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를 미워했던 기자의 이야기 |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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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1년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親朴노선에서 反朴노선으로 전환했다. 부산에서 일선 기자를 하면서 나는 정권이나 정부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좋은 기사의 제1조건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언론의 일반적 분위기이기도 했다.
경찰출입 기자를 할 때는 매일아침에 즉결심판자 대기실로 찾아간다. 밤에 통행금지 위반, 노상방뇨, 無錢取食, 소란 등의 경범죄 혐의로 연행되어온 사람들의 서류를 읽다가 새마을 운동 단체의 간부 이름이 나오면 꼭 꼬집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특종에 눈이 먼 나에게는 새마을 운동이 가진 역사성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1974년에 중금속 오염의 추적이란 기사로 제7회 기자협회 취재보도 부문 상을 받았다. 내가 다녔던 부산수산대학교의 교수가 조사한 어패류의 중금속 함유 상황을 기사화했더니 이 교수는 문교부의 압력으로 징계를 당했고 학장은 물러났다. 이런 일도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정의감을 충족시켜주었다.
어둡고 썩었으며 협잡이 있는 곳만 찾아다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朴대통령의 위대한 국가발전 전략이란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와 서구수준의 저널리즘 원칙이 세상 만물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이 되어 있었으니 유신통치기의 朴대통령이 하는 일들중 곱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74년8월15일에 陸英修 여사가 피살되었을 때도 나의 가슴속에선 별다른 애통심이 생기지 않았다.
1974년 가을 동아일보 기자들이 시작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계기로 전국의 기자들이 朴정권 비판을 위한 조직에 나섰다. 기자협회가 그런 운동의 중심이었다. 국제신보 기자협회 분회는 ´밝힘´이란 소식지를 내면서 외부압력으로 기사가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을 감시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여기에 끼였던 나는 마치 독립운동하듯이 정권비판과 진실보도란 대명제에 보람을 느끼면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기자들이 외부압력에 흔들린다고 편집국장을 몰아세우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金泳三 金大中이란 이름은 나에게 희망이고 용기의 근원이었다.
한 편집기자는 1978년12월에 金大中씨가 감옥에서 나와 병원에 입원하는 기사를 1면 옆구리 기사로 크게 취급했다가 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회사에 의해 3개월 정직을 당했다. 우리는 그를 순교자처럼 우르러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시대를 다른 눈으로 되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96-1997년 사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국제기자연수프로그램인 니먼 팰로우 과정에서 수학하면서 박정희식 개발에 대해서 외국기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나는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한 미국인을 원군(援軍)으로 삼아 東아시아식의 국가발전 전략을 옹호하곤 했다. 그는 「중국의 부상(浮上)」이란 책을 쓴 윌리엄 오버홀터씨였다. 이 책에서 오버홀터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한때 카터 대통령의 선거참모였던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당하게 되었나를 흥미 있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모택동(毛澤東)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터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주한(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한 상징으로서 여론조작을 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으로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先行)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목격한 뒤 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오버홀터씨의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주요 저서로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朴正熙를 보는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맑아져간 그의 과정은 기자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기자는 朴正熙 시대에는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기자됨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의 사후(死後)에는 박정희의 비행을 비화(秘話)로써 폭로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하여 시작한 탐구작업은 그에 관한 많은 어두운 면을 노출시키기는 했으나 더 많은 긍정적 자료도 함께 발굴하게 되었다. 아무리 찍고 깎고 해도 그 덩치가 줄어들지 않는 거목(巨木)이 박정희였다. 여기에다가 집권 과정에서 드러난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의 위선, 독선, 무능, 부패, 그리고 非민주성이 박정희를 보는 기준을 달리하게 했다.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일의 북한도 상대적으로 박정희를 더욱 빛나게 했다. 한국의 가장 적절한 비교대상은 일본도 서구도 아닌 북한인 것이다. 북한보다 남한이 더 발전했다면 일단 성공한 것이 아닌가.
동구권의 붕괴와 중국의 성공, 그리고 많은 開途國이 박정희 모델로써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박정희의 세계사적 위치를 객관적으로 점찍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싱가포르의 李光耀도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를 등소평, 요시다(戰後의 일본 수상)와 함께 20세기 아시아의 3대 지도자로 꼽았다.
기자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거의 비슷한 변화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은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와의 대화이며 오늘과 내일을 비추어주는 역사의 힘일 것이다.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 http://www.chogabje.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