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교수가 된 광부, ‘파독광부’를 아십니까?

여동활 2011. 8. 4. 10:10

 

교수가 된 광부, ‘파독광부’를 아십니까?

(사)한국파독광부총엽합회 권이종 부회장
서울대 나와도 일자리 없던 시절, 너무도 배고파 ‘너도 나도 광부 지원’
“목욕은 하느냐?” 독일인 첫 물음, 막장 환경 열악 “매 순간 죽음과 싸워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뉴데일리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뉴데일리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12월 18일 박대통령 내외는 광산을 방문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기 위한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을 보자마자 울먹였다. 당시그 자리에 있었던 한 광부는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나라가 못살아 여러분들이 이국땅 지하 수천미터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여러분들의 새까만 얼굴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대통령은 당부했다.
“외교관이란 마음가짐으로 독일국민의 근면성을 배우고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힘을 보태 주십시오. 지금은 못살아도 우리 후손들에겐 부강한 나라를 물려줍시다”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 내외와 광부들 모두 부둥켜 안고 울었다.

고희를 넘긴 한 대학 교수가 46년 전 가슴 아픈 추억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부가 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이른바 ‘파독광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땅의 젊은 이들은 독일인들이 기피하던 광부와 간호사가 되기 위해 10대1이 넘는 경쟁을 치렀다.

그렇게 독일로 건너간 이들은 공식 집계로만 2만1천여명. 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손을 합치면 파독광부와 간호사 가족은 5만여명에 이른다. 

권 교수 처럼 광부와 간호사로 시작해 교수가 된 이들도 20여명이나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파독광부’였음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대우받으며, 묵묵히 지하 갱도를 파내려가야 했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은 과연 무엇일까?
교수가 된 파독광부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파독광부 총연합회 부회장)ⓒ뉴데일리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파독광부 총연합회 부회장)ⓒ뉴데일리

 

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부유함의 바탕에는 기성시대의 땀방울이 있다. 이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상상할 수없을 만큼 가난해고 배고팠던 그 때 우리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꿈과 희망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지를 자라나는 세대들이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경험을 통해 근검과 절약의 가치도 다시금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부로 독일을 간 이유는 무엇인가
1963년 첫 파독당시 한국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수출품이라고 해야 고작 가발과 봉제완구 정도였고, 봄이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다. 서울대를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다. 굶는 것이 제일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행을 선택했다. 독일이라는 선진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있었다.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고 들었다.
광부를 신청한 이들 중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었다. 공무원과 교사들도 있었다. 광부라지만 당시 한국임금의 10배를 넘는 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계약조건은 어땠나?
정해진 근무기간은 3년이었다. 나머지는 그 당시 독일 근로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실정에 비한다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파독광부 시찰 당시 모습 ⓒ뉴데일리
▲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파독광부 시찰 당시 모습 ⓒ뉴데일리

 

일하기가 쉬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처음 갔을 때 독일 사람들이 목욕은 자주 하느냐는 말을 했다. 그만큼 우리를 후진국의 미개인으로 여기는 듯 했다.

말도 다르고 음식도 달랐다. 광부와 간호사는 당시 독일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직업이었다. 모든게 어려웠다.

특히 막장의 환경은 열악했다. 지하 1,000미터를 내려가 작업을 했는데 1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지열이 1도씩 올라갔다. 때문에 막장 내부온도는 35가 넘었다. 너무 덥고 습해 옷을 거의 벗고 일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장화속 양말이 흥건히 젖어, 신고 있던 양말을 짜낸 후 다시 신어야 할 정도였다. 막장에 내려갈 때 6~7리터들이 큰 물통을 가지고 내려가는데 일을 하다보면 물통이 비곤 했다.

광산 일을 끝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모은 돈의 대부분을 송금하다보니 독일에서도 늘 배고픈 생활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매 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일을 했다. 막장이 무너져 내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가스폭발이나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로 평생 장애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죽음이란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석탄가루가 폐에 쌓이는 진폐증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더위도 정말 참기 힘들었다. 

독일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숙소 근처에 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그것을 뜯다 ‘자연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힌 일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청국장과 김치를 정말 좋아했는데 한번은 숙소에서 청국장을 끓여먹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다. 악취가 난다는 이유였다.

광부생활을 그만 둔 후 아헨대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마늘을 먹은 다음날이면 같은 과 동료들이 냄새가 난다며 전부 자리를 피하곤 했다. 
 
광부생활을 그만 둔 후, 독일에 남아 대학을 진학했다
3년이 지나 광부 일을 그만두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짐도 모두 한국에 보낸 뒤였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까지 갔는데 독일에서 나를 보살펴 주던 현지인 수양어머니께서 나를 붙잡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말씀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그대로 보내고 결국 독일에 남기로 했다.
수양어머니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국립 아헨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말해 달라
독일에 남기로 했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다시 체류허가가 필요했다. 내게 공부를 권유했던 현지인 어머니의 소개로 당시 독일에 주둔해 있던 벨기에군 PX에 임시로 일자리를 마련해 겨우 고비를 넘겼다.

어려서부터의 꿈이 초등학교 교사였다. 자연스럽게 사범대학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다른 나라 사람이 독일 국립대학의 사범대에 입학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입학허가를 받는 것이 정말 어려웠는데 사범대학장께서 내 딱한 사정을 듣고 특별히 입학을 허가해 줬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광산에서 일만 한 사람이 어떻게 대학수업을 따라 갔겠는가?

사전을 씹어 먹으면서 공부했어도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따라가기가 정말 힘들었다.
고향이 너무 그리웠다. 배고픔도 고통스러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 걸고 울기도 여러번이었다. 우울증에 자살을 생각해 본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께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해선 안된다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장학금도 알아봐 주시고 일자리도 소개해 주셨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해 나가면서 주말에는 한글학교에서 동포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직업학교 교사도 잠시 했다. 67년 입학해 79년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혼을 독일에서 했다
대학에 입학해보니 한국인 여학생이 있었다. 나와 같은 파독 간호사 출신이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출신 대학생 커플이 결혼을 한다고 현지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 출신으로 교수가 된 이들도 있다던데
나를 포함해 모두 2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안다. 국내에는 15명 정도가 있다. 그러나 광부출신임을 밝히지 않는 이들도 있어 정확한 집계는 아니다. 대부분 자연과학이나 공학계열을 전공했고 인문사회분야를 전공한 이는 내가 유일한 것 같다.

파독광부들의 현재 생활수준은 어떤가?
소재가 확인된 국내 거주 파독광부 중 연합회에 가입한 이들은 채 5백명 안 된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연 1만원인 회비를 납부하기 어려울 만큼 생활이 곤궁하다. 아직도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황식 총리가 취임해 가장 먼저 만난 외부단체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황식 총리께서 취임한 후 총리공관으로 우리를 초대해 만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에 파독광부 간호사 기념관 건립, 공무원 및 학생 등 국민에 대한 강연 및 홍보지원,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예우 등 세 가지 안을 요구했다.

총리와 정치권 일각에서 이 문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파독광부총연합회 정기총회. ⓒ뉴데일리
▲파독광부총연합회 정기총회. ⓒ뉴데일리

 

파독광부총연합회에 대해 말해 달라. 어떤 일을 하는가?
파독광부와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약 2만1천여명에 이른다. 광부는 8,968명, 간호사는 약 1만2천여명이다.

이들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고,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 존재가 돼 가고 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애환이야 말 할 것도 없지만 이 사업이 당시 우리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영향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체계적인 연구가 없다.

자라나는 세대가 모르고 지나쳐쳐 좋을 단순한 옛 추억이 결코 아닌데 소홀이 다뤄지는 측면이 있다.

연합회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자 2008년 10월 결성됐다. 파독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백서를 발간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해 보급 중이다. 각급학교 학생과 군부대 장병, 지역주민들을 위한 강연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내 거주하는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소재를 확인해 정보를 교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 추진 상황은 어떤가?
연합회 차원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예산 마련에 어려움이 크다. 국가에 관련 예산 25억원을 신청해 놓은 상태지만 반영될지 불투명하다.

유명한 체육선수나 연예인을 위해서도 수십억 이상의 예산을 들여 공원이나 기념관 등이 만들어지는 현실을 보면 마음이 더욱 착잡하다.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자기들의 조상들이 왜 먼 타국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47년 전 派獨 광부, 그들을 아십니까

300여명, 처음으로 한자리 모여 회고… "우리들 땀과 눈물 기억해주길"
"온갖 설움 딛고 일한 청춘, 조국 근대화 밑거름 돼…" 기억 더듬다 눈시울 붉혀

"지하 1000m,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지하 막장에서 우리 파독(派獨) 광부들은 목숨을 걸고 탄(炭)을 캤습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독일을 방문하셔서 석탄가루 묻은 우리들의 검은 손을 붙잡고 "건강하게 일 잘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을 때 우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태우(70)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장이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파독광부 최초 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 및 총회"에서 박 전 대통령의 독일 방문 당시의 감회를 얘기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60~70대 참석자 300여명이 눈시울을 붉혔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목소리도 들렸다.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파독광부 최초 파독 47주 년 기념 특별강연 및 총회’가 열렸다. 외화 획득을 통한 경제개발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파독 광부 출신 인사들이 어려웠던 시대를 숙연하게 회고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지금은 머리에 서리가 앉고 주름진 얼굴엔 검버섯도 피었다. 젊은 시절이던 1963년 12월 광부와 간호사로 서독에 갔던 이들이 독일 파견 47주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김 회장은 "수백명이 대규모로 모인 것은 처음"이라며 "당시 못살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G20 정상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선진국이 되기까지는 우리 파독 광부들도 밑거름이 됐다는 자부심에서 모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1960년대 한국은 최빈국 중 하나였다. 당시 정부는 독일에서 상업차관 3000만달러를 빌려와 경제개발을 하려 했지만, 차관을 보증할 수단이 없었다. 결국 독일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수출하고 이들이 버는 봉급을 담보로 차관이 가능했다. 이에 따라 1963년 12월 21일 최초 247명이 독일로 떠난 데 이어 1977년까지 7968명의 광부와 간호사 1만2000여명이 독일로 파견됐다.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에 다니다가 광부가 된 김태우 회장은 "당시 국제사회에선 "전후 한국의 경제 재건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며 "우리 또한 먹고살려면 자원해서 광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파독 광부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현지 광부들이 꺼리는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탄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 탄을 캤고, 사고현장 복구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다.

파독 광부들은 대부분 고졸 이상 고학력자들이었다. 첫 파독 광부 모집 땐 경쟁률이 10대 1이 넘었다. 고학력 광부들은 억척스럽게 일해서 고국으로 송금했고, 틈틈이 못다 한 공부도 했다.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에 따르면 파독 광부 출신 대학교수만 30여명에 이른다.

권이종(70)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이날 "파독 광부 시절을 회고하며"란 글을 읽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독일에 광부로 갔고,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했다"며 "막장에 처음 들어간 날 독일인 광부들로부터 온갖 조롱도 받았다"고 당시의 설움을 토로했다. 그의 얘기를 듣던 다른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눈물을 훔쳤다.

김태우 회장은 "파독 광부들의 땀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불씨가 돼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도록 기념관을 세우는 게 목표"라며 "세계에 흩어진 파독 광부와 그 후손들이 모국을 찾았을 때 쉬어갈 작은 숙박시설도 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메모
ID : 박지성    
2010-12-24    
02:39:40    
제목

광부와 간호사......(47년 전 오늘, 우리는 파독(派獨) 광부가 되었습니다)

아래는오늘 아침(2010.12.21) 조선일보에 실린 "[ESSAY] 47년 전 오늘, 우리는 파독(派獨) 광부가 되었습니다" 란
제목으로 현재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부회장이신 권이종 님의 글을 옮겨 왔습니다.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는데
친구들에게 소개하니 잠시 읽어 보기 바랍니다. 권이종님은 우리고장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에서
1940년에 태어나셔서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공부를 하여 전북대 교수, 교원대 교수 등을 지내셨습니다.
권이종님의 자세한 사항은 신문기사 하단에 있는 「교수가 된 광부」책자 소개글에서 퍼온 글을 참조하십시오.


[ESSAY] 47년 전 오늘, 우리는 파독(派獨) 광부가 되었습니다
권이종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부회장
조선일보 2010.12.21(화) 게재

공사판에서 대학생이 내게 한마디…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업자가 250만명이던 시절 하루 16시간씩 악착같이 일하며
'광부와 간호사'로 결혼식 치른 나는 '교수 광부'가 되었다

매년 찬바람이 부는 겨울, 12월이 되면 아득한 옛일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3년 12월 21일,
그날은 120명의 한국 광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파독광부(派獨鑛夫)!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자원은 물론 수출할 만한 기술력도 없었기에 인력(人力), 사람도 수출했다. 광부뿐이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군인까지.

나는 1940년 오지 중의 오지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또한 춘궁기 보릿고개를 ‘제대로’
겪은 빈농의 자손이다.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하루 두 끼 밥 먹기가 힘들어
칡뿌리·소나무 껍질·진달래꽃을 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북 전주로 가서 중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빌리려 동네 부잣집 앞마당에서 하루를 꼬박 버티셨다.
자식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으셨으면 그러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40여일이나 물 한 모금 못 넘기시면서도,
막내아들의 사진과 박사학위증을 품에서 안 놓으셨던 어머니였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차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왔으나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내게 한마디 던졌다.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파독 광부로 가자는 얘기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권이종의 [교수가 된 광부]를 읽고 | 책 속의 인생 2010.08.11 14:31:59
http://book.interpark.com/blog/timschel1/1624718
[ 도서 ] 교수가 된 광부
권이종 | 이채출판사 | 2004/06/17

참 스승이 된 광부

교수가 된 광부... 흔치 않은 길을 올곧게 살아온 누군가의 일대기임을 짐작함과 동시에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안겨주는 제목이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층으로 대변되는 교수와 하위 계층으로 대변되는 광부의 조합이
부조화스러워서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교수가 된 광부, 권이종 교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특별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교수가 된 광부」는 청소년운동의 선구자이며 대부인 권이종 교수님께서 청소년, 교사, 학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교수님의 청년기 고백이며 일대기이다. 1940년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의 오지 중의 오지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교수님은 가난한 산골 마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난을 삶 자체로 여기며 자라났다.
배불리 먹을 수도 없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환하게 묵묵하게 고학의 연속 끝에 중·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가난 때문에 부모나 자신의 삶을 원망해본 일 없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로했다고 한다. 가난이 그를 성공하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요,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구절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회의 땅,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며 김포공항에서 울부짖던 어머니를 뒤로 하며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버리고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을 마련하리라. 그리고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리라.’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그 당시의 가난과
가난의 극복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가 최하위 계층의 직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쟁이
꽤 치열했던 까닭이 박정희 정권의 침체된 경제 극복을 위한 정책과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1목표가 경제 발전인데, 산업화를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돈을 빌려오기란 쉽지 않았고
이때 독일이 간절히 원하던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3500만 불의 외화 벌이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19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2527명이 몰려들었는데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던 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
(15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송금액이 우리나라 외화 수입의 1/3에 달했다고
하니 이들의 노고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그 후 우리나라 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음을 알 수 있다.
6․25 전쟁 후 폐허가 되었던 한반도, 젊은이는 넘쳐나고 일자리는 없고 겨우 끼니를 때웠던 50년대와 60년대.
태어날 때부터의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가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싶었던 20대 청춘의 고뇌를
‘파독 광부’라는 비상구에서 해소하고자 했다는 필자의 고백은 역사상 첫 대규모 외화벌이가 된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잊혀진 우리의 눈물 젖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피 땀 어린 고통이 있었기에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쉽게 잊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출된 노동자들의 애환 정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음을 알고 조국을 위해 이 땅을 떠나야만 했고 또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눈물 젖은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1980년생인 나는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거른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우리 세대의 대다수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역사가 몇 해 전 ‘환상의 커플’이라는 드라마의 세트장으로 소개된 이후
남해의 명소 중의 하나가 된 풍경이 이쁜 독일마을을 여행하며 한 귀퉁이에서 스쳐 지나갔던 안내판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그들을 잊었지만, 1960년대 어려운 시기에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헌신한 그들이 조국을 잊지 않고 다시 돌아와 정착한 곳이 나에게는 독일의 이국문화와 연계된 특색있는
관광지였을 뿐이었던 사실에, 이래서 역사를 알아야 하는구나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갱도 안에서 한줄기 빛을 따라 비상구를 찾듯 한국의 실업 청년들이 독일로 가서 광부가 되었고,
또 공부를 시작했고, 또 다른 기회를 찾아 여러 나라로 떠나고, 누구에게나 이루고자 하는 꼭꼭 숨겨진 소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유학이었건 돈의 꿈이건 그들에게 3년간의 광부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권이종 교수님 또한 탈의장에서 1662번 사슬에 옷을 매달아 놓고 숨이 콱콱 막히는 섭씨 35도 이상의 지하 갱도로 내려가
8시간씩 중노동을 하고 나오면 땀이 흥건히 밴 속옷을 몇 번이나 쥐어짜야 하고 장화 안에 고인 땀을 몇 번은 쏟아내야 했다.
고된 일과의 반복, “글뤽 아우프!(행운을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는 독일어)”를 외치며 부상 당하거나 사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의 작업은 그야말로 죽음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연장근무는 자기 생명을 단축하며 몸을 담보로 잡는 것과
같지만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더 많이 일을 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오로지 고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으로 ‘사고 안 나고 병 안 나고 얼른 벌어 부자가 되어 뭔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야지’ 라는 희망으로 버티었을 것이다.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본 광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막장인생이 왜 막장인생인지 아슈? 지상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마 모를거야. 탄가루가 폴폴 날리는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갱내의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탄가루랑 같이 먹는 밥이라도 얼마나 감사한지....
내 꿈은 지상에서 일하는 것이요, 돈 좀 모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땅에서 농사지으면서 사는 게 꿈이요.”
그 광부의 말과 석탄가루가 묻은 도시락을 갱 속에서 먹는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고 놀라워 했던 기억과 함께
불평하고 살았던 나 자신을 반성하고 감사하며 살아야지라고 다짐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40년이 훨씬 지나서도 찜질방 가는 것과 승강기 타는 것조차도 광산을 기억나게 해서 싫다는 말에 광부로 일한다는 것,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방이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한 긴장의 연속,
정말 힘들었겠구나 싶었는데 광부들의 훈장인 석탄 문신 구절에서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목욕탕에서 석탄가루가 스며들어 생겨난 생채기가 선사하는 광부 문신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마음 한 구석에도
서러운 생채기가 하나둘 늘어났다는 구절은 정말이지 가슴이 아팠다. 문신이 없어지지 않자 쓰리고 아프지만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파내고 이태리 타올로 빡빡 문질렀다는 대목에선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힘든 광부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배움의 끈을 놓치 않았던 교수님의 불굴의 의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3년 후 주변의 권유에 의해 독일에 남겨 된 교수님은 광부가 아닌 늦깍이 독일 유학생으로서의 제2의 독일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광부생활 3년간의 수입은 파독 당시 마련해야 했던 빚을 갚고 가족들을 위해 모든 송금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일푼으로 또 다시 고학이 시작되었다. 이 때 가난한 광부 출신 유학생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던 독일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겹쳐졌다. 그리고 과거 독일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광부나 간호사의 인권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고 개인적으로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도와주었다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그렇지 못해 부끄럽다 못해 낯이 뜨거워졌다.

아헨에서의 학창생활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서도 “그래도 지하 막장생활보다
깨끗한 공기가 나를 눈웃음 짓게 한다. 용기를 준다. 지열 40도보다 영하 10도가 더 좋다"고 표현한 그 불굴의
의지와 긍정적인 자세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이 버텨낼 수 있는 시련은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에 그저 놀랍고 작은 역경 앞에서도 불평했던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따름이었다.

유학중 인생의 선물이라 표현한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까지 중노동과 학업으로 초라한 자신을 선택해줄지 초조했다는
교수님은 사모님이 지금도 자신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 묵묵부답이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를 나는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