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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재배의 달인
2006년 새해 호남지방에 수십년만의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져 농민들이 한숨과 눈물의 설맞이를 했다. 크고 작은 폭설 피해는 해마다 겪는 일이다.
한겨울 폭설에도 끄떡하지 않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2001년 2월 중부지방에 폭설이 내려 대부분의 비닐하우스가 무너졌는데 충청도 한 농가의 비닐하우스는 끄떡없었다. 그 농가의 비닐하우스 단지는 훨씬 오래 전인 1969년 겨울 충북지방에 폭설이 내렸을 때에도 주변의 비닐하우스들이 폭삭 주저앉은 가운데 홀로 우뚝 무리지어 선 채 버티어 대단한 화제를 모았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 사는 하사용이라는 이름의 농부, 그가 최강의 비닐하우스를 가진 주인공이다.
그가 남다른 점이 있다면 비닐하우스의 채소를 정성으로 돌본다는 사실뿐이다. 하사용의 표현을 빌리면 비닐하우스는 ‘채소들의 집’이다. 사람의 집이 무너져서는 안되듯이, 비닐하우스가 폭삭 내려앉아 애써 키운 채소들이 눈더미 속에서 죽어버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다는 굳은 믿음을 그는 갖고 있다. 채소들은 그가 매만지는 손길과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꽁꽁 겨울에도 따뜻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늘 푸르름을 자랑했다.
◇ 해마다 덮치는 폭설에도 끄떡없는 하사용씨의 비닐하우스. ⓒ MBC 시사매거진 2580 화면(2007-01-07). |
그는 박정희 시대의 가장 유명한 농부의 한 사람이다. 그 시절, 농림부에서 대통령의 지시로 새마을지도자 교육계획 보고서를 올린 일이 있었다. 보고서에는 교육을 담당할 강사진 명단도 들어 있었다.
보고서를 본 대통령 박정희는 명단을 가득 채운 종교계 인사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의 이름들을 지우고 어디서 생판 들어 보지도 못한 무명인사들의 이름을 줄줄이 적어 넣었다.
거기에 채소 농사꾼 하사용의 이름이 올랐다. 박정희가 적은 이름들은 모두 농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새마을지도자들을 가르치게 하라는 것이었다.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해서 반드시 농사법을 남에게 잘 가르친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새마을지도자 교육은 농사법보다 정신교육이 중요하게 강조되던 터에 농부 하사용의 경우는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저명인사들의 지식보다는 농부들의 성공 체험을 중시했다.
농부 하사용하면 언필칭 따라붙는 말이 ‘비닐하우스 재배의 달인’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물도 꽤 있다. (지방행정 1971년 19권 205호, 월간조선 2002년 3월호, 동 12월호)
“농어민 잘살게 하는 것, 나의 끊임없는 소원”
정부에서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농촌에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 비닐하우스 재배를 권장한 것이 1967년이다. 그해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에 의해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에 비닐하우스가 집단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초가 속에 대를 이어가며 낙을 모르고 다만 의(衣)와 식(食)에 얽매여온 농어민에게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주자는 것, 이것은 나의 끊임없는 소원입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것을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농어민에게 생기 넘친 삶의 터전을 마련 하고자 수입이 큰 사업을 지방마다 알맞게 벌이자는 것이 바로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입니다.”
이렇게 박정희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에 대폭적인 자금을 지원하되 그 대상을 주민의 호응이 높고 이 사업을 이끌어갈 만한 유능한 지도자가 있는 지역으로 해야 하며, 전액을 지원하지 말고 반드시 주민들에게 20% 정도의 자력 부담을 시키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에 따라 청원군의 농부 하사용이 비닐하우스 1동을 배정받은 것이 그때의 일이다. 그는 이미 1963년부터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조기 수확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온마을이 그의 성공에 힘입어 비닐하우스의 채소 농사를 집단화하게 되었다.
그의 비닐하우스는 1968년에 8동이던 것이 이듬해에 16동으로 늘어나 농장 규모로 확장되었다. 비닐하우스 농장에서는 사시사철 배추, 시금치, 토마토, 오이, 당근, 상추 등 싱싱한 채소가 촉성재배로 출하되었고, 농부 하사용은 고소득을 올리는 어엿한 농장주가 되었다.
시골 농부, 난생 처음 연단에 오르다
1970년의 어느 하루, 청원군수가 기쁨 반 걱정 반의 소식을 가지고 그를 찾아왔다. 서울 가서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의 성공 스토리를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쁨이요, 그 행사에 대통령이 임석하므로 실수 없도록 원고를 외워야 한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군수는 미리 작성해온 원고를 그에게 내밀면서, 빨리 양복 한벌을 지어 입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양복 한벌도 없었다. 농사 짓는 데 필요치도 않은 양복을 아무리 대통령 앞이라고 해도 그때 한번 입자고 돈을 쓴다는 것이 가당치 않았다.
하사용으로 말하면, 면서기나 군수가 와도 밭에서 허리 굽혀 일하던 일손을 멈추지 않는 농사꾼다운 고집은 알아줄 만했다. 그런 사람이 양복을 지어 입을 리 없었다.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고 부인과 함께 모처럼 서울에 갔다.
◇ 1970년 11월 11일 제2회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 광경. ⓒ 국가기록원 |
1970년 11월11일 서울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
텔레비전이 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제2회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의 경진대회를 전국에 중계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지방행정기관의 책임자, 그리고 전국의 농어민 대표들 3천명이 시민회관의 1층부터 3층까지를 가득 메웠는데, 양복과 한복 등 정장 차림 중에 유독 점퍼를 입은 청원군에서 온 농부 하사용과 스웨터 차림의 그 아내가 어설프게 눈에 띄었다.
엄숙하고 뜨거운 열기 속에 대통령이 2층 특별석에서 행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사용은 난생 처음 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수많은 양복쟁이들 속에 묻혀 있으려니 다리가 떨려 원고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앉은 청원군수가 그에게 눈짓을 했다. 군수는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가서 말씀하실 때는 정신차려 가지고 원고를 잘 보고 하셔야지 말을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군수가 거듭 주의를 주는 바람에 원고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초등학교 2학년 중퇴 학력의 그를 대신해서 공무원들이 며칠 밤을 세워가며 작성했다는 원고였다. 원고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고 소득액이 엉뚱하게 부풀려 있어 영 마뜩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을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땅만 굽어보고 거짓 없이 살아가는 그들을 속인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마침내 차례가 왔다. 그가 연단으로 갔다. 원고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빈손으로 올라갔다. 군수가 기절할 듯 놀라는 것이 보였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는 말문을 열었다.
“저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온 하사용이라고 합니다. 비닐하우스로 채소원예 작물을 재배하는 보잘 것 없는 농부의 한사람입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단에 올라오기 전에는 긴장이 지나쳐 무섭기까지 했지만,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는 ‘가난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는 평소의 생각이 철석같이 뭉쳐 일어났다. 그래서 자신의 기막힌 인생 세세곡절 스토리를 맘껏 털어놓을 수 있었다.
넝마주이, 머슴살이 전전…채소농사로 이룬 부농(富農)의 꿈
그는 1930년 4월 충북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8남매의 4남으로 태어났다. 정중리는 불쌍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이라고 하는 것이 땅을 파서 떼로 지붕을 덮고 사는, 가옥대장에도 없는 ‘뗏집’이 많아 ‘뗏집거리’라고 했다. 갓난애 기저귀가 없어 똥을 싸면 개를 불러 엉덩이를 핥게 해서 치닥거리하고, 이부자리도 없이 가마때기 위에서 추위와 배고픔의 나날을 뒹굴며 사는 곳이었다.
그런 곳의 8남매나 되는 집에서 그는 밥다운 밥을 먹어보지 못하고, 두부집에서 나오는 비지나 엿집에서 나오는 엿밥,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찌끼를 얻어먹으며 컸다. 소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당시 50전이던 월사금을 6개월이나 내지 못해 2학년 때 울면서 교문을 나선 후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퇴학을 당한 것이다.
10세 되던 해, 심부름을 하면 밥은 먹을 수 있다는 면서기의 소개로 주재소의 소사로 들어갔지만, 일본 순사들에게 매맞고 비명을 지르는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보고는 몸이 떨려 다닐 수가 없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채소 농사였다. 당시 화교(華僑)들이 집중적으로 채소 농사를 지어 큰 돈을 버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저렇게 채소 농사를 짓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그러나 당장 배가 고파 길에 버려진 음식물이나 과일 껍질을 주워 먹는 처지에 채소 농사는 그림의 떡이었다.
동냥질부터 시작해서 넝마주이, 야채장사, 엿장사, 나무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해방을 맞고 6.25전쟁도 겪었다.
전쟁 때 인민군에게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해서는 국군에 입대를 해서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양구지구 문등리 전투에서 교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해 온양에 있는 109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폐결핵이 발견되어 치료불가 판정으로 의병제대를 했다.
병고의 몸이라고 한가로이 누워 지낼 처지가 아니었다. 품팔이를 하면서 무슨 일이든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다. 모질게 사노라니 폐결핵도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멀쩡해졌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딸을 만나 냉수 한사발 놓고 혼례라는 것을 치렀다. 혼수는 홑청 없는 이불 한채가 전부였다.
이 세상 땅천지에 내 땅 한평 없는, 집도 아닌 집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그러나 꿈은 있었다. 채소 농사였다. 그가 눈뜬 채소 농사의 수익성은 좁은 면적에서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채소 농사만 지을 수 있다면 원수 같은 가난은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땅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농사 지어 갚겠다며 땅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 항상 밟고 다니는 땅이지만 엉덩이 걸칠 땅도 없는 맨몸으로, 땅 속에 꿈을 묻고 그리움을 묻고 돌아다녔다. 이 마을 저 마을 낯선 곳을 다니면서 애원하고 걸식도 하다 보니 춘천까지 갔고, 거기서 머슴 살 집을 만나 눌러앉았다. 결혼 40일만에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기러기 부부로 떨어져 살았다.
춘천에서 3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고 쌀 열일곱 가마를 새경으로 받아 고향에 돌아오니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돈 한푼 안주고 먹여주기만 하는 식모였다. 그래도 새경을 받아 밑천이 생겼다는 말에 날아갈 것처럼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아내를 보니 북받치는 설움을 견딜 수 없었다.
새경받은 것으로 황무지의 밭 2백70평을 사고, 밭 한켠에다 두평 남짓한 움막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내 집이었다. 그때가 1957년이었다.
◇ (좌)이런 집에 살았다. 하사용씨 내외. (우)비닐하우스 채소를 돌보는 젊은날의 하사용씨. ⓒ MBC 시사매거진 2580 화면(2007-01-07). |
땅내를 맡으니 기운이 뻗쳐 새벽부터 밭에서 살았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날라 토양을 개량하여 마침내 숙원이던 채소 농사를 시작했다. 거름 지게를 지고 조치원읍까지 종종걸음으로 다녔다. 거름을 퍼오다가 읍내 사람들에게 뺨을 맞고 거름통이 깨지는 설움도 겪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거름 냄새만큼 구수한 것이 없었다.
인분이 모자라면 길거리에서 개똥도 주워다 거름으로 썼다. 그렇게 내외가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아내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기어다닐 즈음엔 방에다 끈으로 묶어놓고 내외는 온종일을 밭에서 살았다. 파김치가 되어 방에 들어가 보면 어린 것은 울다 지쳐 쓰러져 있고, 그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농부 하사용의 채소 농사는 유별났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 바른 종이를 씌워 주었는데, 그걸 보고 남들은 채소가 답답해서 어떻게 자라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콩기름 종이로 보온을 해준 채소는 놀랍게 빨리 자랐다. 어린 시절 눈썰미로 보았던 화교들의 농법을 되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농부 하사용 인생의 큰 전환점은 김천에서 처음 비닐하우스를 발견했을 때였다.
‘바로 저것이다! 사람에게 집이 있듯이 채소에게도 집을 지어주어야겠다’는 일깨움이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영농기술 및 작부(作付) 체제에 대한 농사기술을 농촌지도소에 찾아가 배우면서 채소와 가족처럼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정성으로 가꾸었다. 그의 채소 농사는 남보다 수확이 훨씬 빨랐고, 일반 농사보다 열배가 넘는 소득을 올려주었다.
채소 농사의 수입은 저축으로 이어졌다. 1원도 헛되이 쓰지 않고 은행에 갖다주어 통장의 액수를 불려나가, 그것으로 땅을 사고 비닐하우스를 더 지었다. 처음 2백70평으로 채소 농사를 시작한 땅이 1959년에 7백평이 되고, 비닐하우스 재배를 시작했던 1963년에는 1천평으로, 1970년에는 3천평으로 불어났다.
움막집도 벗어나 양옥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게 되어서는 그 자신의 배우지 못한 한의 세월을 새김질해 보며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게 되었다는 보람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렇게 그는 부농(富農)으로 성공했지만, 그가 말하는 그의 재산은 돈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굳은 믿음, 땅이 채소를 키워주듯이 사람을 키워주고 행복을 준다는 고마운 깨달음이었다.
“저의 뒤를 이어 마을 주민들도 40여동의 비닐하우스에서 원예작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저 하사용은 16동에서 1백여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현재 충북 원예기술교환 농장으로 선정되어 군내는 물론 타지방에서도 찾아와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현재는 연4~5회작까지 농사를 짓고 있으나 앞으로는 더욱 수익성이 높은 작물을 선택하고 기술을 습득하여 우리 농촌에 보급 더 잘 살 수 있는 농촌으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특별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작물은 살아 있는 생물인만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작물과 말을 통할 수 있는 농부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박 대통령 “하사용씨는 농촌의 위대한 교사”
◇ 박정희 대통령이 제2회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하사용씨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물결쳤다. 객석 여기저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들이 보였다.
대통령이 2층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사용씨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산 증인이십니다.”
대통령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대통령의 얼굴을 보니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의 개인 부문 1등은 하사용에게 돌아갔다.
대통령이 그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 주었고, 대통령의 치사가 이어졌다.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충청북도에서 오신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기에 본인의 소감을 말하겠습니다.”
비서진이 미리 준비해준 치사문을 접고, 대통령도 즉흥 연설을 했다.
“우리는 농촌 개발에 헌신한 인물로서 걸핏하면 외국의 사례만을 인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농촌에도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사용 씨는 우리 농민들의 위대한 교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국민의 훌륭한 교사입니다. 그는 그의 가난을 근면과 자조와 협동으로 해결해 냈습니다. 한국 농촌의 빈곤도 하사용 씨와 같은 정신자세가 있어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은 하사용 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이 없이 일어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성공담을 남겼다.
그해 1970년 4월22일 대통령 박정희가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하고 5월6일 구체적인 추진 방안이 마련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출발이었으니,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의 성공 불씨가 바로 새마을운동으로 점화되었던 것이다.
농림부에서 새마을지도자 교육계획을 청와대에 올리고, 대통령이 강사 명단을 수정해 농림부에 돌려보낸 것이 1971년 가을, 그러니까 하사용의 성공사례가 발표된 제2회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의 경진대회를 치르고 난 이듬해의 일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농부 하사용을 일컬어 ‘훌륭한 교사’라고 했다.
박정희는 농촌 개발이라 하면 의레 덴마크를 부흥시킨 달가스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종래의 상투적인 이론보다는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산교육이 될 수 있는 본보기를 찾고자 했다. 뜬구름 같은 지식보다는 ‘나도 저 사람처럼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자는 것이었다.
농부 하사용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 범위로 확산된 1971년부터 새마을 정신을 전파하는 농촌 부흥의 리더가 되어 새마을연수원은 물론 각 기업체, 관공서, 학교, 심지어 교도소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세련된 말재주가 없어 투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솔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으며, 묵묵히 땅에 고개 숙여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이 감동을 주었다.
대통령의 10.26서거 때까지 그의 강연 기록은 1500여회나 되었다.
대통령 포상금 거절한 농부의 고집
◇ (좌)1970년 11월 12일 청와대 가든파티에 참석한 인사들. (우)정원에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하사용씨 내외. ⓒ 국가기록원 |
그는 해마다 10월26일이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동작동 현충원을 찾아 대통령 묘소에 절을 하고, 지난날 대통령과 만났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1970년 11월11일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의 이튿날, 대통령은 경진대회의 수상자들과 전국 지방장관, 농촌진흥원장과 농촌지도소장 등 관계자 369명을 청와대로 불러 가든파티를 베풀었다.
하사용 내외는 점퍼와 스웨터 차림 그대로 청와대에 갔다.
“하사용 선생은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대통령이 묻는 말에 그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배를 곯지 않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가난이 무서워 가난과 싸워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집의 아이들이 철이 없어 굶는 것,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목표 달성을 위해 무섭게, 강하게 키우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한가지 송구하고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대통령의 재가로 그에게 1천만원의 포상금이 내려진 것을 거부한 일이다. 주변에서 ‘불경죄’라고 하도 말들이 많아서 대통령이 노여워하지는 않았는지 그것이 가슴 한구석에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농부 하사용은 남에게 동냥을 해서 굻주림을 면했을지언정 10원도 빌린 일이 없었다. 포상금 1천만원이면 땅 2만평을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남의 돈 쓰지 않고 맨몸으로 이만큼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허물 수가 없었다. 내 힘으로 해결하고 내 힘으로 목표를 달성한다는 의지는 바로 가난으로부터 배운 것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 분은 희망이자 등불”
평생을 땅만 굽어보고 살아온 하사용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고개 한번 굽실거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농부였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는 곳이 꼭 한 군데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이다.
현충원의 대통령 묘소를 찾을 때마다 생생하게 귓전을 울리는 말이 있다.
“내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무얼 하려는 사람인지 몰라도 좋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무얼 하다 갔는지 알겠지요.”
대통령의 말이다.
“그 분은 희망이자 등불이었습니다.”
농부 하사용은 박정희 대통령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2000년에 논밭 1만평을 마련했고, 2006년 11월 제43회 저축의날 기념식에서 60여년간 통장만 3백개를 채우도록 저축을 해온 공로로 ‘올해의 저축왕’에 선정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새마을 교육과 근검 절약의 노하우를 전달하기 위해 전국 농촌을 순회하며 강연한 기록은 총3천여회에 이르고 있다.
“비닐하우스 채소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 (좌)장대비로 비닐하우스의 눈을 쓸어내리는 하사용씨. (우)폭설에도 그의 비닐하우스는 무너지는 일이 없다. ⓒ MBC 시사매거진 2580 화면(2007-01-07). |
강연 때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묻는 말이 있었다. 겨울에 폭설로 숱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데 어찌하여 하사용의 비닐하우스는 끄떡없느냐는 것이었다.
“농작물을 기를 때는 제 자식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쏟아야 됩니다. 제 자식처럼 아끼는 농작물이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면 죽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푸릇푸릇 자라는 농작물들이 폭설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며 나를 보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둡니까. 어떻게 나몰라라 하고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건 농사꾼이 아닙니다.”
눈이 오면 오나 보다 하고,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면 정부로부터 복구비를 지원받는 것은 농부 하사용의 농법에 없었다.
눈이 오면 식구가 모두 나가 밤낮없이 비닐하우스 위의 눈을 쓸고 또 쓸어내렸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이 폭설에도 끄떡없는 최강의 비닐하우스를 가진 농부 하사용의 ‘비결’이라는 것이었다.
후기
◇ 비닐하우스 채소 농사로 평생을 함께 한 하사용씨(우)와 부인 신경복씨(좌)는 해마다 박정희 대통령 기일이면 현충원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
어제(2011년 2월15일) 오전 하사용 선생의 근황이 궁금해 자택에 전화를 하니 새마을연수원에 강연차 출타중이었다. 남편과 함께 애옥살이 삶을 딛고 일어난 부인 신경복 씨(76)도 병원에 통원치료하러 가서 부재중이라 장남 하재성씨(청원군의원)와 통화를 했다.
“거기도 눈이 내렸습니까?”
“여기는 안왔습니다.”
눈이 비닐하우스를 덮칠 때 하사용 선생이 어떻게 하는가를 대충 알고 있지만 가족들이 비닐하우스를 어떻게 지키는가를 다시 물어보았다.
“온 식구가 나가서 장대비를 들고 눈을 쓸어 내립니다. 눈이 한꺼번에 퍼붓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쌓이니까 비닐하우스를 덮기 전에 쓸어내리면 되는 거죠. 그냥 내버려둬서 채소가 파묻혀 죽는 것을 못보는 분입니다. 눈을 쓸어내리는데 이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습니다. 비닐하우스는 절대 무너지지 않아요.”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면 정부에서 돈이 나오지 않습니까?”
“보조금과 융자금을 합쳐서 비닐하우스를 다시 지을 만한 시설비가 나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도록 손을 놓고 있는 자세에 화를 내십니다. 밤잠을 못자도 채소를 살려야 한다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는 포상금을 하사용 선생이 거절한 의미를 물어보았다. 그 시절 대통령이 뜻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는 금일봉은 상당한 액수다.
“그 돈을 받았으면 시골에서 재벌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아버님은 스스로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평생 남의 도움 없이 밑바닥에서 일어선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재성씨는 부친의 생활신조를 간명하게 말했다.
“부지런하고 절약하는 겁니다.”
지금도 새마을연수원 강연을 하는 하사용 선생은 중국에 두차례 가서 새마을정신을 교육한 바 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해 중국의 신농촌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중국은 한국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1호’ 하사용 스토리를 소설(〈쉰멍(尋夢ㆍ꿈을 찾아서〉)로 출간해 농촌 지도자들에게 배포했다.
‘살아 있는 전설’ 하사용 지도자가 대한민국의 새마을운동과 오늘의 농촌 살림살이, 농심을 국내외에 일깨워주고 있다.
글/김인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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