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목숨 건 전투를 했다. 지하 700~1200m에 있는 독일 광산의 막장 온도는 30도가 훌쩍 넘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비 오듯 하는 이곳에서 안전을 위해 ‘중무장’을 한 채 매일 80개의 쇠동발(스템펠·Stempel)을 박아야 했다. 그러나 너무 더워 윗옷을 다 벗거나 아예 속옷만 입고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땀에 젖은 팬티를 하루 다섯 번 이상 짜서 입어야 했고, 장화는 땀으로 젖어 열 번 이상 쏟아 내야 했다.”(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엮음, 〈파독(派獨) 광부 30년사〉, 1997, 188쪽).
▲1964년 12월 10일 박 대통령이 서독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광산의 공회당에 모인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연설하는 장면. ⓒ 국가기록원
1963년 이런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000여 명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적잖았다. 그만큼 우리는 먹고살기 힘들었다.
독일 루르탄전에 소재한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광산, 오버하우젠시의 로어벡 광산. 지금은 주변에 철조망이 쳐진 채 잡초만 무성하지만 바로 그 땅 밑 1000m 아래 막장에서 45년여 전 우리의 광부들이 1m를 파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씩 받으며 일했다. 쇠동발을 뽑고 세우는 작업을 하는 한국인 광부치고 이 쇠동발을 붙들고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석탄가루, 채굴기의 소음은 귀청을 찢었지만 그들은 버텼다. 악으로!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시체를 닦는 일과 그 밖의 허드렛일이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66년 1월 기준으로 월 440마르크(약 110달러)를 받았다. 거기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한 거의 전부를 고국으로 송금했다.
63~78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한국 광부들은 7800여 명. 66~76년에 걸쳐 독일로 간 한국 간호사는 1만3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의 최고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국민총생산(GNP)의 2%대에 달했다. 그들의 땀과 눈물 젖은 송금액이 경부고속도로·제철소·화학공장 건설의 종잣돈이 됐고 오늘의 우리가 있게 만들었다.
46년 전인 64년 12월 10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광산의 공회당을 찾았다. 지금은 시민체육관으로 쓰이는 곳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35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얼굴과 작업복에 탄가루가 묻은 채로 달려온 광부들도 눈에 띄었다.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가사가 나오지 않자 대통령의 선창으로 모두가 함께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점차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는 목멘 소리로 변했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애국가의 선율을 덮어 버렸다.
눈물범벅이 된 애국가 제창이 끝난 뒤 당시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공회당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통령은 준비된 연설 원고를 옆으로 치운 채 말했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공회당 안은 ‘눈물바다’가 됐다. 모두가 울었다.
다음 주면 서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됐고, 남의 나라에 막장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 외화를 벌어야 했던 대한민국은 어엿한 G20 의장국이 됐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거저 이뤄진 나라가 아님을. 우리가 잊고 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같은 이름 없는 대한국민의 땀과 눈물의 응결체임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