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양수기를 끌어안고 울어버린 육영수 영부인
기사입력 2013-07-11 03:00:00 기사수정 2013-07-11 09:41:47
육 여사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지만 1950년 말 결혼 이후 1958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는 전셋집을 전전했고, 때로 의식주가 어려운 때도 있었다. 늘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던 그가 본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못살던 시절이었으며 행정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그늘’도 너무 많았다. 절망에 빠진 많은 민초(民草)들은 최고 권력자의 안주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행여 읽어주기나 할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해 육 여사는 꼼꼼히 모든 편지를 읽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들은 진심 어린 여사의 반응과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된 해인 1961년 7월 3일 무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여사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절도죄로 교도소에서 형을 치르고 나온 전과범이 보낸 것이었다. ‘모범수였는데 나와 보니 일자리도 없고 장사할 밑천도 없어 막막하다. 손수레 하나만 사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여사는 비서를 통해 신원조회를 해보고 거짓이 아니라는 연락을 받고 그를 의장 공관으로 불렀다. 가족관계는 어떤지, 손수레가 있다면 무슨 장사를 하고 싶은지 세심하게 묻고는 봉투 두 개를 건넸다. 그중 한 개에는 포도장사를 하고 싶다는 그를 위해 손수레 한 대 값과 포도 열 관을 살 수 있는 돈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데 든 왕복 여비와 점심 값을 넣은 것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신문 사회면과 방송을 빼놓지 않고 봤다. 세상 물정을 파악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나름대로 돕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에는 이촌동 판자촌 박옥순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미역국은 고사하고 쌀이 없어 굶어 죽게 생겼다는 기사를 보았다. 육 여사는 산모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고는 폐수와 오물로 넘치는 판자촌에서 어렵사리 집을 찾아 몸이 퉁퉁 부은 산모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어린 생명을 위해 직접 밥을 안치고 국을 끓여주었다.
여사에게는 대변인도 공보관도 없었지만 이런 선행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민초들이 보내는 신뢰와 애정은 깊어만 갔고 그 깊이에 비례해 편지도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사가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돕는 식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삼양동 판자촌을 찾았다. 여사는 판자촌 청년들에게 “국수 기계를 사줄 테니 국수 공장을 해보라”며 조합을 만들 것을 권한다. 며칠 뒤 청년 일곱 명으로부터 “조합을 구성했으며 공장으로 쓸 건물도 물색해놓았다”는 답이 왔다. 여사는 꼼꼼하게 이들을 면접한 뒤 건물까지 확인한 후 약속대로 국수틀과 밀가루를 사주었다. 요즘 ‘협동조합’ 활동이 활성화되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사는 일찍이 이때부터 생활인들의 자활 수단으로 ‘조합’의 역할에 주목했던 것이다.
생전에 여사는 “성의 없는 봉사나 구제는 상대에게 혐오 열등의식 의타심을 길러주어 도와주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지 베푸는 것만이 봉사와 사랑이 아니다. 진심으로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복지가 화두인데 육 여사의 ‘진정성 있는’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복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여사는 국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겼다.
1968년 여름 호남지방에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폭염이 이어졌다. 대통령은 밤잠을 설치며 초조해했고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여사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대통령 부부는 가뭄이 가장 심하다는 전남 나주로 내려갔다. 논바닥에 양수기가 서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여사가 양수기 쪽으로 가더니 갑자기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쉼 없이 힘주어 밟아도 물이 나오지 않자 여사는 양수기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를 바라보는 주변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같은 해 서울은 집중폭우로 물난리가 났다. 서울 잠원동 주민 150가구가 강물을 피해 인근 초등학교로 피신했는데 감기와 배탈 환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사는 약품을 직접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국립묘지 근처까지 오자 한강은 이미 거대한 바다로 변해 있었다. 어둠까지 내려앉고 있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육 여사가 아니었다.
여사는 뱃사공과 배를 수소문해 강을 건너 학교에 도착했다. 영부인이 늦은 밤에, 그것도 배까지 타고 와서 구호품을 전해 주느라 물속을 첨벙첨벙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사는 평생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유신이 선포된 후 반(反)독재 시위가 절정을 향해 달리던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를 불쑥 찾았다. 국이라도 따뜻하게 끓여 먹으라고 동태를 건넸다.
여사는 난롯가에 근로자들과 둘러앉았다. 그러자 20대 청년이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다 정치를 잘못해서”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말투도 공격적이었다. 육 여사는 온화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청년의 말을 끝까지 듣더니 청년이 말을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남이 하기 힘든 말을 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러나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렇게 모두 비뚤어진 방향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을 거예요. 지금 시민들 애로가 많은 줄은 알아요. 하지만 민원 창구나 정부에서 하는 일도 모두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여사는 며칠 후 청년을 포함해 아홉 명의 근로자를 청와대로 불러 만둣국을 대접했다. 1971년 여사가 날품팔이 근로자들이 30원을 내고 하룻밤을 유숙하는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를 방문했을 때 적은 소감문은 이렇다.
“(이곳에 있는) 실업자들을 보며 이들이 하루아침에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정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반겨주는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식당 난롯불을 가운데 끼고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제쳐놓고 건강한 미소와 순수한 정신을 내게 보여준다. 떠날 때 자주 오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뜻을 열심히 들어보고 성의껏 그 뜻을 대통령께 전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의무에 앞서 커다란 보람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朴 대통령, 겉은 ‘육영수’ 속은 ‘박정희’?
‘퍼스트레이디’ 역대 가장 최고의 영부인은?
지학순 주교가 연행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3일 뒤인 1974년 8월 15일은 광복 29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6분 남산 국립극장.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입장을 알리는 장내 방송과 함께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오자 모두 기립해 박수로 맞았다. 박 대통령은 오른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했고 오렌지색 한복을 입은 육 여사는 활짝 웃음을 머금고 목례했다.
10시 13분. 대통령이 연설대 앞으로 나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축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10분 뒤인 10시 23분. 청중의 눈과 귀가 모두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데 관객석 뒤쪽 해외 교포석 끝에서 검은색 양복에 안경 쓴 괴청년이 불쑥 일어났다. 그는 무대 쪽 복도로 5m가량 뛰어나가더니 무대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권총이 들려 있었다. ‘타앙 탕’ 하는 금속성 두 발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범인은 다시 15도가량 경사진 통로를 17∼18m가량 뛰어 내려가 오케스트라석 앞까지 이르렀다. 순간 대통령은 연단 뒤로 몸을 숙여 피했다. 그러자 범인은 연단 왼쪽에 꼿꼿이 앉아 있던 육 여사를 향해 두 발을 쏘았다. 육 여사가 좌석에 앉은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궜다. 대통령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날 총소리가 나자마자 무대 뒤에서 달려 나와 문세광을 향해 정조준하는 모습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던 박상범 전 대통령경호실장은 2011년 10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커튼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 하는 소리가 들려 바로 튀어 나갔지요. 문세광이 무대 쪽으로 총을 쏘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각하께서 연설대 밑으로 피하는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간 저에게 ‘우리 내자는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공개된 사진 중에 제가 정조준 상태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사진이 있는데 각하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여사가 계신 쪽을 돌아본 모습이 찍힌 겁니다. 여사는 이미 총에 맞아 고개를 떨군 상태였습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검거됐습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3∼4초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육 여사가 쓰러지고 2분 뒤 문세광이 경호원들에게 양팔과 양다리를 들린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이 다시 연설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보리차를 한잔 마신 뒤 청중을 바라봤다. 충격에 휩싸였던 객석에서 박수갈채와 “대통령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조용해지자 대통령은 손을 들어 답례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0시 33분. 박 대통령은 기념사를 모두 마치고 여학생 합창단의 광복절 노래와 폐회 선언까지 기다린 뒤 박수갈채에 손을 두세 번 들어 답하면서 극장을 떠나 곧 육 여사가 응급가료 중인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달려갔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김성진 씨는 회고록 ‘한국 정치 100년을 말한다’에서 “자신을 겨눈 총탄이 부인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연설대 밑에서 숨어 지켜본 뒤 다시 소란해진 장내를 가라앉히고 나서 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경축사를 끝까지 계속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저분은 사명감의 불사조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범인 문세광은 23세의 재일 한국인이었다. 본적은 경남 진양군 대평면 산촌리 3-24, 살고 있는 곳은 일본 오사카. 여권은 일본인 요시이 이름으로 된 것이었고 비자는 관광비자였다.
대통령저격사건수사본부는 며칠 뒤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문세광이 조총련계 재일교포로 북괴 공작선 만경봉호에 승선했을 때 북괴 공작지도원으로부터 ‘박 대통령 저격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사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키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밝혔다(동아일보 8월 23일자).
김수환 추기경도 비통과 충격에 휩싸인다. 그는 회고록에서 “육 여사가 수술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대세(代洗·가톨릭에서 사제를 대신해 예식을 생략하고 세례를 주는 일)라도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날 경축연회장에서 만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총리가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와서는 ‘수술 중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결국 육 여사는 깨어나지 못하고 49세 나이로 유언 한마디 없이 오후 7시에 운명한다.
여사의 시신이 옮겨진 청와대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가득했다. 다시 김성진 전 대변인의 회고다.
“박 대통령은 조문객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식적으로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항상 앞서 걷는 나에게 혼자서 먼저 가지 말고 같이 가자고 얘기하던 그 사람이 나보다 먼저 혼자서 갈 줄은 참으로 몰랐다. 지금도 그 사람이 두 손을 내밀며 ‘이 손 좀 잡아 보세요. 나병 환자들과 악수한 손이에요’ 하며 저 문으로 들어서는 것만 같다’…문상객들의 발길이 거의 끊기고 비서관들과 정부 측 인사 몇 명만이 남아 접견실에서 밤샘을 하고 있으려면 밤마다 안쪽에서 마치 호랑이 울부짖음을 방불케 하는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통령이 여사의 시신 앞에서 홀로 목 놓아 우는 소리였다.”
전국에 애도와 추모 물결이 휩쓸었다. 할머니와 부녀자들은 분향소에 와서 엎드려 마치 가족이라도 죽은 듯 애통해했다. 이틀 만에 일반 조문객 수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전국 도청마다 마련된 분향소에도 지방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추모 물결은 1975, 76년까지 이어진다. 여사가 숨진 지 2년이 지난 76년 7월 3일에는 묘소를 참배한 인원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김지하는 최근 기자에게 육 여사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육 여사가 대통령감’이라는 거였다. ‘왜냐’고 여쭸더니 육 여사가 두 분을 각각 만났을 때 이렇게 묻더란다. ‘박 대통령의 가장 큰 오류가 뭡니까.’ 추기경이나 지 주교나 답을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육 여사가 다시 이렇게 되묻더란다. ‘첫째 친일파, 둘째 빨갱이(남편의 남로당 경력을 말한다), 셋째 친미파라는 거죠?’ 한마디로 시중에서 말하는 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먼저 지적하면서 두 사람에게 ‘대통령 좀 봐달라’ 그 이야기였다. 그런 육 여사를 보고 두 분 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그 시절은 너나없이 못살던 시절이었으며 행정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그늘’도 너무 많았다. 절망에 빠진 많은 민초(民草)들은 최고 권력자의 안주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행여 읽어주기나 할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해 육 여사는 꼼꼼히 모든 편지를 읽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들은 진심 어린 여사의 반응과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된 해인 1961년 7월 3일 무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여사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절도죄로 교도소에서 형을 치르고 나온 전과범이 보낸 것이었다. ‘모범수였는데 나와 보니 일자리도 없고 장사할 밑천도 없어 막막하다. 손수레 하나만 사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여사는 비서를 통해 신원조회를 해보고 거짓이 아니라는 연락을 받고 그를 의장 공관으로 불렀다. 가족관계는 어떤지, 손수레가 있다면 무슨 장사를 하고 싶은지 세심하게 묻고는 봉투 두 개를 건넸다. 그중 한 개에는 포도장사를 하고 싶다는 그를 위해 손수레 한 대 값과 포도 열 관을 살 수 있는 돈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데 든 왕복 여비와 점심 값을 넣은 것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신문 사회면과 방송을 빼놓지 않고 봤다. 세상 물정을 파악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나름대로 돕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에는 이촌동 판자촌 박옥순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미역국은 고사하고 쌀이 없어 굶어 죽게 생겼다는 기사를 보았다. 육 여사는 산모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고는 폐수와 오물로 넘치는 판자촌에서 어렵사리 집을 찾아 몸이 퉁퉁 부은 산모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어린 생명을 위해 직접 밥을 안치고 국을 끓여주었다.
여사에게는 대변인도 공보관도 없었지만 이런 선행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민초들이 보내는 신뢰와 애정은 깊어만 갔고 그 깊이에 비례해 편지도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사가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돕는 식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삼양동 판자촌을 찾았다. 여사는 판자촌 청년들에게 “국수 기계를 사줄 테니 국수 공장을 해보라”며 조합을 만들 것을 권한다. 며칠 뒤 청년 일곱 명으로부터 “조합을 구성했으며 공장으로 쓸 건물도 물색해놓았다”는 답이 왔다. 여사는 꼼꼼하게 이들을 면접한 뒤 건물까지 확인한 후 약속대로 국수틀과 밀가루를 사주었다. 요즘 ‘협동조합’ 활동이 활성화되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사는 일찍이 이때부터 생활인들의 자활 수단으로 ‘조합’의 역할에 주목했던 것이다.
생전에 여사는 “성의 없는 봉사나 구제는 상대에게 혐오 열등의식 의타심을 길러주어 도와주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지 베푸는 것만이 봉사와 사랑이 아니다. 진심으로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복지가 화두인데 육 여사의 ‘진정성 있는’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복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여사는 국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겼다.
1968년 여름 호남지방에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폭염이 이어졌다. 대통령은 밤잠을 설치며 초조해했고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여사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대통령 부부는 가뭄이 가장 심하다는 전남 나주로 내려갔다. 논바닥에 양수기가 서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여사가 양수기 쪽으로 가더니 갑자기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쉼 없이 힘주어 밟아도 물이 나오지 않자 여사는 양수기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를 바라보는 주변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같은 해 서울은 집중폭우로 물난리가 났다. 서울 잠원동 주민 150가구가 강물을 피해 인근 초등학교로 피신했는데 감기와 배탈 환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사는 약품을 직접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국립묘지 근처까지 오자 한강은 이미 거대한 바다로 변해 있었다. 어둠까지 내려앉고 있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육 여사가 아니었다.
여사는 뱃사공과 배를 수소문해 강을 건너 학교에 도착했다. 영부인이 늦은 밤에, 그것도 배까지 타고 와서 구호품을 전해 주느라 물속을 첨벙첨벙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사는 평생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유신이 선포된 후 반(反)독재 시위가 절정을 향해 달리던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를 불쑥 찾았다. 국이라도 따뜻하게 끓여 먹으라고 동태를 건넸다.
여사는 난롯가에 근로자들과 둘러앉았다. 그러자 20대 청년이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다 정치를 잘못해서”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말투도 공격적이었다. 육 여사는 온화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청년의 말을 끝까지 듣더니 청년이 말을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남이 하기 힘든 말을 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러나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렇게 모두 비뚤어진 방향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을 거예요. 지금 시민들 애로가 많은 줄은 알아요. 하지만 민원 창구나 정부에서 하는 일도 모두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여사는 며칠 후 청년을 포함해 아홉 명의 근로자를 청와대로 불러 만둣국을 대접했다. 1971년 여사가 날품팔이 근로자들이 30원을 내고 하룻밤을 유숙하는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를 방문했을 때 적은 소감문은 이렇다.
“(이곳에 있는) 실업자들을 보며 이들이 하루아침에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정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반겨주는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식당 난롯불을 가운데 끼고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제쳐놓고 건강한 미소와 순수한 정신을 내게 보여준다. 떠날 때 자주 오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뜻을 열심히 들어보고 성의껏 그 뜻을 대통령께 전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의무에 앞서 커다란 보람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朴 대통령, 겉은 ‘육영수’ 속은 ‘박정희’?
‘퍼스트레이디’ 역대 가장 최고의 영부인은?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육영수 여사는 대통령감’”
기사입력 2013-07-09 03:00:00 기사수정 2013-07-10 10:40:49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4>육영수 여사 서거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입장을 알리는 장내 방송과 함께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오자 모두 기립해 박수로 맞았다. 박 대통령은 오른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했고 오렌지색 한복을 입은 육 여사는 활짝 웃음을 머금고 목례했다.
10시 13분. 대통령이 연설대 앞으로 나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축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10분 뒤인 10시 23분. 청중의 눈과 귀가 모두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데 관객석 뒤쪽 해외 교포석 끝에서 검은색 양복에 안경 쓴 괴청년이 불쑥 일어났다. 그는 무대 쪽 복도로 5m가량 뛰어나가더니 무대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권총이 들려 있었다. ‘타앙 탕’ 하는 금속성 두 발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범인은 다시 15도가량 경사진 통로를 17∼18m가량 뛰어 내려가 오케스트라석 앞까지 이르렀다. 순간 대통령은 연단 뒤로 몸을 숙여 피했다. 그러자 범인은 연단 왼쪽에 꼿꼿이 앉아 있던 육 여사를 향해 두 발을 쏘았다. 육 여사가 좌석에 앉은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궜다. 대통령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날 총소리가 나자마자 무대 뒤에서 달려 나와 문세광을 향해 정조준하는 모습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던 박상범 전 대통령경호실장은 2011년 10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커튼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 하는 소리가 들려 바로 튀어 나갔지요. 문세광이 무대 쪽으로 총을 쏘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각하께서 연설대 밑으로 피하는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간 저에게 ‘우리 내자는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공개된 사진 중에 제가 정조준 상태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사진이 있는데 각하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여사가 계신 쪽을 돌아본 모습이 찍힌 겁니다. 여사는 이미 총에 맞아 고개를 떨군 상태였습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검거됐습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3∼4초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육 여사가 쓰러지고 2분 뒤 문세광이 경호원들에게 양팔과 양다리를 들린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이 다시 연설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보리차를 한잔 마신 뒤 청중을 바라봤다. 충격에 휩싸였던 객석에서 박수갈채와 “대통령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조용해지자 대통령은 손을 들어 답례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0시 33분. 박 대통령은 기념사를 모두 마치고 여학생 합창단의 광복절 노래와 폐회 선언까지 기다린 뒤 박수갈채에 손을 두세 번 들어 답하면서 극장을 떠나 곧 육 여사가 응급가료 중인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달려갔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김성진 씨는 회고록 ‘한국 정치 100년을 말한다’에서 “자신을 겨눈 총탄이 부인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연설대 밑에서 숨어 지켜본 뒤 다시 소란해진 장내를 가라앉히고 나서 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경축사를 끝까지 계속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저분은 사명감의 불사조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범인 문세광은 23세의 재일 한국인이었다. 본적은 경남 진양군 대평면 산촌리 3-24, 살고 있는 곳은 일본 오사카. 여권은 일본인 요시이 이름으로 된 것이었고 비자는 관광비자였다.
대통령저격사건수사본부는 며칠 뒤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문세광이 조총련계 재일교포로 북괴 공작선 만경봉호에 승선했을 때 북괴 공작지도원으로부터 ‘박 대통령 저격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사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키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밝혔다(동아일보 8월 23일자).
김수환 추기경도 비통과 충격에 휩싸인다. 그는 회고록에서 “육 여사가 수술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대세(代洗·가톨릭에서 사제를 대신해 예식을 생략하고 세례를 주는 일)라도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날 경축연회장에서 만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총리가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와서는 ‘수술 중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결국 육 여사는 깨어나지 못하고 49세 나이로 유언 한마디 없이 오후 7시에 운명한다.
여사의 시신이 옮겨진 청와대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가득했다. 다시 김성진 전 대변인의 회고다.
“박 대통령은 조문객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식적으로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항상 앞서 걷는 나에게 혼자서 먼저 가지 말고 같이 가자고 얘기하던 그 사람이 나보다 먼저 혼자서 갈 줄은 참으로 몰랐다. 지금도 그 사람이 두 손을 내밀며 ‘이 손 좀 잡아 보세요. 나병 환자들과 악수한 손이에요’ 하며 저 문으로 들어서는 것만 같다’…문상객들의 발길이 거의 끊기고 비서관들과 정부 측 인사 몇 명만이 남아 접견실에서 밤샘을 하고 있으려면 밤마다 안쪽에서 마치 호랑이 울부짖음을 방불케 하는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통령이 여사의 시신 앞에서 홀로 목 놓아 우는 소리였다.”
전국에 애도와 추모 물결이 휩쓸었다. 할머니와 부녀자들은 분향소에 와서 엎드려 마치 가족이라도 죽은 듯 애통해했다. 이틀 만에 일반 조문객 수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전국 도청마다 마련된 분향소에도 지방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추모 물결은 1975, 76년까지 이어진다. 여사가 숨진 지 2년이 지난 76년 7월 3일에는 묘소를 참배한 인원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김지하는 최근 기자에게 육 여사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육 여사가 대통령감’이라는 거였다. ‘왜냐’고 여쭸더니 육 여사가 두 분을 각각 만났을 때 이렇게 묻더란다. ‘박 대통령의 가장 큰 오류가 뭡니까.’ 추기경이나 지 주교나 답을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육 여사가 다시 이렇게 되묻더란다. ‘첫째 친일파, 둘째 빨갱이(남편의 남로당 경력을 말한다), 셋째 친미파라는 거죠?’ 한마디로 시중에서 말하는 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먼저 지적하면서 두 사람에게 ‘대통령 좀 봐달라’ 그 이야기였다. 그런 육 여사를 보고 두 분 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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