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동호(李東湖*47, 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몇 일전 「민족문제연구소」 등 세칭 진보단체와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시대 친일파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 속에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의 명단 속에 당연히 포함되리라는 것은 사전에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이다.
그들이 이 시점에 굳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그와 같은 일을 벌이는 이유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막상 공개적으로 돌아가신 분의 휘자가 함부로 폄하되는 현실을 접하면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죄스러운 맘을 금할 길 없다.
수천 년을 지속되어왔던 숙명과도 같았던
절대적 가난을 우리운명 속에서 지우고자 평생을 노력 하신 그 분이셨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막상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이토록 수모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젊은 시절의 오판
제가 그분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이다.
물론 그 전에도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분으로 배워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그 분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선배들과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그분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군 장교출신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대학에서 만난 그분은 독재의 화신이었다.
일제의 앞잡이었던 그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민중을 수탈하고,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는 독재자의 전형이었다.
그가 이룩한 산업혁명은 정부의 선전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발전을 왜곡시키고
미국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수탈을 원활하게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였고 미국의 식민지적 지배의 선봉에 선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은 점점 외국의 노예로 가는 길이었다.
종국에는 외국자본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최악의 나락으로 빠져갈
기가 막힌 현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36년의 노예생활도 부족해서
이제는 서양 사람의 노예에서 영원히 헤어 나올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혁명 밖에는 다른 수단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나의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민중의 수탈자였고
한줌도 안 되는 민족과 민중의 배반자들이었다.
반면 사회주의에는 민족낙원의 길이 보장되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서 강제적 지배나 억압이 없고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갖는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였다.
공산주의는 민중을 억압하는 사상
북한의 김일성을 알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절세의 애국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만주로 건너가
평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영웅이었다.
이미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해서 조선 공산당의 효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북한에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한 것이다.
남쪽의 식민지 나라와 북쪽 자주의 나라 더 이상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억울한 것은 6·25민족해방전쟁이 미제국주의자들의 개입으로 좌절된 일이었다.
남쪽에서도 민중이 주인 되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절호의 기회가 좌절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그 후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나에게 이데올르기는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가끔씩 사회주의에 대한 다른 증거가 제시되고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적 요소가 눈에 띄어도
이는 나의 철저하지 못한 혁명의지 때문이었다.
나의 사회주의와 북한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소련이 무너지고 연이어서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졌다.
그것도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낙원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서다.
영원한 사회주의의 낙원이고 고향인 소련과 사회주의 나라는 우리가 꿈꾸었던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반대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진행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가장 억압받는 인류 최악의 사회였다.
소수의 지배자들의 천국이었다.
민중이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이 가장 억압받는 그런 곳이었다.
이제 까지 내가 믿었던 사상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틀렸단 말인가. 근본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도피처가 있었다.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물질중심주의적 철학의 실패이지 인간을 중시하는 주체철학의 실패는 아닐 거야.
당시의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연이어 탈북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그래도 버텼다.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죄를 짓고 그 사회에 살수 없어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을 저주하는 거라고.
그런 나의 생각이 결정타를 맞았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 선생이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온 것이다.
중국의 고도성장,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 혁명 벤치 마킹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졌다.
탈북자들의 증언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북한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악의 나라’였다.
300만을 굶주려 죽이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그 토록 소리 높여 외치던 인류의 낙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은 어디가고 최악의 독재자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자신의 백성이 그토록 굶주려 죽어 가는데 호화로운 궁전에 앉아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후안무치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놀아난 지적 저능아였다.
거짓을 사실로 알고 있었고 이를 소리 높여 외쳤던 판단 능력이 상실된 문제아였다.
다시 원점에서 검토해야 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확신했던 사실을 확인 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만난 것은 그 때였다.
그분에 대한 것을 다시 보아야만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선 그분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다시 보았다.
분명히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당시 책들과 선배들의 판단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수탈에 망해 있어야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분이 이룩한 터전위에 대한민국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세계10대 무역국으로 진입해 있었다.
모든 제3세계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대한민국이었다.
제3세계나라가 산업혁명을 이루는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가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었다.
오랜 기간 우리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오히려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화의 기수 등소평이 가장 본받고자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이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오늘 중국의 고도의 경제성장의 배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 전략의 벤치마킹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우리 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 심어줘
베트남을 취재차 방문했던 후배가
그곳에서 만난 기자와의 대화 가운데 들었다는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현재의 엄청난 격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대한민국은 박정희 같은 지도자를 가졌고
베트남은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그 후배 또한 얼마간 사회주의에 물들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는 타국에서 만난 외국사람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스스로 자부심이 느꼈다고 나에게 고백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겼던 우리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을 안고 그의 길을 간 선구자였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일구는데 무엇 하나 기여한 적이 없는 이들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거짓명분으로 돌아가신 대통령을 헐뜯고 있다.
그들은 답해야 한다.
당신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고
당신들이 꿈꾸던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
당신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최악의 독재자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헌납하려 했던
당신들의 죄악을 먼저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인간의 도리이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고 자신이 이 사회에 끼쳤던 죄악을 참회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위대한 대통령을 헐뜯는 당신들을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날 그분을 모욕했던 죄인이기에 오늘의 현실이 더욱 견디기 어렵다.
그분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그분에 대한 과오를 씻는 길이라고 확신하기에
그분의 영전 앞에 머리를 조아릴 용기라도 갖는 것 같다.(konas)
written by. 이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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