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민주평통 수석부위원장 (현경대),,분단이 우리탓이라니 ,,그런인식부터 바로잡을것

여동활 2013. 7. 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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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 만난 사람] 朴대통령의 막후 조언자 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분단이 우리 탓이라니…그런 인식부터 바로잡을것
기사입력 2013.07.05 16:34:49 | 최종수정 2013.07.05 16: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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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74)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조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원로 중 한 사람이다. 제주 출신인 그는 1962년에 설립된 정수장학회 1기 출신이다.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들의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고 박 대통령 지지 조직인 `한강포럼`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른바 `친박 원조`다.

검사로 일하다 정계에 입문해 11ㆍ12대, 14~16대 국회의원(5선)을 지낸 그는 17대 총선 이후 연거푸 세 번 패배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지난해 대선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제주 지역 야전사령관을 맡아 선거판을 종횡무진 누볐다. 제주는 야권 성향이 강한 곳으로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걸고 일전을 벌인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박 대통령이 과반 이상 득표라는 선전을 펼치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역시 `현경대`란 정치권의 평판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그는 제주를 찾는 야당 인사들조차 찾아 깍듯이 인사하는 정치인이다. 지난 4월 열린 제주 4ㆍ3 희생자 위령제 당시 문희상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현 위원장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주변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현 수석부의장은 정가에서 `인터뷰하기 힘든 정치인`으로 통한다. 매일경제신문도 지난 5월 중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때가 아니다"고 고사했다. 몇 차례 설득한 끝에 한 달 보름여 지난 이달 초 민주평통 사무실에서 현 수석부의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이날 박 대통령과의 인연, 정치에 입문한 계기, 민주평통 운영 계획, 원로 그룹인 7인회, 정치권의 개헌 논쟁 등에 대해 담담히 풀어갔다. 1시간 인터뷰를 약속했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1시간30분을 넘겼다. 현 수석부의장은 이날 점심 약속에 늦었다. 박 대통령과의 인연부터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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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 장학생에다 상청회 회장을 역임했다. 박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데.

▶상청회 회장은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대학생 장학생으로는 1기였다.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인 1977년인데, 자연스럽게 (내가)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당시 서울지검이 서소문에 있었는데, 5분 걸어가면 상청회 사무실(현 경향신문 건물)이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회장을 했고 세 차례 연임했다.

-그럼 박 대통령과 처음 대면하고 직접 인연이 시작된 것은 언제인가.

▶박 대통령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오고 나서 내가 1997년 상청회 회장을 다시 맡으면서다. 개인적으로 얼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이사장과 장학생 출신 회장과의 관계였다. 그렇게 시작됐다. 상청회 총회가 개최되거나 연말 송년회가 열리면 이사장이 나와서 격려사 하지 않나. 그 정도였다.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했던 보궐선거가 1998년이었다. 그때 조언하고 그러면서 인연이 이어졌다.

(그는 박 대통령이 1998년 정치에 입문할 때 영향을 줬던 인물로 통한다. 2007년 대선 박근혜 캠프의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이른바 `친박`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이른바 7인회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7인회는 현 수석부의장을 비롯해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김용갑 전 의원 등으로 박 당선인의 오랜 자문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 수석부의장은 "가끔 모여 식사하고 안부나 챙기는 사이지, 무슨 조언을 하거나 그러는 모임이 아니다"고 강조해 더 이상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로 시쳇말로 `잘나갔는데` 왜 정계에 입문했는지(그는 1981년 11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제주에서 당선됐다).

▶어음위조단 사기사건 처리로 훈장도 타고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1980년 말 여당인 민정당과 제1야당인 민한당의 제주도 조직책이 결정됐다. 그러니까 지역에서 `왜 너는 가만있느냐, 나와라` 하는 압력이 컸다. 고교 시절 학생회장을 하는 등 학창 시절 줄곧 간부를 했다. 학교 다닐 때 회장을 했던 것이 선출직과 연계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했다.

다음해 1월 초부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서울중앙지검의 이한동 당시 형사1부장이 포천연천가평 선거구에서 민정당 후보로 나간다며 방마다 인사를 다니더라. 그래서 나도 결심했다. 그해 2월 4일자로 사표 내고 나가서 무소속으로 선거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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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반대는 없었나. 향후 자식 중에 정치인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지(현 수석부의장의 아들과 막내딸, 사위 두 명 모두 법조인 또는 법학자고, 장인 역시 법학자였다).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당초 검사로 정년을 맞이한다는 생각이었다. 정년퇴직을 해도 살아 있는 한 법조인의 종착지인 변호사를 할 텐데, 40대 초반부터 변호사를 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사표를 냈다. 선거를 치러서 도민들이 국회의원으로 봉사하라고 허락하면 그렇게 하고, 아니면 변호사로 개업하려고 했다.

자식 중에 본인이 (정치인의 길을) 선택한다면 모르지만 권할 생각은 없다. 지금 자식들이 다 내가 정치하는 데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 우리 애들은 권해도 하겠다는 아이가 없을 것 같다. 아버지가 정치인이라는 점에 평소 부담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민주평통 쪽으로 돌렸다. 최근 그는 국내외 2만명 남짓으로 구성된 민주평통의 자문위원회 구성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조직 운영에 들어갔다.)

-20여 년 전에 사무총장을 하고 수석부의장으로 다시 온 최초의 인물이다(그는 1990~1992년 사무총장을 했다).

▶명칭이나 기본 골격은 크게 바뀐 게 없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통일과 관련된 여건이 많이 바뀌었다. 자문회의 규모도 많이 커졌다. 당시 자문위원은 9800명이었고, 사무처 직원이 108명이었다. 지금은 자문위원은 2만명으로 배로 늘었지만 사무처 직원은 68명으로 줄었다. 1급도 없고 고위공무원단 3명에 서기관, 사무관 체제니까 그전처럼 일을 하면 업무 부담이 많이 늘 수밖에 없게 됐다.

-얼마 전 제16기 자문위원 구성을 끝냈다. 인적 구성에서 역점을 둔 점은.

▶한마디로 국민통합이다. 지방의회 의원, 각 자자체 추천을 받은 지역 대표와 직능 대표, 각 정당 국회의원들로부터 추천받은 인사, 통일에 열정을 가진 전문가 등이다. 이번에는 진보정당 추천 인사도 많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에서 각각 10명, 12명 추천을 받았다. 통진당에서 유선희, 이정희(이정희 전 대표와 동명이인) 위원 등 2명이 참여했다. 여성 비율을 높이고 여성 간부들을 더 늘리려고 노력했다. 17개 시도 부의장 중에서도 4명을 여성으로 했고, 여성부의장 제도를 신설했다. 차세대 통일 주도 세력으로 2030세대 비율을 높였다. 1000명의 2030세대를 인터넷을 활용해 선정했다. 동시에 해외 자문위원을 보강했다. 720만 해외 동포들을 네트워크화하기 위해서는 해외 평통을 강화해야 한다. 해외 지역회의를 2개에서 5개로 늘렸다. 해외 협의회도 43개로 늘렸다.

-앞으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을,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남북 분단의 책임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잘못된 역사인식으로는 통일을 할 수 없다.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올바른 역사관과 통일관을 갖도록 돕겠다. 그래야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 북한 주민들로부터 민심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자유민주주의가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분들이 자유시장경제에 적응하는 훈련이 안 돼 있어 어려움이 많다. 정부 차원에서 정착금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분들에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2세 교육 문제다. 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987년 헌법 조문 그의 손을 거쳤다

현경대 수석부의장은 인터뷰 도중 수시로 평통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설명하며 `헌법 4조`를 언급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헌법 4조는 대통령에게 통일정책을 자문하는 `헌법기관`인 평통의 존립 근거다.

그가 헌법을 강조한 데는 배경이 있다. 현 수석부의장은 1980년대 후반 국회 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 위원장과 개헌특위 간사를 맡아 민주화 열풍 속에서 이뤄졌던 9차 개헌의 실무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의 사회ㆍ정치적 지형을 만든 `1987년 체제` 주역 중 한 사람인 셈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개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평소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밝혔다. 그는 잊을 만하면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개헌 논의는 결국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현 수석부의장은 9차 개헌 당시의 분위기를 `혁명적 상황`으로 회고했다. 그는 "당시 민정당은 대통령 6년 단임에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같이 뽑아서 총선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되도록 하는 안을 내놨지만 야당이 대통령 4년 중임을 주장해 협상 과정에서 5년 단임으로 정리됐다"고 술회했다.

현 수석부의장은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논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는 "대통령 중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중임을 못할까봐 당선되는 날부터 4년 뒤 대선을 이기기 위한 것에만 전력투구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인터뷰 가운데 자신이 직접 조문 하나하나를 가다듬고 매만진 1987년 헌법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1987년 헌법은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으로 탄생한 유일한 헌법이고 이 헌법으로 대통령을 여섯 명이나 뽑았다"고 강조했다.

■ 현경대 수석부의장은…

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별명은 `현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의 작은 키와 뛰어난 추진력을 닮았다고 해서 제주도민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현 수석부의장은 1947년 제주 4ㆍ3항쟁의 혼란 속에서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낸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일찍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고아가 돼 이모집에서 이종사촌들과 함께 지낸 그는 스스로를 `제주의 아들`이라 부르곤 한다. 지역사회는 일찍부터 총명하고 리더십 강한 소년 현경대를 주목했다. 지금도 제주에서는 `제주시내 깡패들도 오현고 학생회장 현경대는 보호해줬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에게는 언제나 `제주 대표`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그를 법조인으로 이끈 것은 김치선 전 서울대 법대 학장(숭실대 총장 역임)이다. 서울대 법대 입학 후 김 박사는 평소 그를 아들처럼 대했고 사위로 맞아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장인과 사위로 인연을 맺었다. 11대 때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한 후 민정당에 입당했고, 이후 집권당인 민자당 원내총무를 맡기도 했다.

△1939년 제주 출생 △오현고ㆍ서울대 법대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11ㆍ12ㆍ14ㆍ15ㆍ16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평화문제연구소 이사장 △한나라당 상임고문 △김유비장학회 이사장 △법무법인 우리 대표변호사 △밝은사회실천전국연합 중앙회장

[이상훈 기자 / 김성훈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