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익환 북한가보니 못살아 ,,

여동활 2011. 9. 24. 22:13

◇ 신간 ´민주주의는 국경이 없다´ 펴낸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90년대 들어서 수용소 현실이 알려지면서 북한의 악랄함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민노당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오히려 초심에 대한 배반이다.”

최근 신간 ‘민주주의는 국경이 없다’를 펴낸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가 종북세력에 대해 다시 한 번 비판의 메시지를 날렸다. 서울대 물리학과 86학번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간부로 활동하는 등 민족해방(NL) 학생운동의 핵심이었던 그를 19일 만났다.

하 대표는 이번 책을 통해 크게 80년대 친북 열풍이 불었던 이유, 민노당을 포함한 386세대의 부채의식, 우리 사회의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파했다.

우선 하 대표는 “현재 민노당의 대북 노선을 보면 과거 주사파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를 발견한다”며 “이제 민노당과 같은 종북파는 일제 강점기 친일파보다 더 처참한 역사적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7년여를 친일한 결과 공적은 모두 없어지고 전 일생이 친일로 낙인찍힌 춘원 이광수를 보듯 우리 역사는 매정하다. 친북파는 작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말고 역사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하 대표는 “과거 386운동권이 친북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김정일이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곳을 6개나 운영하고 이곳에 20만명 정도가 수감돼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변절이 맞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인권을 위한 길이야말로 역사적 진보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70년대 민주화 열정이 80년대 광주로 한방에 끝장”

“남한의 좌파는 자생적 빨갱이들이다.” 하 대표는 80년대 친북 열풍이 불었던 배경으로 광주항쟁을 지목했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물결이 일었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주의도 종식됐다. 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우리 사회에 친북 열풍은 통일운동과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강력해졌다는 것.

하 대표는 “실제로 80년대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신좌익이 탄생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은 전두환 독재를 비난하는 북한과 동지 의식으로 연대했다. 당시 조선노동당 대남사업부 소속으로 대남 선전방송과 남파간첩작전, 남측조직관리 전담부서였던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은 수시로 주사파 학생들과 접선할 간첩을 남파했다.

그는 책에서 ‘내가 1학년 때는 학생 운동권 내부에 주체사상에 대한 흐름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것이 3학년 때부터 주체사상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수령관이었다. 수령관이란 최고지도자인 수령을 진심으로 모시려는 자세와 입장이다. 즉 김일성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관점이다’라고 적고 있다.

남한에서 주사파의 활약으로 북한에 대한 동경이 커지면서 북한으로 ‘밀입국’하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전대협과 그 뒤를 이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이른바 ‘방북투쟁’이라는 이름 아래 1호 임수경 씨 이후에도 남한 대학생 10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1991년 박성희·성용승 씨가 북으로 넘어간 뒤 별 성과가 없자 연이어 최정남(94년), 정민주(94년), 이혜정(95년), 류세홍(96년), 도종화(96년), 김대원(98년), 황선(98년), 황혜로(99년) 등 모두 10명의 대학생이 차례로 북파됐다. 이 중 정민주, 이혜정 씨는 판문점으로 귀환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베를린을 경유해 길게는 7년여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직접 북한에 가서 비참한 실상을 본 이들 모두는 ‘반성의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북한추종주의 통일운동의 문제점과 한총련의 해체를 주장했다. 그러자 북한은 이들에게 안기부 프락치라는 누명을 씌워 비난했다.

하 대표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가장 큰 착각이 김일성·정일 부자를 용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보면 민주화의 공이 있으나 적어도 김일성 부자는 전두환 독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하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민노당에 대해서도 “민노당이 처음부터 종북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안에는 권력을 잡으려는 종북 세력이 포함된 것이 사실”이라면서 “이들이 북한 문제에 눈감거나 두둔하는 이유는 바로 입장을 바꾸는 순간 기득권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전대협 조통위는 북한쪽과 공동사업도 많이 기획"

한때 386운동권으로부터 ‘변절자’라고 비난받았던 하 대표가 민주화운동의 대상을 ‘남’에서 ‘북’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운동권의 큰 지도자였던 문익환 목사의 죽음이라고 했다.

386세대의 정신적인 수장으로 ‘통일맞이’라는 단체를 이끌던 문 목사가 실제로 북한에 다녀온 뒤 내뱉은 소감은 “북한! 우리보다 못 살어! 사람들이 김일성은 존경하는 것 같기는 하던데, 주사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야!”였다고 한다.

이후 문 목사는 통일맞이가 추구하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한과 남한의 활동가들이 함께 출범시킨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해체하고 ‘민족회의’를 출범시키려 했지만, 이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안기부 프락치로 몰리게 된다.

범민련 북측 본부 백인준 의장 명의로 날라온 팩스에는 ‘문익환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다’라고 돼 있었다. 문 목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범민련을 지켜내라는 지침이다. 더 큰 문제는 북에서 온 그 팩스를 주사파들이 전국에 전파했다는 사실이다.

하 대표는 “나는 그 팩스를 공개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주사파들은 팩스의 전문을 복사해서 전국에 돌려버렸고, 동시에 전국적으로 문 목사를 프락치로 비판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결국 문 목사는 통일운동 진영 내부에서 범민련파와 범민련 해체파 사이에 극단적인 대립이 있던 프락치 파동 직후 돌아가셨다. 주사파가 주동이 돼 주변에서 모두 프락치라고 몰아붙이니 홧병이 생기신 것”이라고 하 대표는 설명했다.

하 대표는 “문 목사 죽음 외에도 1991년 5월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되면서 학생데모가 극렬해지고,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거의 광적으로 분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증언한 주사파는 다음과 같다. ‘1991년 당시 전대협은 학생운동사상 최고의 대중 조직이었다. 전대협 출범식에는 무려 10만명의 대학생들이 모이기도 했다. 학생운동은 완전히 NL주사파가 석권하다시피 했다. 조국통일위원회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주사파 학생들은 북한의 대남방송을 녹취해서 거의 공개적으로 나눠주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회의할 때 수령님 찬양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미국대사관 앞 반미 시위를 기획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연방제 통일하자!’ 같은 구호를 함께 외쳤다.’

“탈북자 만나며 대학시절 초심 다시 타올랐다”

그러던 중 1992년 8월 강철환 씨의 탈북으로 남한에서 북한 수용소의 진상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당시 강 씨가 “안기부 수사관이 내가 말하는 북한 수용소에 대해 안 믿더라”고 말할 정도였다니 정보당국의 정보력도 알만했다.

“당시만 해도 강 씨 외 두어 명 정도가 북한 수용소 얘기를 했지만 그 정도로 믿을 수 없었던 것이 남한 사회의 분위기였다. 이후 96년, 97년을 거치면서 탈북자가 늘어나고 수용소에 대한 증언자도 많아지자 비로소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하 대표의 설명이다.

하 대표가 친북세력과 관계를 끊고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들자 지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과거 동지라 부르던 지인들과 논쟁도 무수히 벌였다. 그는 “지금도 그들 중 일부는 나를 비난하고 있고, 그만큼 잃은 것이 너무 많다”면서도 “탈북자들을 만나 얘기를 들으면서 학생운동 시절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보며 솟구쳤던 분노 그 이상을 느꼈다”고 했다.

“‘김정일이야말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마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대학생 시절의 초심이 다시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는 하 대표는 당시가 바로 북한의 변화를 위해 적어도 향후 10년 동안은 인생을 바쳐 뭔가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하 대표는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물론 당시 미국의 압력 등 국제정세의 흐름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비슷한 시기 미얀마 총선에서 승리한 아웅산 수지 여사가 7년간 가택연금된 사실과 비교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이승만 정부시절 지방선거를 ‘면’ 단위까지 실시할 정도로 민주주의의 뿌리가 내려졌고, 박정희 정부는 우리 사회에 중산층·지식인이 많이 나오도록 한 공로가 분명 있어 80년대 민주운동가조차도 그들에게 일말의 빚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 대표는 특히 “박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6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좌파 열풍이 불던 때였고, 안보리를 제외한 유엔의 다른 기관들까지 좌파 성향이 강할 때였다”면서 “당시 유엔에서 제3세계를 지원하는 개발프로그램으로 제시한 ‘자립경제모델’대신 과감하게 ‘수출주도전략’을 선택해 한국의 경제 체제를 바꾼 업적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근대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충분한 데도 이런 역사를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것 역시 친북 때문이다. 과거 운동권이던 인물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우리 사회에 좌우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하 대표는 “민주주의와 종북주의를 구분하지 않는 한, 386세대는 역사적 진보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정말 부채의식을 느껴야 될 사람들은 종북 세력이 아니라 북한 독재정권의 억압과 기아를 못 견디고 탈출한 탈북자들과 북한 민중들, 더불어 이제는 노동귀족이 되어버린 대기업 노동자들이 아니라 저임금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강조했다.

하 대표는 “진정한 진보라면 인권의 가치를 다른 나라 국민에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면서 “탈북자와 외국인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새로운 마이너를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보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말했다.[데일리안 = 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