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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源哲(펌) : 김일성의 도전에 박정희대통령은 이렇게 應戰하였다!

여동활 2010. 5. 4. 09:26

吳源哲(펌) : 김일성의 도전에 박정희는 이렇게 應戰하였다!
 2010-05-03 15:16:51 추천 : 3 | 조회 : 32 
 
김일성의 도전에 박정희는 이렇게 應戰하였다!
吳源哲   
 6.25 이후 김일성의 對南전략중 최대의 실수는 1968년 1월21일 청와대 습격사건이었다. 김일성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 데 대하여 화가 난 박정희는 본격적인 군사력 건설에 착수한다. 예비군 창설, M-16 공장 건설, 팬텀 도입, 방위산업 건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중화학공업 건설 등 대응조치가 잇따라 취해졌다. 朴 대통령이 새마을 사업에 착수한 것, 중산층 육성에 주력한 것, 의료보험 도입을 서두른 것, 행정수도 건설을 구상한 것도 安保的 이유에서였다. 그는 새마을 사업과 중산층 육성, 그리고 의료보험을 통하여 공산주의의 선동이 먹히지 않는 복지의 기반을 건설하려 하였던 것이다. 김일성의 도발이 잠든 사자를 깨운 격이 되었다. 안보적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이란 경제적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김일성의 도발이 한국의 경제를 몇 단계나 비약시킨 셈이었다.
 
 이 과정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은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력 건설의 실무 책임자였던 吳源哲 수석비서관이 쓴 글이다. 그의 사이트에 실려 있는 관련 기록을 뽑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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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점에서 남북간의 대치관계와 방위산업의 태동에 대해 총 정리한다. 1971년 말 기준이다.
 
 (1)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무장특공대 31명으로 하여금,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즉 1.21사태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美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조야(朝野)는 크게 경악하고, 국방력을 조속히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었다.
 
 (2) 박 대통령은 동년 2월 7일 경전선(慶全線) 개통식에서 "올해 안에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고, 이에 필요한 무기공장도 연내에 건설할 방침"임을 밝히는 동시에, "전국민적 방위태세를 갖춤으로써만이, 북한의 도발을 막아낼 수 있다. 온 국민은 경제건설과 국토방위를 병행해야 할 것이며, 논두렁에 총을 두고 농사를 짓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박 대통령은 국정의 지표를 "일면 건설, 일면 국방"으로 수정했던 것이다.
 
 (3) 박 대통령은 "일하면서 싸우자", "우리고장 방위는 내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로써 향토예비군은 군경이 전담하던 후방 對무장간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향토예비군의 무장은 긴급과제로 등장했다.
 
 (4)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지 약 1개월 후(1968년 5월 27일과 28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1차 연례 한미국방장관회의에서는, 1.21사태 이후 북한의 도발행위 증대로 심각해진 한국의 방위와 안보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韓美양국은 한국의 자위력(自衛力) 강화의 일환으로, 소구경(小口徑)화기(M16 자동소총) 생산공장을 한국에 건설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5) 11월 2일 북한 무장특공대 1백여명이 울진(蔚珍), 삼척(三陟)지구에 침투, 1개월 이상 준동할 때, 향토예비군은 소탕작전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향토예비군은 무기가 없어 전투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다. 단지 경계망 구축이나 길 안내에만 동원되었다. 향토예비군의 무장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6) 울진, 삼척지구 게릴라 침투사건이 있은 후 맞이한 1969년의 국정지표도 "일면 건설, 일면 국방"으로 정했다. 동년 8월 22, 23일 이틀간, 박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는데,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공동성명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재천명되었다"는 점이었다.
 
 (7) 1970년 1월 9일 연두기자회견에서도 박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의 해로 또 다시 정한다"라고 밝혔다. 연 3년째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 국정지표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관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긴박해졌고, 실제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초비상 상태였다. 1970년 6월 5일에는 이미 본 홈페이지 『제8장 남북관계(1970년)』에서 이야기한대로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해군 방송선의 피랍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방위산업 육성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M-16 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고속정이 건조되기 시작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된다. 그리고 방위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4大 핵공장 건설계획이 추진되었다.
 
 (8) 6월 22일에는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이 발생하였다. 6월 22일 새벽 3시 50분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무장특공대 3명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잠입, 현충문 지붕 위에 올라가 전자식 폭탄을 장치하려다, 그들의 실수로 폭발하였던 사건이다. 1명은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지 2명은 군경 예비군의 맹렬한 추격전 끝에 계양산에서 사살되었다. 이들 무장특공대는 6.25 기념식 때 정례적으로 참석하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한 후 현장에서 2∼3백m 떨어진 곳에서 무선식(無線式) 기폭장치로 폭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던 것이다(1974년 8월 15일에는 文世光 사건이 일어났고 1983년 10월 3일에는 버마의 아웅산 사건이 발생했으니, 북한은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암살을 계속 시도해왔다는 결론이다). 정부기관 요원을 시켜 딴 나라의 국가원수를 의도적으로 암살을 시도한다는 것은 양국간은 전쟁상태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의 안보는 주한미군(UN군)이 책임지고 있었다. 작전권도 주한미군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게릴라 침공에 대해서만 단독작전을 폈는데 그것도 우리나라 영토 안에서만 가능했다. 박 대통령은 국가방위는 주한미군과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경제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남한이 경제적으로 부강해져서 북한을 제압하게 되면 그때 가서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소위 「평화적인 통일방안」이다. 그런데 1970년에 들어서자 생각지도 못했던 큰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닉슨 독트린」이다. 이 장(제10장)에서는 한미간의 안보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969년 8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한다」는 재천명이 있은 지 6개월도 채 안되었을 때이다.
 
 1970년 2월 18일에 발표된 미국의 외교백서에는 「어떤 나라의 국방과 경제도, 미국 혼자만이 떠맡을 수는 없다.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1)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였고, 주한 美 지상군의 철수나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이것이 소위 닉슨 독트린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닉슨 독트린과 같은 거센 물결이 언젠가는 한국에도 밀어닥칠 것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월남 파견군의 철수가 어느 정도 매듭지어진 뒤에나 논의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우리 국군의 월남파병은 미국측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6·25 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미국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특히 2개 사단의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주한미군에 버금가는 국군을 파월하지 않을 경우에는 주한미군의 일부가 월남전에 전용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해서 2개 사단 이상의 대병력을 월남에 파병하고 있는 이상, 주한미군의 감축은 있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추측 보도가 나올 때마다 한국 정부는 「사실무근」, 「억측」이라고 해명했다. 70년 6월 30일에도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미군 철수는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달성되어 우리의 전투능력이 북한을 훨씬 능가하게 되는 70년대 후반까지는 있을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1주일 후인 7월 5일 사이공에서 개최된 월남 참전국 회의에 참석한 로저스 美 국무장관은 함께 참석한 최규하(崔圭夏)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하겠다"는 정식 통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에서는 포터 주한 美 대사가 丁 총리에게, 워싱턴에서는 존슨 美 국무차관이 김동조(金東祚) 대사에게 각각 철병 계획을 통고했다.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를 통고 받은 충격은 실로 대단해서 우리 국민들은 모두 6·25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 3선 개헌 발의(1969년 9월) 이후 국회심의를 거부해오던 야당도 주한미군 철수 소식은 충격적이어서 즉시 국회에 복귀하여, 「(1) 북한의 남침야욕을 유발하는 여하한 명분의 미군 철군에 반대한다. (2) 1966년 월남파병(增派) 때 미국이 약속한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및 방위산업 육성에 대한 지원을 감군에 앞서 구체화하고 실행해야 한다」라는 대미 결의문을 채택했다. 언론계에서는 「선보장(先保障) 후감군(後減軍)」, 「주한미군 철수 절대반대」등에 관해 연일 대서특필했다.
 
  
 이즈음 한일각료회의(7월 21일∼23일)가 서울에서 개최됐는데, 朴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일본측 각료에게 "미군이 영구히 주둔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 상태에서 이러한 문제가 나온다는 것은 시기상 적절치 않다"라며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북한이 단독으로 남한을 침공할 때, 이에 맞서 격퇴하려면 무엇보다도 국군의 현대화가 시급한데, 현재로서는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런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朴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朴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25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두 가지 평화적인 제안을 했다.
 
 첫째, "북한이 무장공비 남파 등의 모든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소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 온 종전의 태도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라는 점을 명백하게 내외에 선언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할 때 ……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 또한 북한이 한국의 민주, 통일, 독립과 평화를 위한 UN의 노력을 인정하고 UN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UN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석하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제안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대한민국만이 합법적인 정부라고 UN이 인정」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UN에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니, 가히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다음과 같은 「선의(善意)의 경제 경쟁」에 대한 제안이다. 朴 대통령이 이러한 경제 경쟁 제안을 하게 된 것은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북한을 능히 앞지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국군의 현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벌자는 뜻이 깔려 있었다.
 
  
 남한은 공업화의 출발이 북한보다 10년 가까이 늦었는데도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1차 및 제2차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초과 달성했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았으니 70년대가 되면 북한의 공업(크게는 경제)을 모든 면에서 앞지르리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남한의 60년대는 북한 경제를 추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귀중한 10년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마침내 「어떤 체제가 좋은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朴 대통령의 제안으로 표출되었다. 1970년 8월 15일, 제25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朴 대통령은 "더 이상 무고한 북한 동포들의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죄악을 범하지 말고, 보다 선의의 경쟁,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 건설,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라고 김일성에게 제안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의 빈곤한 나라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다고 알고 있었고, 그 이유로는 북한은 공산사회주의 방식의 경제개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을 때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돈 많은 나라에서나 적용되는 체제일 뿐, 경제적 후진국은 공산사회주의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나라가 많았다.
 
 그렇다면 朴 대통령의 제안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공산사회주의라는 기본이념은 인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한 경제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산사회주의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입증이 된다면 공산사회주의는 근본부터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註: 현재 공산사회주의가 일시에 몰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시 朴 대통령의 제안은 공산사회주의의 근본이념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제안이 선진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후진국 대열에 속해 있는 한국에서 나왔고 그것도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졌다고 느끼고 있던 남한으로부터 나온 도전이었다. 더욱이 김일성으로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주민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전기불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하루 속히 통일을 해서 남한 주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선전해 왔으니, 朴 대통령의 이러한 도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사였다. 김일성의 절대권위에 손상이 가며 통치하는 데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朴 대통령의 도전에 대해 즉각적으로 "철두철미 허위와 기만에 찬 모략전"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렇게 되면서 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朴 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집념과 온 국민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1964년에 1억 달러 수출을 기념해서 「수출의 날」을 제정한지 만 6년 만에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했다.
 
 우리나라가 10억 달러를 수출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실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정부의 경제개발 제2차 5개년계획을 보더라도 목표 년도인 1971년의 수출계획이 5억 5천만 달러였는데, 이 목표의 182%에 해당하는 10억 달러를 71년이 되기도 전인 70년에 수출한 것이다. 이 때부터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 있게 유행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70년 11월 30일에 열린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朴 대통령은 이 기념식에서 치사를 통해 "(우리나라는 금년도에) 수출 증대의 판가름이 될 10억 달러 수출의 고비를 달성함으로써,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는 70년대 중반(1976년)에는 30억 달러의 수출을 이룩해야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상공부는 수출 장기계획(10개년계획)을 마련했는데, 71년의 수출 목표를 13억 달러, 76년에 35억 달러, 80년에 53억 달러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朴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제안한「선의의 경제 경쟁을 수량적으로 표시한 것」이 수출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0억 달러만 수출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국력은 북한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70년의 세모(歲暮)는 수출 10억 달러 달성으로 축하 분위기 속에 마감이 됐다.
 
 그런데 71년 초하루가 되자, 朴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국가안보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나섰다. 원래 신년사라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국민들에게 국가원수가 축복을 기원하는 담화문 형식이다. 그런데 71년의 신년사는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국력이 약하면 나라가 기울고, 나라가 일어서려면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흥망성쇠의 기복이 무상했던 인간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더군다나 오늘과 같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국을 오늘의 우방으로 삼고 피와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있어서는 힘없는 민족은 세계무대에서 영원히 낙오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금년은 … 우리의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련이 예상되는 해라는 점에서 실로 국운을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입니다. … 이러한 시련의 징후는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 속에서 이미 시작됐으며, 중공(中共)(註: 당시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中共, 대만을 中國이라 불렀다)은 그 영향력을 강화해 가고 있고, 소련은 전통적인 극동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미국은 아시아에서 점차 물러서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가상 적국들이 「이 지역에 힘의 진공상태가 생겼고, 공산세력이 자유진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의 입장에 올라섰다」고 그릇 판단하기 쉽게 만들고 있습니다. …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북괴(註: 당시는 북한을 북괴라고 불렀다)가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 다시 6·25 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올해부터 앞으로 2, 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 이 시련의 극복을 위해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이며 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60만 국군을 더 정예화하고 250만 예비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 또한 경제건설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앞으로 민주체제와 공산체제의 대결은 전면적인 무력대결의 차원을 넘어서 번영과 복지를 앞세우는 개발경쟁에서 그 승패가 판가름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도성장을 지속시켜 나가야 하고 수출을 증대시켜 중화학공업의 육성으로 산업구조를 빠른 속도로 고도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이를 요약해 보면 우선, 朴 대통령은 1971년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시기라고 했다. 세계의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를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국력이 약하게 되면 나라가 기울게 되는 법이니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로서 국력을 기르자고 호소했다.
 
 한반도의 정세는 어떠했던가? 우리나라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물러서려 하고 있는데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중공은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소련도 극동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북괴가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 다시 6·25 전쟁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 朴 대통령은 "앞으로 2, 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국가안보 대책으로서「60만 국군의 정예화」와 「250만 예비군의 전투력 강화」에 힘쓰겠다고 했다. 또한 민주체제와 공산체제의 대결은 무력대결의 차원을 넘어서 번영과 복지를 앞세우는 개발경쟁에서 그 승패가 판가름될 것이기 때문에 「수출의 증대」 및 「중화학공업의 육성」으로 경제의 성장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註: 이 시점에서의 중화학 공업이라는 것은 울산석유화학, 포항종합제철 및 4대 핵공장 건설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朴 대통령의 국가운영 지침은, 「수출」,「석유 화학 및 종합 제철 공장 건설」,「국군 및 예비군의 장비 현대화」,「방위산업 육성」등 4개 항목이라는 결론이 된다. 71년의 신년사가 왜 이런 모양이 됐을까? 그 이유를 추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