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활 칼럼니스트, ljn1124 |
등록일: 2012-06-03오후 7:48:57 |
대한민국 정치판. 패거리 정치, 돈정치를 떠나서는 감히 상상을 못하는 정치판이다. 박근혜 후보 측의 민심은 뜨거운 민초들의 물결이었다. 그런 서포터즈들은 이 나라 정치판도를 완전 뒤바꿔놓았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실상 온갖 불법, 탈법으로 대통령 후보직을 거머쥔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불공정 경선 자체도 승복한 박근혜 전 대표는 또다시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5년을 기다리게 됐다. 다시 2012년 새누리당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 진영에서는 4년전의 실패의 요인을 찾아야 된다. 필자가 직접 겪은 2007년 경선을 회고해 보면 대선 전쟁에서 실패한 첫 번 째 요인은 박근혜 캠프의 사람들이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당이 변신하기 위해 홍준표 전 의원이 주도해 당 경선을 포함한 혁신안을 내놓았다. 그 혁신안도 구렁텅이에 빠진 당을 살린 박근혜 전 대표에게는 분명히 불리한 요소들이 많았지만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이 수권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으로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등장하면서 한나라당은 갑자기 대세가 이명박 후보로 급격히 쏠렸고 혁신안은 단 제정한 뒤 단 한차례도 시행해 보지 못하고 친이계의 무차별 공세에 휘말리면서 누더기가 되고 변질되어갔다. 오죽했으면 박 전 대표가 “2,000표를 그냥 줄테니까 한번 정한 법을 지키자”며 극적 타협을 모색했지만 권력의 맛에 굶주린 친이계들은 힘으로 밀어부쳐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한나라당을 마구 유린했다. 당시 이재오는 친이계의 좌장이었고 김무성은 친박의 좌장을 맡았다. 이재오는 백전노장답게 전투에 능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싸움꾼이었다. 그러나 김무성은 피비린나는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선비였다. 최선과 최고의 방어는 공격인데 창과 방패의 싸움에서 창으로 수없이 찌르면 방패는 결국 뚫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재오는 직접 자파의원들을 규합해 BBK, 도곡동땅 문제에 대해 국민의 눈과 귀를 교란시켰고 경선룰도 불리하다싶으면 자기 입맛에 맞게 변경시켜 나갔다. 친박쪽에서는 마치 귀신이 홀리기라도 한 듯 이상하고 허무할 만큼 대책없이 친이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하고 말았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올라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친박 지지단체에서 뜻있는 동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면서 250명이 모여 현 비상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한나라당 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그때 박근혜 캠프에서 긴급전화가 들어와 ‘박 전 대표가 단식농성, 시위같은 것은 안 좋아하니까 모두 철수하라고 했다’며 압력을 넣었다. 그때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필자는 그 전화를 받고 “우리가 언제 박 전 대표 지시받고 여기 온 줄 아느냐? 울분에 싸여있던 민초들이 잘못된 경선룰을 바로잡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이다. 들어올 때는 필자의 얘기 듣고 왔지만 나갈 때는 필자얘기를 들을 사람이 없다. 앞으로 오라가라 하지마라” 하며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 |
단식투쟁을 병행해서 농성을 하던 3일째 되던 날 박 전 대표가 직접 아침 일찍 시위현장에 홀로 나타나 “단식은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으니 제발 여기서 그만하라”며 농성자들을 달래주었고 그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일일이 전화격려를 해주었다.
민 초 여동활 |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몽준·김문수·이재오 경선 보이콧 시사,,,,기사에 달린댓글및 찬,반, (0) | 2012.06.08 |
---|---|
지난 한나라당 경선을 회고하며 꼭 이글를 쓰야했다 ,,,,,,,,여동활 (0) | 2012.06.03 |
임태희는 대통령의 눈 귀 어둡게 한 장본인" ,,,백동일 국가수호정책연구소 대표 (0) | 2012.05.16 |
부산 미 문화원 방화주범 사형수 김현장선생이 통진당 비례 강종헌에게보내는 편지 (0) | 2012.05.14 |
[스크랩] 그때 그시절 그추억 = 우리도 이럴 때가 있었다 (0) | 2012.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