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도회지에 야생 멧돼지가 출몰했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그뿐이 아니라 차를 몰고 지방의 국도를 달리다 보면 차에 치어 죽은 산짐승의 사체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산이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는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만큼 우리 산림이 건강해졌다는 증거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이 민둥산이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산들은 모두가 벌거숭이였다. 그러니 헐벗은 산에 무슨 짐승인들 살 수 있었겠는가.
1950년대의 우리나라 산림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의 피해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는 마땅한 연료가 없었기에 산에 있는 나무들은 겨울철 땔감으로 야금야금 사라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쓸 만하게 자란 나무들은 서까래나 기둥으로 쓰기 위해 베어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나무들은 송충이나 갈충이의 피해로 죽어갔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식량증산을 위해 야산을 개간하는 것을 공공연히 허용했던 탓에 산은 온통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벌목과 마구잡이식 개간은 산림의 황폐화를 초래했고 이로 인하여 장마철에 접어들면 홍수피해가 반복됐다. 기실 당시의 가뭄과 홍수에 의한 흉작은 산의 황폐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에 우선 순위를 매기라면 산림녹화 사업을 으뜸으로 치고 싶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산림녹화 사업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지금도 산이 황폐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는 전세계를 통틀어 나라 전체가 헐벗었다가 성공적으로 복원된 첫 사례로 꼽힌다. 미국의 환경분야 전문가인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은 지구환경보고서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플랜 B 2.0>에서 “한국의 산림녹화는 세계적인 성공사례로서 우리도 한국처럼 지구를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당시의 산림녹화사업과 더불어 도시근교 임야와 농지의 보존을 목적으로 그린벨트(greenbeltㆍ개발제한구역)를 설정한 것, 환경보호를 위해 자연보호헌장을 공포한 것 등은 백년 앞을 내다 본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1년 제26회 식목일의 박정희 대통령(왼쪽). ⓒ 산림청
내가 학교를 다닌 1960, 70년대에는 치산녹화운동이 활발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주 산림녹화사업에 동원되곤 했다. 여름방학 숙제로 의례히 나무 씨앗을 한 움큼씩 받아서 내야 했으며 송충이가 기승을 부리는 6월의 토요일 오후에는 전교생이 동원되어 송충이 구제에 나서곤 했다. 또한 식목일에는 학교에서 나무 묘목을 가져오도록 했기에 미리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 물병에 꽂아두었다가 뿌리를 내어 가져가기도 했다. 어디 그뿐일까. 장마철을 앞두고는 산사태를 막기 위해 민둥산에 나무와 풀을 심는 사방공사(砂防工事)에 동원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산들이 저토록 짙푸른 것은 당시의 녹화운동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지금 와서 학창시절의 일들을 되돌아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나는 강원도 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그곳의 주민들 상당수는 산비탈에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가끔 마을 앞을 흐르는 강가에 나가면 마을 주민 대여섯 명이 강물에 뗏목을 띄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뗏목은 일반적으로 간벌한 나무를 칡넝쿨로 촘촘히 엮어 만드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50여 미터나 되었다. 뗏목 위에는 잠을 잘 수 있는 조그만 움막이 있었고 뗏목꾼들은 도회지에 닿을 동안 그 움막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뗏목을 타고 강물을 따라 춘천까지 흘러가 그곳에서 뗏목을 해체하여 땔감으로 팔았다. 통상 그들이 길을 떠나면 일주일씩 걸리곤 했는데 그들이 돌아오는 날엔 마을에 조촐한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뗏목꾼들이 한꺼번에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마을 뒷산의 외진 골짜기에는 통나무와 싸릿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숯막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흙으로 만든 조그만 숯가마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숯 굽는 일이 불법이었으므로 이 숯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아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 숯막은 이따금 산삼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나 멧돼지 사냥꾼들이 이용하곤 했던 모양이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어느 날, 마땅하게 할 일이 없었던 뗏목꾼들이 남몰래 그 숯막에서 참나무 숯을 굽다 산림간수에게 들켰던 모양이었다. 겨울양식이라도 마련해볼 요량으로 숯을 굽다가 잡히는 바람에 그만 조그만 동네가 온통 초상집이 되어 버렸었다.
나는 지금도 산불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 옛날 숯을 굽다가 경찰서에 끌려갔던 뗏목꾼들의 풀 죽은 모습이 떠오른다. 오죽 가난했으면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숯을 구워 팔려고 했을까. 그들의 고단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법을 따지기 전에 측은하다는 마음이 앞섰다.
나는 요즘도 산에 오를 때면 그 옛날 헐벗었던 산을 생각하며 어릴 때 자주 불렀던 ‘메아리’라는 동요를 흥얼거리곤 한다.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 발가벗은 우리 산에 살 수 없어 갔다오 / 산에 산에 산〈?나무를 심자 /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우리나라는 6, 70년대 전 국민의 산림녹화운동에 힘입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숲을 되살렸다. 그래서 지금은 산짐승들이 새끼를 쳐 숲속에는 산토끼나 오소리, 고라니가 지천으로 뛰어다니고 나뭇가지에는 예쁜 산새들이 둥지를 틀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그토록 헐벗었던 민둥산이 어찌 저처럼 푸르를 수 있을까. 지금 산에 있는 나무들이 아름드리로 자라는 날 어쩌면 산을 떠났던 호랑이가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머잖아 깊은 산속에서 반달가슴곰이 어슬렁거리고 계곡에서는 무지개송어가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저토록 수풀이 우거진 까닭을 알기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