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눈에 안보인 박정희대통령의 독립운동

여동활 2010. 4. 25. 22:14

눈에 안보인 박정희의 독립운동  

 

김규식박사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은 그의 저서 해방 3년사(1권 26쪽.1990년 까치사 간행.)에서 
한국 국적의 일본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박승환은 국내 항일 지도자로서 여운형과 긴밀한 유대와 연락을 가지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의 조선출신 장교로서는 당시 최고 계급이던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남방전선으로 전출되기 전까지)과 

상호 긴밀한 유대를 견지하고 만주국에 군적을 둔 조선출신 장교를 상당수(60-70)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런 한편 그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패전이 결정적으로 예견된 1944년부터 

위에서 말한 조선출신 장교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엄밀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달에 한번씩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한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결합과 인근주재 부대의 통합으로 약 1개 사단병력을 편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편성을 모의하고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만주에서의 박승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출신 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박정희 전대통령도 있으며 
그는 북경에 있던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부대에 편입하여 1946년 귀국하였고 
8.15해방 즉시 귀국하여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한 장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당시 여운형(독립운동가,정치가,중국 금릉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1945년 일본이 망할 것을 예상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됨. 해방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음.암살당함.)은 

박승환과 상의하여 군사행동을 계획했다. 

우선 만주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백두산을 넘어 국내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중국 연안에 있던 무정(함북출생,중국하남군관학교 졸업,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일전쟁중 팔로군 포병사령관,북한인민군 창설에 참가,6.25뒤 숙청됨.)과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만주의 전체 유격대를 총지휘케함이 좋으리란 점에 대체적인 합치를 보았다. 

1945년 4월말 여운형은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박승환을 건국동맹 대표로 메시지를 지참시켜 연안에 파견하였다. 

그해 6월에는 국내정세 보고서,통계등 기밀자료를 박승환의 아내 김순자에게 맡겨 
북경의 이영선을 경유하여 연안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영선이 연안으로 가는 도중에 8.15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같이 박정희는 비록 만주군의 장교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민족적 양심을 지닌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내진공계획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박승환은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에서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2고보(경복고)를 나와 1937년 봉천 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을 나왔기 때문에 박승환이 박정희보다 한살 어렸으나 군관학교는 3년 선배가 됩니다. 

학창시절부터 스케이트,수영선수로 활약했고 훤칠한 키에 힘이 세고 미남인 동시에 정열적이었다고 합니다. 
군관학교시절에는 교관 간노 히로시와 친했고 졸업후에는 봉천비행대에 근무하면서 김순자와 결혼합니다. 
그 중매를 홍사익(당시 관동군 군사학교 부교장)이 합니다. 

여운형의 신봉자이던 박승환이 봉천비행대에 있으면서 
홍사익장군의 비호아래 만주군 내의 조선인 장교및 하사관들을 상대로 개별적인 의식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본래 김순자는 친일파의 딸이었으나 박승환과 결혼한 이후 열렬한 조선독립운동가로 변신합니다. 

박승환과 접선된 사람으로는 박정희, 문용채(만군대위,군사영어학교,부군단장,육군중장예편) 
최남근, 최창륜,양국진(만주신경대 졸업,만군대위,군단장,육군중장예편.) 
이기건, 박임항(만주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만군대위,군사령관,육군중장예편.), 
김백일,이상열,박준호,박동균,등 수십명에 달했습니다. 



문용채의 증언입니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 
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운동단체이다. 

1945년 2월 9일,만주군 제 8단을 위문하기 위하여 [신태양 악극단]이 찾아왔다. 
단장은 김이태이고 단원들은 손목인,김준영,윤난성등 십여명의 가수와 연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신태양악극단의 잡부로 가장해서 따라 다닌 사람이 이용기인데 
그는 광복군 화북지구의 특파원으로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을 받고 왔던 것이다. 

위문공연이 끝난 뒤 박정희와 이용기는 술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들은 은밀히 만나기도 했다. 
이용기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장군의 커다란 도장이 찍힌 자신의 신분증을 확인해 보였다. 
그뒤 박정희에게 떨어진 지령은 조선건국동맹이 추진하는 작전계획에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광복군의 밀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명근의 증언입니다. 

"박승환은 나의 삼촌이다. 
삼촌이 요절한 뒤 나는 삼촌의 동지들을 자주 찾아갔다. 
내가 심계원에 근무할 때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장군을 찾아 갔더니 삼촌의 이야기를 하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삼촌의 딸 정근이 해운대로 피서를 갔다가 익사했을 때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던 박장군이 시체수습등 여러가지 편리를 봐주었다. 
내가 청와대 근무를 한 것도, 또 지역구 의원후보 공천을 받을 때 
삼촌이 사상적으로 불온했다는 모략을 받았으나 박대통령께서는 그것을 막아 주셨다. 
그분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자신도 한때 그와같은 오해를 받아 군에서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