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로 쓴 ‘방독소감(訪獨所感)’

여동활 2014. 3. 19. 17:11

단독]박정희 대통령이 눈물로 쓴 ‘방독소감(訪獨所感)’

 


50년전 박정희 국빈방독 v 50년후 박근혜 국빈방독,,,!!



박근혜 대통령이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의 초청으로 3월 25~28일 독일을 국빈방문하는 것은 청와대가 발표한 방문목적과 의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꼭 반세기(50년)전 박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분의 감동적이고 역사적이었던 독일 국빈방문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5일후인 12월 21일, 우리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준
광부 247명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광복이후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극한적인 남북대치 상황에 처해있어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를 거쳐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자 바야흐로 지역과 세대와 빈부의 격차를 넘어 국가재건이라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한 야심찬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다.

 

반면에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폐허와 분단의 아픔을 딛고 20년이 채 안 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낸 자유세계의 모범국가가 되었으며, 미국 다음으로 부자나라였다.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지만, 분단국이라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독일은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독일 뤼브케 대통령은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에게 국빈방문해
주도록 초청했고,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을 최고의 예우로 맞았다.

이후 독일은 우리 경제발전의 믿음직한 후원자가 됐고, 독일의 발전을 몸소 체험한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을 위해 독일을 벤치마킹했다.

 

당시 국가홍보를 총괄하던 공보부는 박 대통령이 독일 국민방문을 마친 후 보름만인
1964년 12월 30일, 역사적인 방문 성과를 사진과 함께 상세히 담은 책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을 발간했다. 참고로 이 책은 한정판으로 1000부만 인쇄됐다.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 표지 (1964.12.30일 발간)

이하 전문을 소개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로 쓴 방독소감(訪獨所感)

 

Ⅰ)

 

19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독일연방공화국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나와 우리 일행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전후 부흥된 독일의 모습을 여러 모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실제로 독일에 체류한 시간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 본에서 3박 4일, 서베를린에서 2박 3일, 바바리아 주정부 소재지인 뮌헨에서 2박 3일뿐이었고, 여타시간은 왕복하는데 소비된 셈이다.

 

서독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면적은 우리 한반도의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약간 넓은 정도이고, 인구는 약 5,700만 명이다. 동독의 면적은 우리 남한 정도에 인구는 약 1,700만 명이다. 서독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900불, 연간수출고는 약 150억불, 현재 외환보유고는 60억불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전성시대는 히틀러 집권 당시라고 하는데, 전후 10년만인 1955년에 벌써 서독경제는 1935년 독일경제의 전성시대를 능가했다고 한다.

 

독일의 부흥상(復興相)은 과연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기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싫어하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후 독일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오늘날 그들의 부흥과 번영은 지난 20년 동안 그들의 근면, 그들의 검소, 그들의 인내심, 그들의 단결력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도시나 농촌을 지나 다녀도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라고는 노인들, 어린 아동들, 장보러 나온 가정의 주부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부가 일터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서독은 5,700만 명의 인구 중에서 노동력을 가진 인구가 2,5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해서 외국노동자 약 100만 명이 서독에 와서 일하고 있으나, 그래도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뤼브케 대통령을 보고 독일의 부흥상과 독일국민들의 근면성을 칭찬하였더니, 대통령이 말하기를 이제 좀 살기가 좋아지니, 배가 불러서 20년 전에 고생하던 일을 잊어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 독일의 번영과 부흥을 가져온 데에는 종전 후 ‘마셜 플랜’에 의한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은 점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외국의 원조를 얻어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근면과 내핍으로 오늘의 독일을 건설한 독일국민들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교훈으로 삼아야할 줄로 안다.

 

개인이나 국가가 그들의 자립능력이 부족할 때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남의 도움을 받는 자는 그 도움을 받아서 하루바삐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정신이 강렬해야만, 남이 도와준 것이 참다운 도움이 되는 것이고 도와준 보람도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정신이 결핍되어 있을 때에는 그들 스스로의 자립은커녕 오히려 남에게 의지하겠다는 의타심만을 조장해서 자립능력을 감퇴시키지 않을까 혼자서 곰곰이 생각도 해봤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보는 것, 듣는 것 하나하나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명심하고 배워야 할 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독일 주요언론들은 박대통령 방문과 한국에 대하여 대서특필했다.
▲ 독일 주요언론들은 박대통령 방문과 한국에 대하여 대서특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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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독일정부와 국민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과 한독양국의 협조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귀국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번에 우리 일행을 맞이한 독일정부나 국민들은 그야말로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다.

 

독일의 모든 언론기관도 우리 일행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해 주었다.

 

‘동방에서 온 벗’, ‘동방에서 온 손님’,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등등 우정에 넘치는 필치로써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독일의 조야인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토와 민족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분단된 고통을 다 같이 느끼고 다 같이 슬퍼한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역설했다. 또한 그들이 우리가 운명공동체이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무슨 일이든 도와야 된다고 진심으로 주장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와 같은 진실하고도 위대한 벗을 또 하나 가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 비극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우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해주고 동정하는 독일 민족에 대해 우리들은 혈육이 상통하는 것 같은 우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독일이 하나의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한국, 하나의 독일로 다시 통일되어야한다는 원칙에 합의했고, 양국의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유와 경제적인 번영이 선결과제라는 점에도 완전히 견해를 같이했다.

 

독일은 지금 그들 자신의 경제재건을 완수하고, 이제는 자유세계의 60여개 우방국가에 대해서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자유우방사이에 번영의 균형을 역설하면서, 선진 국가들은 후진성을 지닌 우방 국가들을 도와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 ‘문제는 원조 대상 국가들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 점은 뤼브케 대통령이나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도 똑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은 자립정신이 강하고,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겠다는 것이 독일정부의 기본 방침이라는 뜻으로 나는 듣고 있다.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한히 노력하고 있는 한국은 독일의 원조대상국가 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많은 나라라고 하면서도, 그들이 누차 강조하는 점은 한국국내 정치정세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독일에 도착하던 첫날인 12월 7일 저녁, 뤼브케 대통령부처가 주최한 만찬회가 개최되었다. 칠순의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학생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독일에서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일은 1919년, 즉 제1차 세계대전 바로 직후 함부르크에서 영국 군함이 독일 상선에 대해 불법적인 가해를 입혔을 때 단 한번 있었다.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정은 있었으나,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크게 말썽을 일으킨 일이 없었다.

 

정치란 것은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지극히 어려운 문제인데, 하물며 학생들이 정치의 제1선에 나와서 떠드는 일이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에르하르트 수상도 내가 초대한 만찬회 석상에서 뤼브케 대통령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누누이 역설했다. 우방국가의 노정치지도자들의 진정한 충고라고 생각되어 그대로 전달하고자한다.

베를린 공과대학을 시찰하는 박대통령 내외.
▲ 베를린 공과대학을 시찰하는 박대통령 내외.


이에 덧붙여서 그들 독일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힌 국민은 위대한 국민이 될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과거의 감정을 잊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대국적으로 미래를 내다볼 것을 역설한바 있다.

 

 

그들은 유럽의 안정이 아시아의 안정이며, 또한 아시아의 안정은 유럽의 안정임을 강조하면서, 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는 인접우방국가간의 유대를 더욱 강화해야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지적은 한일관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우방과의 협력문제에 관하여 보다 새로운 우리의 자세를 촉구하는 바가 크다고 나는 느꼈다.

이상은 독일정부나 국민들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솔직히 전달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처럼 국토분단의 공통 비극을 지닌 그들로서는, 우리의 국내문제가 안정되고 우리가 원조를 받을 태세가 완비된다면, 모든 면에서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있었다는 것을 나는 엿볼 수 있었다.

 

Ⅲ)

 

이제 독일 경제력의 일면(一面)을 보고 느낀 점을 간단히 추려보고자 한다. 여기서 일면이라고 한 것은 짧고 바쁜 여정이었으므로, 세세히 보지 못했고 또 세밀히 보았다 하더라도 그 일부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인내로 전쟁이 끝난 10년 후, 즉 1955년 벌써 전쟁전의 전성시대인 1935년대의 독일경제를 능가했던 것이다.

 

물론 전체규모로 보아서는 독일의 경제는 미국이나 소련에 비해 아직 미흡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분단된 반쪽 국토에서 60억불이라는 외화를 보유하고, 60여 개국에 원조를 제공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 그들의 상품이 세계 각지에서 가장 양질의 상품이요 신용 있는 상품으로서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오늘의 독일경제와 내일의 전망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멘스 공장을 시찰하는 박대통령 내외.
▲ 지멘스 공장을 시찰하는 박대통령 내외.


나는 이번 방문 기간 중 독일에서 유명한 몇 개 회사를 방문했다. 데마크, 지멘스, AEG 등 회사를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멘스 회사는 150년의 역사와 25만 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가졌고, AEG 회사는 2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이들 두 회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파괴된 것을 다시 완전히 복구하였다고 한다. 특히 지멘스 회사 본사는 서베를린 시내에 자리 잡고 있고, 베를린을 복구하는데 그들이 솔선해서 협력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국이 있어야 회사가 있고, 민족이 있어야 회사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기업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멘스 회사를 방문했을 때, 사장으로부터 손으로 돌리는 자그마한 전화기 모형 하나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물어본즉 150년 전 이 회사가 처음 창설될 때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문득 나는 150년 전, 1814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바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에 그들 조상은 벌써 산업혁명을 하고, 이런 공장을 세우고, 각종 기계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산업의 근대화를 위해서 유럽 각국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 조선 말엽 순조왕 시대에 양반들의 싸움은 고질이 되고, 조정에는 외척의 횡포가 극심했다. 관리들은 양민의 수탈에 혈안이 되고, 공직기강이 극도로 떨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서 어지럽기 한이 없었다. 그러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유럽 각국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가 그들보다 150년이나 뒤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150년이라는 낙후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몇 배 노력을 더 해야 하겠거늘, 과연 우리 국민들이 그러한 각오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모든 국민들이 독일의 부흥이 결코 기적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일대각성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 촉구하고자 한다.

AGE 공장을 시찰하는 박대통령.
▲ AGE 공장을 시찰하는 박대통령.

 

이들 회사를 방문하고 또 하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어느 회사고 회사 내에 직장교육을 하는 학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AEG 회사에서 그 교육상황을 보면, 15세부터 17-8세까지의 우리나라 초급중학교 정도를 졸업한 학생들이 3년간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완전히 숙련공을 양성하기 위한 실업교육으로서 학과보다 실습에 더욱 치중하고 있었다.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선반, 산소용접기 및 절단기로 철물을 깎는 일 등 공장에서 직공들이 일하는 것과 꼭 같은 실습이다.

 

그들이 작업하는 책상위에는 모두 작업일지를 비치하고 있고, 하루 작업을 마치면 교육생은 작업을 한 설계도와 작업 내용을 기록하고, 하단에는 교관의 평점과 확인서명을 한다. 또 교관의 서명 옆에는 가정에 돌아가서 학부형들이 확인했다는 서명난이 있다. 그야말로 깨끗이 알뜰하게 기록돼있다. 3년간 수료를 하면 숙련공으로 합격증을 받으며, 이 증서는 국가에서 인정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서 직업을 얻어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회사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양성한 숙련공만 해도 130만 명이라고 하니, 전국 각 회사에서 이같이 양성된 기술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독일인들은 전부가 일인일기(一人一技)를 가진 숙련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들의 공업이 발달하고, 산업이 부흥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의 방향을 다시 검토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통감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독일정부의 기술원조에 의해서 인천 인하공대 내에 직업학교가 하나있다. 독일기술자들이 와서 독일과 똑같은 교육을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이러한 학교가 많이 생기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데마크 공장을 시찰하는 박 대통령.
▲ 데마크 공장을 시찰하는 박 대통령.

 

나는 독일의 농촌 역시 도시 부럽지 않게 알뜰하게 꾸며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독일은 전인구의 단지 8-9%만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하니 고도로 공업이 발달된 그 나라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경작지, 목장, 임야가 확연히 구별되어 있고,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고 알뜰히 가꾸고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식량은 완전 자급자족이며, 채소, 육류 등 부식물은 일부 수입한다고 한다.

 

좁은 땅에 5,700만 명이란 인구가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얼마나 토지 이용도를 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토지도 우리가 잘 활용하면 아직도 얼마든지 이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농촌은 중소기업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게 하여 이를 발전시켜나가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농촌과 공업이 상호의존해서 함께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할 좋은 점이라고 보아야하겠다.

농촌의 어디를 가나 삼림이 울창하고, 그들 국민들이 나무를 애호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부럽게 느낀 점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독일 여자실업학교를 시찰하는 육영수 여사.
▲ 독일 여자실업학교를 시찰하는 육영수 여사.

 

Ⅳ)

 

독일의 국민성은 상술한 바와 같이 근면하고, 검소하며, 또한 법질서를 존중하고, 단결심이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또한 이론적이고,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라고도 하겠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해 높은 긍지를 갖고 있다.

 

기원후 9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내려온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는 게르만 민족의 역사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 일시적으로 유린당한 일이 있었으나, 그 후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독일제국은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세계의 최대강국으로 등장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재기한 독일은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음으로써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에는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로 재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로 칠전팔기라는 말은 독일국민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독일의 힘이 어디에서 원천했을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독일국민들의 불굴의 의지와 민족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와 같은 우수한 국민을 두 번이나 전쟁으로 이끌어간 당시의 지도자들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 사회와 경제상은 목불인견이었다고 한다. 전 생산시설은 완전히 파괴되고, 실업자와 전상군인들은 거리에 넘쳐흘렀다. 식량기근이 왔고,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이 겹쳐서 닥쳤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시 재기할 것을 결심했다.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고 비장한 결심으로 조국독일을 재건하기 위하여 또다시 단결하고 근면하고 내핍하고 건설하는데 총궐기했었다. 가정주부들은 스커트를 한 치씩 줄여서 입음으로써 천을 절약했다. 성냥 한 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세 사람이 모여야 담뱃불을 켰다.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결속해서 독일의 경제가 부흥될 때까지 노동쟁의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어떤 회사에서는 경영진이 노임을 인상하겠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공장이 더 건전하고 충실해질 때까지 임금인상을 하지 말아달라고 결의한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재건을 위한 그들의 모습의 한 단면을 소개하는 사례에 불과하다.

 

독일인들은 오늘과 같이 그들의 경제가 부흥되었음에도 먹는 음식은 극히 간소한 것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검소한 생활을 통해서 절약한 것은 저축해서 생산과 건설에 투자한다.

 

또한 그들은 독일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할 만한 문화재의 보호와 수리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본이라는 시에 있는 악성 베토벤의 주택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된 것을 모든 국민들이 몹시 애석히 여기고, 베토벤이 사용하던 피아노와 기타 가구들이 소진된 것을 무엇보다도 아깝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가 그 주택을 옛 모습과 똑같이 복원하였더니, 베토벤의 피아노와 가구 등 옛날 물건이 하나도 파손되거나 망실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이 그것들을 전부 소개시켜 소중히 보관하다가 그대로 다시 가져왔던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이며, 얼마나 자기나라의 문화재를 소중히 간직하는 착한 국민들인가! 독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이렇게 보존된다고 한다.

 

뮌헨에서도 옛 바바리아 왕궁이 많이 파괴된 것을 전후 수리해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파괴된 시가의 건물들도 본래의 모습대로 정성을 다해 복원되어 뮌헨은 일찍이 번영을 자랑하던 예술의 도시 뮌헨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뮌헨은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시이며, 800년 전부터 바바리아의 수도였다고 한다.

 

시내 중심지대에 높은 흑색 철제의 기념비가 서있는데, 모양은 미국의 워싱턴 시에 있는 워싱턴 기념비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훨씬 작은 흑색 기념비이다. 안내하는 바바리아 주정부 관리에게 물으니,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 지방을 점령했을 때 세운 전승기념비라고 한다. 독일을 침략한 적장의 기념비를 무엇 때문에 남겨 두냐고 물었더니, 그는 후손들이 저 기념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다시는 외적에게 침략을 당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산 교훈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몇 년 전에 덴마크를 방문하고 귀국한 모 인사에게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덴마크 사람들이 과거 독일 사람들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그 상처의 한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고 후손에게 그것을 산 교훈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독일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보다도 많은 전화를 입었음에도 수백 년씩이나 되는 유적들이 도처에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가장 부러운 일의 하나이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문화재들이 얼마나 남아 있고, 또 있는 그 자체의 보존 상태를 생각할 때 부끄럽기 한이 없다.

 

물론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 각자가 이것을 알뜰히 보존하겠다는 마음씨가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독일의 기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Bonn) 중심으로 흐르는 라인 강변에는 파란 잔디가 보이고, 강물은 1세기에 한 번 정도 밖에는 결빙하지 않는다니 우리나라보다는 약간 온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기는 매일 안개가 두텁게 끼어서 우리나라와 같은 청명한 날씨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러한 대자연은 독일인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이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경박하고 사치한 점을 찾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근엄하고 과묵하며 질박하고 강건한 점이라든가, 이론적이고 사색적인 그들의 기질의 특징도 그 나라의 자연적 조건에서 받은 것으로 느껴진다. 독일이 낳은 위대한 문호, 철학자, 예술가, 정치가, 군인 등 역사에서 배운 인물들을 상기해보고 독일의 대자연과 견주어 보기도 했다.

 

독일국민들은 또한 질서와 규율을 존중하는 좋은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국민성은 준법정신이라든가 사회공중도덕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거니와 일상생활면에서도 자율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의 집안 질부 벌되는 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금년 봄에 신병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모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병실에는 나의 질녀, 독일 부인, 각기 다른 유럽 국적의 부인 2명이 입원하고 있었다. 아침에 기상을 하니, 간호사가 와서 침상에서 일어나 간단한 보건체조를 하라고 지시하고, 다른 병실에 있는 환자에게 가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체조를 하라고 일러 놓고 갔다.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유럽 국적의 부인 2명은 침대에 누워버렸으나, 독일인 부인과 내 질녀는 간호사가 돌아올 때까지 체조를 했다. 체조를 끝낸 독일 부인은 체조를 하지 않고 침상에 누워있던 두 부인에게 왜 체조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보든 안 보든 체조를 하라고 했으니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표리가 부동하다는 데 분개를 한 모양이다. 이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훌륭한 점의 하나라고 느꼈다.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일수록 이와 같은 자율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본다.

 

법이 없으면 안하고, 법이 있어도 이것을 악용하거나 법망을 빠져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란 사고방식이 지양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사회가 이룩될 수 없지 않겠는가?

 

프랑크푸르트시 근교에는 노동자들이 저녁에 가서 술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우리나라의 대포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술집이 많다. 근면하고 일밖에 모르는 그들도 저녁에는 이곳에 많이 모여와서 술이 한 잔씩 들어가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껏 떠들고 밤이 늦도록 논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한 번도 그들이 서로 싸우거나 집기를 부수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간혹 그곳에 있는 우리 한국 학생들이 와서 놀다가 언쟁을 하거나 술잔을 던져서 부순 일이 몇 번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혼자 쓴 웃음을 지었다.

 

자율과 자제, 모든 일에 한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꼭 배워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고아원을 방문한 육영수 여사.
▲ 독일 고아원을 방문한 육영수 여사.

 

Ⅴ)

 

두서없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지기 때문에 서베를린을 시찰한 소감 몇 마디를 쓰고 매듭을 지을까 한다.

동서베를린을 합친 인구가 330만 명, 그중 서베를린의 인구가 220만 명이다. 자유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전보다 더 번화해졌다고 하는데, 현대도시로서 어느 도시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하고도 거대한 도시이다. 서베를린의 연간 예산이 10억불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1961년도 예산 3억 4천만 불(한화: 850억 원)에 비교하면 이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 동독의 한 복판에 붉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은 도시이지만, 오늘날 자유의 상징으로서 또한 자유세계인 마음속의 수도인 베를린을 방문한 감회는 자못 착잡했다.

동서베를린의 장벽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면서 건너편의 어두운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다보며, 우리나라의 휴전선과 판문점을 연상했다.

 

철조망 건너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동독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휴전선 북방에 살고 있는 우리 북한 동포를 생각했다. 일행은 모두 우울한 표정들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서베를린 시 직원들도 우리와 같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어두운 두 개의 세계가 나뉘어져 있었다.

서베를린에는 화려한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서서 동베를린을 위압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조망 부근에 있는 동베를린 쪽 건물은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벽돌로 폐쇄해버리고 서쪽을 보지 못하게 해 놓은 것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이 장벽이 철거되어 모든 독일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고,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도래할 것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그때는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니고, 실현될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다. 또한 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날이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전국민이 총력을 집중해야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다졌다.

 

서독과 자유 베를린은 그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받았다. 통독을 위한 독일 국민들의 염원은 열렬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표시를 적게 하고 인내하며 참고 있다. 그들은 아마 힘에 자신이 만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힘을 배양하는데 우리 국민 모두가 더욱 분발할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박 대통령 주최 만찬에 참석한 뤼브케 대통령 부부.
▲ 박 대통령 주최 만찬에 참석한 뤼브케 대통령 부부.

Ⅵ ) 

 

방독기간은 비록 짧았으나, 나와 우리 일행의 이번 기회에 느낀 점, 얻은 점은 대단히 많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득이라면 우리의 가장 성실한 벗을 또 하나 사귀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이라는 공동의 비극을 지닌 두 나라는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를 쌍방을 이해하고, 고무하고, 격려하고 우의를 돈독히 함으로써 앞으로 공통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 최대의 협조를 다짐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 다른 소득은 국토통일이라는 지상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부와 민간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오늘의 독일의 부흥을 가져온 그들의 재건상과 노력을 우리가 가서 직접 목격하고 배웠다는 것이다.

 

파산상태에 빠진 한 가정을 재건하는데도 전 가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장구한 시일과 노력을 경주해야만 이룩될 수 있겠거늘 하물며 한 민족국가의 재건을 이룩하자면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눈물 나는 노력 없이 안이한 방법으로 이룩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산 교훈을 우방 독일국민들로부터 배워야할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누가 없겠는가? 문제는 조국을 어떻게 사랑하고, 민족을 어떻게 위하는가 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애국애족이란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언행이 일치되어야하는 것이다. 말이 없으면, 행동만이라도 있어야 애국이 되는 것이다.

 

독일국민들처럼 치마를 한 치 줄여서 입고, 성냥개비를 하나 절약하는 것이 위대한 애국의 실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은 국가의 법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애국하는 모든 국민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스스로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 대한민국 2,700만 동포들의 힘을 합치면, 위대한 힘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독일의 부흥을 기적으로 보지 말고 5,700만 독일국민들의 단결된 힘이, 그들의 피와 땀의 대가가 오늘의 독일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 동포들이 명심해주기를 다시 한 번 호소한다.

 

끝으로 나와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준 독일정부와 국민들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