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 담은 입, 착 가라앉은 표정에 주위를 제압하는 위엄이 서려 있다.
5.16혁명의 아침, 서울시청 앞에 나타난 낯익지 않은 인물, 대한민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45세 박정희의 첫 모습이다.
군사혁명!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빅뱅과도 같은 파장을 일으키며 그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불안과 혼돈이 사라지고 엄격한 질서가 부여되었다. 겪어 보지 못한 군사혁명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 뭇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권력을 제압하고 핵심으로 발빠르게 이동해 갔다.
그의 강한 인상을 대표하는 것이 검은 안경이다.
왜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는지를 다들 궁금히 여겨 처음에는 신문기자들조차 그가 흉터를 가리고 있거나 곰보일지 모른다고 상상했다고 한다.
그의 이미지 포인트, 검은 안경은 세간의 화제였다.
AP통신은 한국에 등장한 새로운 권력자를 “검은 안경 뒤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며 “미군이나 유엔군 장교들과 골프를 한번도 치지 않은 이 ‘전형적인 한국인’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극동의 얼굴”이라고 했다.
그 검은 안경은 ‘레이밴’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등 혁명의 주체들이 거사 이전부터 외출할 때 쓰던 것이다. 가급적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과의 눈맞춤을 피하기 위한 착용물로 혁명 세력의 표시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 검은 안경은 자외선 차단용으로 처음 미군들이 쓰기 시작하여 미국에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베트남전쟁 때에는 한국군 사병들 사이에도 유행해서 ‘라이방’이라는 우리 식 발음으로 불리었다.
혁명 직후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었던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李秉喆)은 일본에서 돌아와 처음 만났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인상을 “아주 강직해보였다”며, 그러나 검은 안경을 쓴 그가 의외로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부드럽게 말해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병철 지음 <호암자전>)
검은 안경은 남이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위압의 선입견을 주었지만, 때와 장소,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었다.
혁명 후 처음 그가 미국을 방문해서 40대 중반의 패기만만한 동갑나기 케네디를 만났을 때(1961년 11월), 흔들의자에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고 앉아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박정희를 내려다보는 듯한 케네디의 자세가 강자의 여유와 우월감이 지나쳐 오만무례해 보였다. 박정희는 어색함 때문인지 생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검은 안경으로 케네디를 건너다보는데, 이때 얼마만큼의 굴욕과 노여움을 검은 안경이 커버해 주지 않았을까.
그 현장을 취재한 합동통신 기자 리영희는 박정희의 미국 방문을 “대한민국이란 속방(屬邦)의 대통령이 되기 위한 미국 대통령의 윤허를 찾는 것이었다”며 검은 안경은 “자기 열등의식의 표시이고 강자 앞에 서게 된 약자의 정신적, 심리적 동요를 감추기 위한 장치였던 것 같다”고 했다. (리영희 회고록 <대화>)
또 현지 취재기자 문명자(文明子)는 박정희가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울 온 촌놈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고 했다. (문명자 지음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리영희, 문명자는 박정희를 어지간히도 미워한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두 기자가 이런 용감한 기사를 쓴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회고록을 통해 ‘용서할 수 없는 박정희’의 모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 지난날 그 자신의 용감하고 정의로웠던 자화상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란 나라의 자화상은 그게 아니었다. 나라 살림의 절반 이상을 원조에 의존하는 나라, 미국이 먹여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일어날 가망이 없는 나라, 그래서 미국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해도 당연한 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고우나 미우나 미국을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불쌍한 한국, 리영희나 문명자 역시 그런 한국인의 처지에서 예외일 수 없는 노릇임에랴.
모질고 아픈 가난의 패배감, 배고픔과 설움의 한 시대 한복판을 지나온 박정희, 자존심 강한 민족주의자 박정희이건만, 그가 틀어쥔 권력이란 것도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과제 앞에서는 외롭고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유롭지 못하고 촌스러울 수밖에 없는 행색, 작고 가난한 나라의 열등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1963년, 그는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한다.
경상도 진주 유세에서 엷은 검은색 안경을 쓰고 연설대 앞에 섰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청중 속에서 한 노인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외쳤다.
“그 안경 좀 벗어보소. 관상 좀 봅시더!”
뜬금없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당황하고 긴장했다.
“아, 그래요? 네, 벗지요.”
약간 멋적은 듯, 그러나 선뜻 박정희가 안경을 벗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그 노인이 다시 외쳤다.
“그 관상 보이 대통령 되겠다!”
그 말에 박정희는 어색한 미소를 잠깐 지었다. 수줍음 같기도 하고 쑥스러움 같은, 성격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그의 독특한 미소였다.
선거 유세라면 표를 달라고 유권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텐데, 굳이 유권자 앞에서까지 검은 안경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왜 검은 안경을 쓰는지를, 군시절부터의 막역한 친구이자 박정희 시대에 건설부장관으로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지휘한 이한림(李翰林)이 물어본 적이 있다.
“너무 고단하게 뛰어다니다 보니까 눈이 항상 벌겋게 충혈되어 끼는 거야.”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의 실용성이 있었다. 모양새로 끼는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어 국정(國政)의 중심에서 새로운 시대를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집념과 패기에 넘쳐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안경에는 목숨을 내놓고 혁명을 감행한 각오와 그 나름의 깜냥으로 북한, 중공, 소련이라는 거대 공산 블록과 대치하고 있는 작고 힘 없는 나라의 운명을, 그리고 역사에 겹겹이 묵은 민족의 가난을 자기 한몸에 떠안은 비장함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공장이 세워지고 수출이 늘어나면서 미국이 ‘쇼핑 리스트’라고 비웃으며 실패할 것이라고 악담을 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연평균 7.8%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자립경제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게 되어서는 자신감이 생겼다.
산업현장 시찰을 나서는 박정희는 한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이 즈음부터 답답한 청와대를 떠나 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잠행(潛行)을 즐겼다. 비공식 외출에는 반드시 점퍼 차림에 검은 안경을 썼다.
하루는 비서관, 주치의만 동행해서 지프를 타고 종로에 나갔다. 골목의 막걸리집을 찾아 들어가 양념 간장에 부침개를 안주로 서너 사발을 들이켜는데, 주모가 박정희의 목소리를 듣고 옆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으이.”
주모가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에 박정희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었고, 동행자들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또 하루는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의 포플러 단지에 갔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봄눈에 막 물이 오르는 나무들을 껴안아 보고 무척 흡족해했던 그는 귀로에 한적한 주막을 찾아 들어갔다.
해가 기울어 으슬으슬 추워지는 저녁 나절, 일행은 주막 할머니의 안내로 따뜻하고 메주 냄새가 물씬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박정희는 고향집에 온 듯 편한 자세로 퍼더버리고 앉았는데 버릇대로 안경을 벗진 않았다.
“날도 쌀쌀하니 막걸리 따끈하게 해서 한잔 주시오.”
주문을 하고, 얼마 후 할머니는 찌개 안주와 따끈한 막걸리를 한 상 차려 들어온 뒤 손님들에게 한잔씩 권했다.
“박 사장님, 이거 맛이 괜찮은데요.”
동행자들은 이럴 때 박정희를 박사장이나 박선생 등으로 불렀는데, 장소가 장소인만큼 경우에 따라 너나들이 사이가 되어도 좋다는 자유가 허용되어 한껏 풀어진 자세가 되곤 했다.
손님들과 막걸리 사발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박정희의 무릎을 탁 쳤다.
“아이고, 이 양반이 꼭 박정희를 닮았네. 신문에서 본 그대로야. 꼭 같애.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몰라”
“주모! 내가 왜 박정희 닮아? 모두들 박정희가 날 닮았다고 하는데.”
박정희는 능청을 떨고, 동행자들은 킥킥거렸다.
얼굴이 불콰해진 주모 할머니는 세상살이 불평 불만을 늘어놓더니 정부에 대해 욕사발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행자들은 술기운이 싹 가시면서 안절부절못하는데, 박정희가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어주니 잔뜩 기세가 오른 할머니는 군수, 경찰서장, 지서 주임에서 아무개 순경까지, 또 면장과 면서기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박정희로 돌아왔다.
“박정희는 새까맣고 조그만 것이 어찌 그리 간이 큰가 몰라. 하도 단단해서 돌로 쳐도 안 죽을 거야.”
동행자들은 오싹해서 그저 할머니의 입방정이 끝나기만 고대하는데, 박정희는 파안대소하며 연신 맞장구를 쳤다.
들창으로 어둠이 기어들 무렵, 마을 청년 한 무더기가 들이닥쳐 화투판을 벌이려 하므로 일행은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날, 문제의 여주군수와 경찰서장이 청와대 정보비서관실로 부랴부랴 달려왔다. 주막에서 급히 자리를 피했던 일행을 이상히 여긴 마을 청년들이 주모 할머니에게서 말을 전해 듣고는 대통령의 암행시찰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식한 주모가 너무 실언을 많이 해서 각하께 몸 둘 바가 없습니다.”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박정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주모한테 민정(民情)을 잘 전해 들었고, 좋은 충고도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그 군수하고 서장한테 전해주게.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그 주모를 잘 보살펴 주도록 부탁한다고 해.”
경직되고 다듬어진 소리가 아닌, 서민들의 거칠고 투박한 소리, 순도 높은 진정성이 그를 흔쾌하게 했던 것이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군수와 서장은 비서관으로부터 대통령의 말을 전해 듣고는 어깨를 펴고 돌아갔다.
그런가 하면, 검은 안경은 말도 많은 안가(安家)나 요정 나들이의 스캔들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소에 배치된 안전 요원이 검은 세단에 경례를 붙이고 그 안에는 검은 안경의 사내가 타고 있는 그 유명한 ‘코드 원의 단독 행사’라는 것이다. 무성한 소문 속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품위를 잃어 어지간히도 부인 속을 썩였다고 하고, 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을 상심케 하고 고뇌하게 하는 부분이다.
“외도만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스캔들이 업적에 흠이 되는 것을 민망스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피곤하고 경직된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해방의 공간을 찾고자 했고, 욕망 앞에 꾸밈없는 그 자신을 노출했다. 안락한 욕망의 공간에 자신을 풀어서 흐트려놓고, 그런 다음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을 바로 세워 엄격하게 다스리곤 했다. 죄었다가 풀고, 풀었다가 다시 죄는 것이다.
하긴 마오쩌둥, 케네디, 클린턴 등 어쩔 수 없는 남자들은 많고 많다. 도덕의 무공해 1급수까지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 수밖에 없는 남자들이다. 어찌 보면 사생활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권 지대이다. 공적인 일에 사생활을 끌어들여 평가하려고 드는 것의 시비 또한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스캔들이 공인에게 흠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고 보면 이성과 욕망의 복합체인 인간으로서 약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래서 그도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다가오는 박정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저런 것을 두루 보노라면, 박정희의 검은 안경에 드리운 미지의 그늘에는 대중과의 눈맞춤에 대한 부끄럼이 있다.
그래도 그가 서민들의 삶 속으로 잠행할 때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누군가와 금방 친숙해지기 어렵지만 그러나 세월 따라 서서히 친숙해지는 과정의 그림들이 담긴 검은 안경 속으로 격동의 현대사가 흘러갔다.
5.16의 그날 박정희의 검은 안경은 그렇게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유족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글/김인만 작가
5.16혁명의 아침, 서울시청 앞에 나타난 낯익지 않은 인물, 대한민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45세 박정희의 첫 모습이다.
군사혁명!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빅뱅과도 같은 파장을 일으키며 그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불안과 혼돈이 사라지고 엄격한 질서가 부여되었다. 겪어 보지 못한 군사혁명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 뭇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권력을 제압하고 핵심으로 발빠르게 이동해 갔다.
그의 강한 인상을 대표하는 것이 검은 안경이다.
왜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는지를 다들 궁금히 여겨 처음에는 신문기자들조차 그가 흉터를 가리고 있거나 곰보일지 모른다고 상상했다고 한다.
그의 이미지 포인트, 검은 안경은 세간의 화제였다.
AP통신은 한국에 등장한 새로운 권력자를 “검은 안경 뒤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며 “미군이나 유엔군 장교들과 골프를 한번도 치지 않은 이 ‘전형적인 한국인’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극동의 얼굴”이라고 했다.
그 검은 안경은 ‘레이밴’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등 혁명의 주체들이 거사 이전부터 외출할 때 쓰던 것이다. 가급적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과의 눈맞춤을 피하기 위한 착용물로 혁명 세력의 표시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 검은 안경은 자외선 차단용으로 처음 미군들이 쓰기 시작하여 미국에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베트남전쟁 때에는 한국군 사병들 사이에도 유행해서 ‘라이방’이라는 우리 식 발음으로 불리었다.
혁명 직후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었던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李秉喆)은 일본에서 돌아와 처음 만났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인상을 “아주 강직해보였다”며, 그러나 검은 안경을 쓴 그가 의외로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부드럽게 말해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병철 지음 <호암자전>)
검은 안경은 남이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위압의 선입견을 주었지만, 때와 장소,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었다.
혁명 후 처음 그가 미국을 방문해서 40대 중반의 패기만만한 동갑나기 케네디를 만났을 때(1961년 11월), 흔들의자에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고 앉아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박정희를 내려다보는 듯한 케네디의 자세가 강자의 여유와 우월감이 지나쳐 오만무례해 보였다. 박정희는 어색함 때문인지 생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검은 안경으로 케네디를 건너다보는데, 이때 얼마만큼의 굴욕과 노여움을 검은 안경이 커버해 주지 않았을까.
그 현장을 취재한 합동통신 기자 리영희는 박정희의 미국 방문을 “대한민국이란 속방(屬邦)의 대통령이 되기 위한 미국 대통령의 윤허를 찾는 것이었다”며 검은 안경은 “자기 열등의식의 표시이고 강자 앞에 서게 된 약자의 정신적, 심리적 동요를 감추기 위한 장치였던 것 같다”고 했다. (리영희 회고록 <대화>)
또 현지 취재기자 문명자(文明子)는 박정희가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울 온 촌놈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고 했다. (문명자 지음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리영희, 문명자는 박정희를 어지간히도 미워한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두 기자가 이런 용감한 기사를 쓴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회고록을 통해 ‘용서할 수 없는 박정희’의 모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 지난날 그 자신의 용감하고 정의로웠던 자화상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란 나라의 자화상은 그게 아니었다. 나라 살림의 절반 이상을 원조에 의존하는 나라, 미국이 먹여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일어날 가망이 없는 나라, 그래서 미국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해도 당연한 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고우나 미우나 미국을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불쌍한 한국, 리영희나 문명자 역시 그런 한국인의 처지에서 예외일 수 없는 노릇임에랴.
모질고 아픈 가난의 패배감, 배고픔과 설움의 한 시대 한복판을 지나온 박정희, 자존심 강한 민족주의자 박정희이건만, 그가 틀어쥔 권력이란 것도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과제 앞에서는 외롭고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유롭지 못하고 촌스러울 수밖에 없는 행색, 작고 가난한 나라의 열등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1961년 5월 18일 시청 앞에서 육사생도들의 결의를 바라보고 있다. ⓒ 자료사진 |
1963년, 그는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한다.
경상도 진주 유세에서 엷은 검은색 안경을 쓰고 연설대 앞에 섰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청중 속에서 한 노인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외쳤다.
“그 안경 좀 벗어보소. 관상 좀 봅시더!”
뜬금없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당황하고 긴장했다.
“아, 그래요? 네, 벗지요.”
약간 멋적은 듯, 그러나 선뜻 박정희가 안경을 벗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그 노인이 다시 외쳤다.
“그 관상 보이 대통령 되겠다!”
그 말에 박정희는 어색한 미소를 잠깐 지었다. 수줍음 같기도 하고 쑥스러움 같은, 성격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그의 독특한 미소였다.
선거 유세라면 표를 달라고 유권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텐데, 굳이 유권자 앞에서까지 검은 안경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왜 검은 안경을 쓰는지를, 군시절부터의 막역한 친구이자 박정희 시대에 건설부장관으로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지휘한 이한림(李翰林)이 물어본 적이 있다.
“너무 고단하게 뛰어다니다 보니까 눈이 항상 벌겋게 충혈되어 끼는 거야.”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의 실용성이 있었다. 모양새로 끼는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어 국정(國政)의 중심에서 새로운 시대를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집념과 패기에 넘쳐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안경에는 목숨을 내놓고 혁명을 감행한 각오와 그 나름의 깜냥으로 북한, 중공, 소련이라는 거대 공산 블록과 대치하고 있는 작고 힘 없는 나라의 운명을, 그리고 역사에 겹겹이 묵은 민족의 가난을 자기 한몸에 떠안은 비장함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공장이 세워지고 수출이 늘어나면서 미국이 ‘쇼핑 리스트’라고 비웃으며 실패할 것이라고 악담을 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연평균 7.8%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자립경제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게 되어서는 자신감이 생겼다.
산업현장 시찰을 나서는 박정희는 한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이 즈음부터 답답한 청와대를 떠나 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잠행(潛行)을 즐겼다. 비공식 외출에는 반드시 점퍼 차림에 검은 안경을 썼다.
하루는 비서관, 주치의만 동행해서 지프를 타고 종로에 나갔다. 골목의 막걸리집을 찾아 들어가 양념 간장에 부침개를 안주로 서너 사발을 들이켜는데, 주모가 박정희의 목소리를 듣고 옆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으이.”
주모가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에 박정희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었고, 동행자들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또 하루는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의 포플러 단지에 갔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봄눈에 막 물이 오르는 나무들을 껴안아 보고 무척 흡족해했던 그는 귀로에 한적한 주막을 찾아 들어갔다.
해가 기울어 으슬으슬 추워지는 저녁 나절, 일행은 주막 할머니의 안내로 따뜻하고 메주 냄새가 물씬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박정희는 고향집에 온 듯 편한 자세로 퍼더버리고 앉았는데 버릇대로 안경을 벗진 않았다.
“날도 쌀쌀하니 막걸리 따끈하게 해서 한잔 주시오.”
주문을 하고, 얼마 후 할머니는 찌개 안주와 따끈한 막걸리를 한 상 차려 들어온 뒤 손님들에게 한잔씩 권했다.
“박 사장님, 이거 맛이 괜찮은데요.”
동행자들은 이럴 때 박정희를 박사장이나 박선생 등으로 불렀는데, 장소가 장소인만큼 경우에 따라 너나들이 사이가 되어도 좋다는 자유가 허용되어 한껏 풀어진 자세가 되곤 했다.
손님들과 막걸리 사발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박정희의 무릎을 탁 쳤다.
“아이고, 이 양반이 꼭 박정희를 닮았네. 신문에서 본 그대로야. 꼭 같애.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몰라”
“주모! 내가 왜 박정희 닮아? 모두들 박정희가 날 닮았다고 하는데.”
박정희는 능청을 떨고, 동행자들은 킥킥거렸다.
얼굴이 불콰해진 주모 할머니는 세상살이 불평 불만을 늘어놓더니 정부에 대해 욕사발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행자들은 술기운이 싹 가시면서 안절부절못하는데, 박정희가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어주니 잔뜩 기세가 오른 할머니는 군수, 경찰서장, 지서 주임에서 아무개 순경까지, 또 면장과 면서기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박정희로 돌아왔다.
“박정희는 새까맣고 조그만 것이 어찌 그리 간이 큰가 몰라. 하도 단단해서 돌로 쳐도 안 죽을 거야.”
동행자들은 오싹해서 그저 할머니의 입방정이 끝나기만 고대하는데, 박정희는 파안대소하며 연신 맞장구를 쳤다.
들창으로 어둠이 기어들 무렵, 마을 청년 한 무더기가 들이닥쳐 화투판을 벌이려 하므로 일행은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날, 문제의 여주군수와 경찰서장이 청와대 정보비서관실로 부랴부랴 달려왔다. 주막에서 급히 자리를 피했던 일행을 이상히 여긴 마을 청년들이 주모 할머니에게서 말을 전해 듣고는 대통령의 암행시찰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식한 주모가 너무 실언을 많이 해서 각하께 몸 둘 바가 없습니다.”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박정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주모한테 민정(民情)을 잘 전해 들었고, 좋은 충고도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그 군수하고 서장한테 전해주게.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그 주모를 잘 보살펴 주도록 부탁한다고 해.”
경직되고 다듬어진 소리가 아닌, 서민들의 거칠고 투박한 소리, 순도 높은 진정성이 그를 흔쾌하게 했던 것이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군수와 서장은 비서관으로부터 대통령의 말을 전해 듣고는 어깨를 펴고 돌아갔다.
◇ (좌)TV드라마 ‘제2공화국’에서 박정희 역을 맡은 배우 이진수. 그는 택시를 타면 박정희 대통령을 닮았다며 운전기사들이 택시비를 안받고 “그냥 내리시라”하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 MBC-TV 화면 (우)이진수씨가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 되어 1997년 6월 26일 서울 라마다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정기총회에 참석한 모습. ⓒ 좋아하는 사람들 |
그런가 하면, 검은 안경은 말도 많은 안가(安家)나 요정 나들이의 스캔들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소에 배치된 안전 요원이 검은 세단에 경례를 붙이고 그 안에는 검은 안경의 사내가 타고 있는 그 유명한 ‘코드 원의 단독 행사’라는 것이다. 무성한 소문 속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품위를 잃어 어지간히도 부인 속을 썩였다고 하고, 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을 상심케 하고 고뇌하게 하는 부분이다.
“외도만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스캔들이 업적에 흠이 되는 것을 민망스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피곤하고 경직된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해방의 공간을 찾고자 했고, 욕망 앞에 꾸밈없는 그 자신을 노출했다. 안락한 욕망의 공간에 자신을 풀어서 흐트려놓고, 그런 다음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을 바로 세워 엄격하게 다스리곤 했다. 죄었다가 풀고, 풀었다가 다시 죄는 것이다.
하긴 마오쩌둥, 케네디, 클린턴 등 어쩔 수 없는 남자들은 많고 많다. 도덕의 무공해 1급수까지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 수밖에 없는 남자들이다. 어찌 보면 사생활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권 지대이다. 공적인 일에 사생활을 끌어들여 평가하려고 드는 것의 시비 또한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스캔들이 공인에게 흠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고 보면 이성과 욕망의 복합체인 인간으로서 약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래서 그도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다가오는 박정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저런 것을 두루 보노라면, 박정희의 검은 안경에 드리운 미지의 그늘에는 대중과의 눈맞춤에 대한 부끄럼이 있다.
그래도 그가 서민들의 삶 속으로 잠행할 때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누군가와 금방 친숙해지기 어렵지만 그러나 세월 따라 서서히 친숙해지는 과정의 그림들이 담긴 검은 안경 속으로 격동의 현대사가 흘러갔다.
5.16의 그날 박정희의 검은 안경은 그렇게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유족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글/김인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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