 말라” “우표 팔아 한푼이라도…”

여동활 2014. 8. 31. 21:25

“청와대 명함 찍지 말라” “우표 팔아 한푼이라도…”
동훈 전 청와대 비서관이 말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
2014-08-30

[집현실 토크]박정희 정부의 청와대, 지금과 차이점은?(부분 생략)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송 사상 최초로 보내드리는 청와대 본격 해부 프로그램, 청와대 25시!의 동정민, 이남희,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박정희 정부에서 12년간 비서관을 역임하신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을 모십니다! 베일에 싸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 그리고 박정희-육영수 두 분의 친필 원고도 최초로 공개합니다!

청와대 25시첫 코너는 집현실 토크인데요. 오늘 모신 초대 손님은, 70년대 이후 방송에는 첫 출연하시는 분이라 저희가 정~말로 어렵게 모셨죠?

 

그렇습니다. 지난 1963년부터 75년까지, 박정희 정부에서 12년간 정무비서관과 사정비서관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 나오셨습니다. 어서오십쇼!

차관님, 이렇게 모시게 돼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정말 오랜만에 방송 출연을 결심하셨는데,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오늘 저희가 동 전 차관님을 모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무려 12년간 청와대에 계신 분으로서 당시의 청와대 이야기를 통해, ‘옛것으로부터 현재를 배운다’ 는 교훈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차관께선 지난 63년부터 75년까지 대통령 스피치라이터, 정무비서관과 사정비서관을 역임하셨는데요.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지금 말씀하신 그 인연의 시작인 1963년 8월 3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 전역사를 영상으로 준비했
습니다. 함께 보시죠!
 



:
끝으로 국군 장병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 있기를 빌며, 이 나라를 돕기 위해
와 있는 우방 전우들의 무운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오늘 병영을 물러나는 이 군인을 키워 주신 선배, 전우 여러분,
그리고 군사 혁명 2년 동안 혁명 하라는 불편 속에서도 참고
편달 협조 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다음의 한 구절로서 전역의 인사를 대(代) 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여기서 마지막 구절,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이 구절이 당시 유행어가 되지 않았습니까? 헌데 이 말을 차관께서 쓰셨다고요? 그동안 보관해온 연설문 육필원고를 직접 갖고 오셨죠?

‘불운한 군인’의 의미가 뭡니까? 헌데 ‘불운한’ 이란 단어는 당시 이후락 공보실장이 추가한 것이라고요?

 

박정희- 육영수 친필 ‘최초 공개’ 

자, 이번에는 방송 최초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친필원고를 공개해드릴 텐데요. (원고 보며) 먼저 이 원고는 앞장에 ‘농업용수 개발계획’이라고 씌어있고, 펼쳐보면, 1968년 11월 15일 대통령 박정희, 라고 씌어있네요. 어떤 원고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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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부터 잇따라 3년 동안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한해(旱害)가 들었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혹심한 가뭄으로 벼를 비롯한 농작물의 큰 감수는 물론, 농가에도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1968년 7월 15일 동훈 비서관이 원고지에 대통령 명의로 전국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지하수 개발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글을 써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줬음. 그리고 박 대통령에게 “더 확실하게 압박하기 위해서는 이 글을 대통령 친서로 써서 돌렸으면 좋겠다”고 건의.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흔쾌히 그게 좋겠다고 하고 직접 원고지 6매 분량을 만년필로 씀. 그 글을 전국 군 단위에 다 내려 보냈음. 1968년 11월 15일 정부에서 발간된 책자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친필 유시(諭示)가 실렸다.

이번에는 육영수 여사의 친필을 보실 차례인데요. ‘해외에 우표를 보내는 문제에 관하여’라고 제목이 달려있는 보고문이고요, 여기 초록색 글씨가 육영수 여사의 친필이고, 위에 서명까지 있네요? 어떤 내용의 보고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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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동훈 비서관이 육 여사에게 보고를 올린 것. 이는 육 여사가 해외에서 온 우표를 직접 다 떼어서 그걸 다시 수집해서 파는 것을 주도했다고 함. 돈이 없는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이기도 함. 그래서 그걸 더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육 여사가 문화부에 물어봄. 이에 동훈 비서관이 문화부의 부정적인 의견을 육 여사에게 보고. 그 사진에는 육 여사가 “돈 안 들고 좋은 건데 귀찮게 생각하는 모양. 공무원의 사고방식이 원망스러움. 되도록이면 비용 안 들고도 할 수 있는 일인데”라고 직접 쓰고 싸인을 한 보고서 원고를 갖고 있음.

 

이제 박정희 정부 시절의 청와대 이야기를 여쭙겠습니다.

벌써 50여 년 전 일이긴 합니다만, 아직도 기
억이 생생하실 것 같은데요.
당시 청와대의 권한은 지금 정부와 비교하면 어땠습니까?
 

-청와대 비서들이 절대 설치지 못하게 했으며, 박 대통령은 장관을 불러서 일을 했음. 수석비서관회의 대통령이 주재한 적 거의 없음. 비서실장이 했음.

 



그렇다면 청와대 조직 자체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나요?
 

-청와대에 직원은 200명 정도. 청와대는 TF 조직처럼 꾸렸음. 대통령 관심사안. 그리고 부처 간 잘 안 되는 것 들 위주로 선별적으로 운영했음.


무려 12년간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보신 분으로써, 인간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어떤 인물로 기억하십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소 말이 많지 않고, 얼굴에 희로애락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절대 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관을 혼낼 때도 부하직원 있는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고, 따로 혼낸다. 배려심이 많은 인물. TV 드라마 보면 소리 지르는 사람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약간 수줍음 있는 분이다.
 

-박 대통령은 지시할 때 말을 아꼈음. 이후락 평양 가는 날 아침에도 딱 세마디 했음. 평소에도 말을 아껴. 왜냐면 대통령의 말을 밖에다 퍼뜨릴 수 있고 도청의 우려도 있었음.
 



박정희 전 대통령 하면 ‘인사전략가’로 통하죠. 때문에 특유의 용인술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돈인데요.
동아일보에서 정리한 박정희 용인술을 보니, 장수형, 통 큰, CEO, 교사, 균형, 이렇게 다섯 가지로 요약이 가능한데... 비서관 시절 직접 겪은 비화가 있으면 소개 좀 해주시죠.

-차관 이하 인사권은 원칙적으로 장관에게 있었다. 대통령비서실에서 각 부처에 연락할 때도 국·실장이 아니라 장관에게만 연락하게 해 장관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그 대신 책임은 엄격하게 물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이끌며 ‘불도저’라는 별칭을 얻은 장 전 부총리였지만 삼성계열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처를 잘못하자 즉각 경질했다. 장·차관 공동운명제도 적용했다. 장관이 데리고 일할 사람으로 차관을 인선하게 한 만큼 차관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장관까지 함께 물러나게 했다.

 

-5대 대선 이틀 전인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는 당시 박정희 공화당 후보가 여수·순천사건 관련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실을 호외로 보도했다. 당시 사상 논쟁은 선거의 최대 쟁점이었던 만큼 그는 동아일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출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초대 국무총리로 최두선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임명했다.

-현장에서 실무를 관장하는 젊은 인재들을 눈여겨봤다가 직접 발탁하는 것도 ‘박정희 스타일’. 누군가에게 몇 차례 걸러진 인사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은 “박 전 대통령은 농림부 농정국장, 내무부 지방국장, 재무부 이재국장 등 당시 주요 정부 부처 핵심 실·국장들의 정책 입안과 실행 역량을 관찰했다”고 전했다. 직접 불러 토론하고 과제를 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인사수첩에는 사람에 대한 기록도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고 한다. 1976년 5월 15일 동훈 비서관이 통일원 차관으로 옮겨갈 때 박정희 대통령이 12년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친서 씀. “청와대 근무 10년의 노고와 그간의 업적을 높이 치하하며 앞으로도 방가(나라邦 집家 : 나라를 내 집안처럼)를 위하여 위국 대성 있기를 기원합니다. 대통령 박정희”.
또 부인이 아플 때는 “동훈 비서관, 부인의 쾌유를 기원하고, 치료비로 보태 쓰기 바랍니다” 하며 치료비 줌. 사람들 다 기억하고 있고 내보낸 사람들에 대해서 1년 정도 쉬어 봐라 그러면 1년 뒤에 반드시 답을 준다.
 

-박 전 대통령은 측근끼리도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분리통치(divide and rule)’의 용인술을 구사했다. 유신 전에는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경쟁 구도를, 유신 후에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경쟁 구도를 유도했다. 10·26사태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권력 관리 의도가 깔려 있었다. 여기엔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세력을 만들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만큼 정권 내내 견제를 받았.

박근혜 대통령은 성격과 기질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만, 번번이 인사문제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고 있죠. 아버지 박정희의 용인술에서 어떤 부분을 교훈 삼아야 할까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 국민들은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 출현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이 갖춰야할 리더의 조건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