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표 시간여행 ②] 박정희 서독방문- 광부 간호사들과 애국가 통곡
박정희, 울고 또 울다! 그리고 이를 악물다!
이례적 국빈 환영, 서독 대통령-총리-국회의장이 모두 공항에 나와
- 최종편집 2013.01.17 15:14:3
[이현표 역사 앨범] 사진으로 보는 반세기전 시간 여행 ②
[머리말]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국민의 세금이 상당히 수반되는 최고의 외교행위이자, 고도의 정치행위다. 따라서 대통령은 해외순방 시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하며, 반드시 순방후에 국민에게 그 성과를 보고해야할 책무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오늘까지 해외순방의 이런 외교적·정치적인 중요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책무를 가장 성실히 수행한 국가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 통일)이다. 박 대통령은 19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부터 1968년 9월 호주·뉴질랜드 방문까지 7차례의 공식 해외순방 내용을 모두 최소의 경비를 들여 책자로 제작토록 했다. 그 결과 6차례는 국문으로 1000부씩 제작됐으며, 그중 2차례는 영문으로도 500부씩 제작됐다. 그리고 1차례는 영문으로만 500부 제작됐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된 이 간행물을 언론사, 여야 지도자, 공공도서관 등 주요 기관에 배포하여 역사의 기록으로 남도록 했다.
한편 공식 정부간행물이외에 박 대통령은 순방기록을 시판용으로 발간하도록 허가했는데, 이는 국민에게 순방성과를 간접적으로 보고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자료지원을 받은 동아출판사는 정부간행물보다 몇 개월 후에 내용과 사진이 풍부한 책을 4차례 발간했다. (박 대통령 해외순방 책자 총 13권 목록: 최종회 참조)
이를 감안해 보면,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봉사하고 소통하려는 점에서 소위 선진국의 국가원수들보다도 더 민주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이런 유산이 뉴미디어 시대에 맞게 변용되어 박근혜 정부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사진 중심으로 반세기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현장 시리즈-2>
눈물, 감동...
미래의 초석 다진 독일 국빈방문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우리 국가원수의 수많은 해외순방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례는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 통일)의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이하 ‘독일’로 표기 통일) 국빈방문이 아닐까 한다.
왜 그럴까?
우선 편지봉투 한 장을 소개한다.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취임식 사진, 대통령 취임사 등 상징적인 자료들이 있지만, 12월 17일 발행된 제5대 대통령 취임우표 다섯 장이 봉투의 앞뒷면에 붙고 12월 18일자 군산우체국 기념소인이 찍혀 미국으로 발송된 이 실체(실제로 사용된) 봉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로 이때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서 윤보선 후보를 큰 표 차로 이겨서 당선될 수 있었다.
이 편지가 발송된 지 3일 후인 1963년 12월 21일, 우리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준 광부 247명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한민국은 광복이후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극한적인 남북대치 상황에 처해있어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를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이 취임하자 바야흐로 지역과 세대와 빈부의 격차를 넘어 국가재건이라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한 야심찬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다.
반면에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폐허와 분단의 아픔을 딛고 20년이 채 안 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낸 자유세계의 모범국가가 되었으며, 미국 다음으로 부자나라였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독일은 부러운 나라였고, 어떻게든 독일과 손을 잡고 싶었다.
마침 그때 독일과 손을 잡고 싶은 박 대통령과 우리 국민의 희망을 대변해준 노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바로 비틀즈의 ‘그대 손을 잡고 싶어(I want to hold your hand)’라는 역사적인 팝송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비틀즈의 ‘그대 손을 잡고 싶어’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 http://www.youtube.com/watch?v=ipADNlW7yBM
“그대에게 하고픈 말이 있어.
자기도 이해할 거야.
내가 무언가 얘기할 때,
난 그대 손을 잡고 싶어”
이런 가사가 중심이 되는 2분 24초의 길지 않은 분량의 노래에 ‘그대 손을 잡고 싶어’라는 구절이 11차례나 등장한다.
한국에서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이틀 뒤인 1963년 10월 17일 영국 런던의 EMI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이 곡은 1964년 2월 1일 미국 빌보드 핫 100의 1위를 차지하고 무려 7주간 고수했다.
이후 비틀즈는 1964년에만 6곡을 빌보드 1위에 랭크시켰고, 1970년 해체될 때까지 20곡을 1위에 올려놓는 팝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록을 세웠다.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지만, 분단국이라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독일도 ‘그대 손을 잡고 싶어’의 심정으로 한국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은 1964년 박 대통령에게 국빈방문해 주도록 초청했고,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을 최고의 예우로 맞았다.
이후 독일은 우리 경제발전의 믿음직한 후원자가 됐고, 독일의 발전을 몸소 체험한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을 위해 독일을 벤치마킹했다.
당시 국가홍보를 총괄하던 공보부는 박 대통령이 독일 국민방문을 마친 후 보름만인 1964년 12월 30일, 역사적인 방문 성과를 사진과 함께 상세히 담은 책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을 발간했다.
세로 19.7cm x 가로 22.3cm의 크기에 189쪽 분량의 이 책은 한정판으로 1000부만 발간됐다.
편집과 인쇄 기술이 발달한 요즘 보더라도 결코 손색이 없는 책자를 단숨에 제작한 것을 보면, 당시 박 대통령과 대한민국 홍보공무원들의 놀라운 근무태도를 잘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말미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쓴 ‘방독소감’이란 귀중한 글이 실려 있다.
한편, 독일 방문 4개월 후인 1965년 4월 20일, 동아출판사도 정부의 자료지원을 받아 <붕정칠만리>라는 시판용 책을 출판했다. 세로 27cm x 가로 19.7cm의 크기에 200쪽 분량의 이 책에는 육영수 여사가 직접 쓴 ‘방독소감’이란 감동적인 글도 들어있다.
위 두 책자의 글 내용과 사진을 중심으로 반세기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1) 독일 향발
1964년 12월 6일, 서울거리는 태극기, 독일기, 청와대 깃발 등 3색 기로 장식되었고, 수많은 시민이 연도에서 태극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리히 뤼브케(Heinrich Luebke, 1894~1972)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독일을 국빈방문하는 박 대통령 내외를 환송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오전 청와대를 출발한 박 대통령은 우선 자신이 기증한 기금에 의해서 건립을 보게 된 세종로의 예총회관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어 공항으로 향한 박 대통령은 오후 1시40분, 독일 측이 제공한 민간항공기 루프트한자 649편으로 독일 방문길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1964년 12월 7일(독일시간) 오전 9시 40분, 당시 독일의 수도 본(Bonn)에 도착했다.
무려 28시간을 비행한 것이다.
쾰른-본 공항에서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1897~1977: 제2차 세계대전 후 15년간 경제장관을 지내면서 독일의 경제복구를 주도했으며, 1963~66년간 총리 재임) 총리, 게르슈텐마이어(Eugen Gerstenmaier) 하원의장을 비롯한 독일 각료 및 의회지도자, 독일주재 각국 외교관, 그리고 100여명의 교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독일 대통령, 총리, 하원의장, 주요각료들이 공항에 나와 환영한 것은 외교관례상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어 박 대통령 내외는 뤼브케 대통령 내외의 안내로 쾨니히스호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2) 본에서의 3박 4일 (12.7~12.10)
뤼브케 대통령은 12월 7일 저녁 박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뤼브케 대통령은 한국의 학생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독일의 학생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함부르크에서 영국 군함이 독일 상선에 대해서 불법적인 가해를 입혀 전국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적은 있지만, 독일 정치 불안을 이유로 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정치란 오랜 경험으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학생들이 정치일선에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박 대통령은 12월 8일 오전 10시 독일 대통령궁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과 한·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정상회담 후, 박 대통령은 본 시의 공원인 호프 가르텐으로 이동하여 무명용사묘비에 헌화한 다음 본 시청을 방문했다. 이어 시청의 고전 양식의 계단에 올라 수많은 환영인파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한 후 골든 북(귀빈 방명록)에 서명했다.
박 대통령이 한글로 서명하자, 빌헬름 다니엘스 시장은 한국인이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세계의 문자 중에서 한글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다니엘스 시장으로부터 베토벤 교향곡 레코드 세트를 선물 받은 박 대통령은 본에서 30km 거리의 쾰른(Koeln) 시청을 방문하고, 쾰른 대성당도 시찰했다.
12월 8일 저녁,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베푼 국빈만찬에 이어, 베토벤할레(Beethovenhalle: 베토벤이 태어난 도시 본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 환영음악회>에 참석했다.
환영음악회는 양국 국가와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8번 <프라하(The Prague)>가 연주되었는데, 육영수 여사는 ‘방독소감’에 이날의 음악회에서 연주된 <프라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풍부한 악상이 한없이 맑고 깨끗한 흐름을 이루다가 그 위를 화려한 꽃송이와 그 향기가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 생각도 떠올랐다.”
<박정희 대통령 환영음악회>에서 연주되었던 <프라하>는 녹화된 것이 없지만, 당시 모차르트 교향곡의 명지휘자였던 칼 뵘(Karl Boehm, 1894~1981)이 지휘하고빈 필하모니가 연주하는 <프라하> 제1악장의 일부(3분 36초)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 http://www.youtube.com/watch?v=T0e3348RpQk
12월 9일 오전, 박 대통령은 베토벤 할레에서 한국 유학생 및 교포와 조찬을 함께 하고, 독일 연방의회를 방문하여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과 의원들이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오후에는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총리가 베푼 오찬회에 참석했다.
저녁에는 숙소인 쾨니히스호프 호텔에서 뤼브케 대통령 내외를 초청하여 만찬회를 개최했으며, 150명의 양국 귀빈들이 참석했다.
12월 10일 박 대통령은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과 조찬을 함께 한 후 본에서의 중요한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 광부들이 일하고 있는 루르 지방의 함보른(Hamborn)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40분, 박 대통령 내외가 탄 차가 함보른 탄광에 도착하자,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졌고 양복차림의 광부들과 한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강당에 들어선 박 대통령은 광부와 간호사들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육영수 여사도 안부를 물으며 뒤따르다 간호사가 울먹이자 참았던 눈물을 보였고, 행사장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번져나갔다.
이윽고 박 대통령 내외가 단상에 오르고, 광부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 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애국가 합창은 후렴에 이르러 흐느낌과 통곡으로 변했다.
이윽고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연설을 시작했다.
“만리타향에서 상봉하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은 줄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땅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모국의 긍지와 조국의 영예를 빛내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고, 또 많이 올 수 있는 길을 닦아주기를 당부합니다...”
박 대통령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고, 강당은 눈물바다가 돼 간신히 즉흥 연설을 끝낼 수 있었다.
이어 박 대통령 내외는 광부들의 숙소를 살펴본 다음, 무거운 마음으로 광산을 떠날 때 차안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박 대통령은 함보른 인근 지역에 위치한 데마그 제철공장을 시찰하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가 초청한 오찬에 참석한 다음, 베를린으로 향했다.
3) 베를린에서의 2박 3일 (12.10~12.12)
12월 10일 오후 5시 45분 베를린 공항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1969~1974년 기간 독일 총리를 역임했으며, 동서독 화해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베를린 시장의 영접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베를린 경찰의장대를 사열한 후, 브란트 시장의 환영사에 이어, “베를린과 판문점의 비극이 끝날 날이 가까워졌다. 비극을 종결시켜야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영구화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끝까지 뭉쳐서 전진해야한다”는 요지의 답사를 했다.
박 대통령 일행은 경찰 호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숙소인 켐핀스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베를린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에서 골든 북에 서명 한 후, 시청 환영행사에서 박 대통령은 베를린 시민에게 아래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베를린은 높은 문화와 번창을 이룩한 도시이며, 모든 자유세계 국가와 국민들의 절실한 자유, 평화에의 염원을 응집하는 자유정신의 성지입니다.
(중략)
베를린은 뜻있는 사연으로 우리 한국국민이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이 낳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우승하여 이른바 ‘국적없는 승리’를 거둔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국 국민은 그 어떤 고도의 파괴의 위력을 가진 무기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함을 실증시켰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양심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입니다.”
12월 10일 밤, 브란트 시장은 박 대통령을 위해 만찬회를 마련했다.
이는 1963년 6월 케네디 대통령의 베를린 방문 때 베푼 이후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12월 11일, 독일 실업인(實業人)들과 조찬을 함께하면서 한·독 간 민간 베이스의 경제협력방안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박 대통령 내외는 12월 11일 오전 브란덴부르크 문과 베를린 장벽을 시찰한 다음, 1962년 8월 자유를 찾아 동독을 탈출하다가 공산경비원에게 사살당한 18세의 건축노동자가 살해된 장소에 세워진 나무십자가 기념비에 흰색과 빨강색 카네이션 꽃다발을 헌화하고 명복을 빌었다.
베를린 장벽을 시찰한 후 박 대통령은 이날 정오 베를린 공과대학에 도착, 파울 힐비히(Paul Hilbig) 총장의 안내로 연설장소인 강당으로 이동하여, 총장, 대학교수, 학생 등 1000여명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이날 연설의 핵심은 <번영의 균형화 운동>과 <자유 신장의 촉진>의 제창에 있었다.
“한 나라의 부강(富强)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는, 또한 한 나라의 성장이 반드시 다른 나라의 자선적인 원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협력관계를 우리는 발전시켜야 합니다.
한 지역, 한 국가의 번영이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번영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든 지역의 <번영의 균형화>, 모든 지역에 있어서 <자유 신장의 촉진>, 바로 이것이야말로 온 인류가 한결같이 추구해야할 높은 이상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숭고한 이상은 번영의 독점, 혼자만의 자유의 구가를 배척합니다.”
강연 후, 박 대통령은 1847년 베르너 폰 지멘스에 의해서 설립된 지멘스(Siemens)사 베를린 공장을 시찰한 후 임직원과 오찬을 한 뒤, A.E.G. 전기공장을 시찰했다.
12월 12일 오후 박 대통령 일행은 베를린을 떠나 독일 방문의 마지막 기착지인 뮌헨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갔으며, 브란트 시장과 시 고위간부들이 박 대통령을 환송했다.
4) 뮌헨에서의 2박 3일 (12.12~12.14)
박 대통령 일행이 바이에른 주의 수도이며 문화도시인 뮌헨 공항에 도착한 것은 12월 12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공항에서 알폰스 고펠(Alfons Goppel, 1905~1991, 바이에른 주지사를 1962~1978년까지 16년간 역임한 인물) 주지사, 회의를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모인 우리나라 공관장, 그리고 한국 교포와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날 3시 20분부터 숙소인 휘어야레스짜이텐 호텔에서 2시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 공관장회의를 주재했다.
회의는 이동원 외무부장관 사회로 진행됐으며, 이형근 주영대사, 백선엽 주불대사 등 13명의 공관장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경제외교의 강화 및 우리 수출시장 확보, 중립국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외교의 전개 등을 지시했으며, 공관장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의 정세와 관련 주재국의 정치·경제적 정세를 보고했다.
이어 유럽과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한 경제외교 강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대상 외교강화 방안, 공관 운영의 문제점들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박 대통령 내외는 12월 13일 아침 숙소인 호텔에서 한국 유학생 및 교포 80명과 조찬을 함께 했으며, 이어 님펜부르크 성 등 유적지를 시찰했다. 저녁 6시에는 알폰스 고펠 주지사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12월 13일 저녁 7시, 박 대통령 내외는 쿠빌리에 극장(Cuvilliés Theatre)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감상했다. 알폰스 고펠 주지사는 공연에 앞서 박 대통령에게 망원경을, 육 여사에게는 오페라글라스를 선물했다.
육영수 여사는 <붕정칠만리>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독일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보게 된 뮌헨의 오페라 극장은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그 옛날 왕족만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 내부에 있는 아름다운 조각품들을 시민들이 모두 가져다 정성껏 보관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그 자리에 어김없이 가져다 놓음으로써 옛날의 면모를 그대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뮌헨 시민들의 아름다운 정성이 깃들어진 곳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얼마나 벅차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또한 육 여사는 공연을 감상하고 느낀 점도 책에 적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가 백작의 머슴인 케루비노를 상대로 부르는 아리아 ‘이제는 못 날으리’와 제2막의 케루비노가 백작 부인을 연모하며 부르는 ‘그대는 아는가 사랑의 괴로움을’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웠는지 내게 또 한 번 우리 한국의 수많은 음악팬들을 생각나게 했다.고국에 돌아가면 우리 꼬마에게 <피가로의 결혼>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또한 피가로와 케루비노가 얼마나 멋진 성대(聲帶)로 관중을 매혹시켰으며, 또 영특한 여자 수잔나는 얼마나 요염한 음량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지를 들려주리라고 마음먹었다.”
<피가로의 결혼> 공연 관람 후, 박 대통령은 출연자들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 내외가 이날 관람한 <피가로의 결혼> 공연 중에서 육영수 여사를 감동시킨 두 곡을 유튜브를 통해서 즐겨보기로 하자.
o ‘이제는 못 날으리(Non piu andrai)’는 1968년 녹음된 헤르만 프라이(Hermann Prey, 1929~1998)의 노래를 추천한다.
☞ http://www.youtube.com/watch?v=g3BthgYwbIUo ‘그대는 아는가 사랑의 괴로움을(Voi che sapete)’은 1952년에 녹음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1915~2006)의 노래를 추천한다.
☞ http://www.youtube.com/watch?v=NgbVDmrRSug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떠나기 직전인 12월 14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6시), 국빈방문을 총결산하는 한·독 공동성명이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됐으며, 대통령 일행은 출발할 때와 같은 경로를 거쳐 12월 15일 저녁 7시 5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독일이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한·독 공동성명의 핵심내용은 아래 세 가지다.
1)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는 1965년부터 시작되는 3개년 협력계획에 관한 한국측의 제안에 깊은 이해를 표명하고, 한국의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지원을 계속한다는 독일정부의 결의를 재확인했다.
2) 한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독일정부는 1964년도 대외원조예산에서 재정 및 기술 원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자원의 잠재력을 더 조사하기 위해 독일기술전문가단을 한국에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3) 양국정부는 상호관심사를 토의하기 위해 최소한 년 1회의 회담을 가지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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