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건전재정포럼' 떴다! '박정희대통령 의 아이들' 그 노병(老兵)들의 귀환!

여동활 2012. 9. 28. 20:46

[박성현 칼럼] '건전재정포럼' 떴다! '박정희대통령의 아이들' 그 노병(老兵)들의 귀환!

암살 박정희대통령의 청사진 32년만에 완성됐지만

'정부주도'에서 '시장주도' 경제로!...박정희대통령의 위대한 유산은 바로 '안정화정책'

  • 최종편집 2012.09.28 15: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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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현 뉴데일리 논설위원/저술가의 다른
 

노병(老兵)들의 귀환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 살림을 책임져 왔던 원로 경제부처 거물 관료들이 정치권을 저울에 올렸다. 이 저울을 만드는 일에 언론계 거물들과 학계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9월 26일 프레스센터에서 무려 3시간 동안 진행된 ‘건전 재정 포럼’(대표 강봉균 전의원). 약 1백 50 여 개의 좌석이 꽉 찼다. 강경식, 강봉균, 진념, 이헌재, 전윤철 등 전직 부총리, 장관, 감사원장 등 경제관련 부서의 핵심 브레인을 했던 인물들이 기라성같이 모였다. 강봉균 대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지들!
우리는 나라살림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국방부 예산을 깎는다고 장군이 쳐들어와서 권총을 들이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꿋꿋하게 곳간에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의 균형을 맞춰 왔습니다.
동지들!
나라살림이 튼튼했기 때문에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을 조성해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세계 3대 신용평가 회사가 일제히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올린 것 역시 나라 살림이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전직 경제부처 태크너크랫들—특히 예산 기획 전문가들, 언론인들, 학계가 모였기 때문에 결코 녹록치 않다. 앞으로 여기에 청년세대 시민운동이 불붙게 된다면?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 어깨에 빚더미를 지우지 말라! 우리가 살 날은 앞으로 창창하다. 앞선 세대가 쌓아 놓은 빚더미에 깔려 죽고 싶지 않다!”


2012년 9월 26일—이날 대한민국의 정당과 정파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저울대에 올라섰다.

“당신은 나라살림을 거덜 내고 싶어? 아니면 지켜내고 싶어?”

이 엄혹한 질문에 대답해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이 저울이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일까? 아니다.

지난해 여름, 전교조 성향 교육감들이 “이건희 손자에게도 점심 밥을 공짜로 주어야 한다”라는 주장 아래 획일적 정부급식을 밀어붙이자 이에 반대하는 서울 시민의 자발적 반대운동이 있었다. 그 결과 주민투표가 벌어졌다.  “나쁜 선거이기 때문에 보이코트 해야 한다”라는 악질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려 2백 16만 명이 투표소를 찾았다. 27.7%의 투표율.

나는 그때 “ 2백 16만 표가 순교당한 거대한 표 무덤이 생겼다. 이 표 무덤에서 앞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부활되어 용솟음칠 것이다”라고 칼럼을 썼다.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90023

2012년 9월 26일은 그로부터 꼭 399일 되는 날이다. ‘건전재정포럼’은 바로 2백 16만 표무덤에서 솟구친 거대한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귀가 먹먹한 새된 소리로 모든 정당, 모든 대통령 후보에게 외치고 있다. 

“나라 살림을 거덜낼 거야?
아니면 지켜낼 거야? 선택해!
그러면 우리가 누구를 지지할지 선택하겠다!”


'건전재정포럼'은 이제까지 존재해온 크고 작은 ‘튼튼 나라살림 운동’(복지포퓰리즘 반대 운동)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대한민국 경제를 건설하고 운영했던 거물 테크너크랫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거기에 언론계와 학계가 결합했다. 앞으로 청년과 시민이 결합할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앞으로 2년—2014 지방선거—안에 한 지역구에 1 천 명, 전국적으로 25만명의 회원이 된다면?

도대체 이 테크너크랫들이 무슨 재주로 이런 거대한 시민 운동의 물고를 틀 수 있는지, 그 족보를 더듬어 보자.

                 문민 관료(civil service)의 정수(精髓)


강경식, 진념, 강봉균, 최종찬과 같은, 경제 및 금융계의 거물 원로 테크너크랫—이 노병들은 대한민국 문민 관료(civil service)의 핵심이었다.

원래 정수(精髓), 정화(精華)는 깊게 감춰져야 한다. 골수는 뼈 한 가운데에 들어 있고 뇌수는 단단한 해골 속에 감추어져 있고 척수는 척추 중앙부에 숨어있는 것 아닌가?

이들은, 대한민국의 숨겨진 힘, 숨겨져 있어야 하는 힘을 상징한다.

그런데 온 천지사방에, “마구잡이식 획일적 복지를 해야 한다”는 망조 들린 소리만 메아리 치는 흉악한 세월이 되자 이 노병 원로들까지 나선 것이다. 필자와 같은 장년층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원래, 필자 세대가 책임졌어야 할 일이다.

이 무서운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살만한 나라 중에 양적 팽창(QE, 정부가 돈을 왕창 푸는 것)을 하지 않으면서도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고용수준을 늘리고 성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독일, 둘 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나마 독일은 유로존의 볼모가 되어 있는 상태. 남유럽 위기가 장기화되면 독일 역시 멍이 들 수 밖에 없다.

비록 글로벌 경제공황의 영향 때문에 국민의 생활이 더없이 고달프고 팍팍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꿋꿋이 나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성취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 결과 우리는 최근에 신용등급이 급상승하고 있다. 신용등급이 올라가면 외국에 판 국채 혹은 회사채에 대해 물어야 할 이자가 급속히 줄어든다.
뿐만 아니다. 한류가 뜨고, 김기덕이 상을 받고, 싸이가 각광받는 것은 모두 국력 신장과 맞물려 있다.
‘코리아’
란 브랜드가 문화 부문에까지 아우라를 제공하는 것이다.

다시 경제 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양적 팽창을 하면 나중에 긴축재정 혹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지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다음 셋 중의 하나이다.


첫째 경우는 돈을 걷어들이는 ‘심판의 날’에 치르는 대가. 오늘 돈을 왕창 풀었으니까, 위기를 모면한 다음에 그 돈을 걷어들어야 할 것 아닌가? 긴축을 해야 하니까 경제가 위축된다.

둘째 경우는 돈을 걷지 않고 내깔겨 두었을 때 치르는 대가. 인플레이션이다. 부동산이 없는 사람,봉급으로 사는 사람이 직격탄을 맞는다.

셋째, 정부가 돈을 계속 푸는 정책에 맛을 들리면 마약중독 증상이 일어난다. 센 마약, 좀 더 센마약, 좀 좀 더 센 마약. 마침내 생리적 조절기능 자체가 마비된다. 그 결과 경기침체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된다.

장하준칼레츠키(조선일보가 띄워준 <자본주의4.0>의 저자)는 ‘마약장이’들이다. 그들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괜찮아!
정부가 지출을 왕창 늘려서 정부 역할을 키워야 돼!
이제 그런 시대가 된 거야!”

한마디로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자는 소리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정부 개입 확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나타난다. 이미 1970년대 후반에 겪었던 홍역이다. 이것 극복하느라고 엄청나게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마약을 끊기 위해선 지독한 금단현상을 겪어야 하듯,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선 허리띠를 왕창 졸라매고 단식하는 수 밖에 없다.

정부가 돈을 마구잡이로 푸는 것을 중지하면 금리가 하늘높이 치솟는다. 그래서 80년대 초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서 우량기업에 대한 금리가 한때 15% 안팎까지 갔었다. 요즘 가정주부가 급해서 쓰는 카드 현금대출 금리와 같은 수준.

'건전재정포럼'을 주도하고 있는 노병들은 이런 이치를 몸으로 겪고 아는 사람들이다.

■ 박정희 대통령 말기인 1978년 2차 오일쇼크 임시 수습
■  전두환 때의 ‘정부 기능 축소 및 시장 강화’(안정화 정책)
■  김영삼 때의 4대 개혁(WTO 가입, OECD 가입,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  김대중 때의 IMF 극복
■  노무현 때의 금융산업 육성 및 FTA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대한민국 문민 관료 시스템의 뇌수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의 족적을 알면 곧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시스템의 성숙과정을 알게 된다.


시스템을 만든 사람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포디즘(Fordism)—컨베이어 벨트와 표준 부품—을 만들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는 이미 시카고 도축/정육 공장에서 널리 쓰이던 기술이었다. 표준 부품(interchangeable parts)은 1860년대 남북전쟁 때 북군의 군수산업에서 개발된 방식이었다.

포드가 만든 것은 ‘대량생산 박리다매’라는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생산성을 높여서 대량으로 물건을 만들어 싸게 판다”라는 사업방식을 확립시킨 사람이 포드이다. 이를 위해 동원한 두 가지 기술 요소가 바로 컨베이어와 표준 부품이었을 뿐이다.

‘대량생산 박리다매’는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이는 일이지만 당시의 모든 첨단 사업가들은 독점 이익(monopoly profit)을 추구했었다. “물량 조절을 함으로써 상품 하나당 높은 이윤을 노리는 것”이 사업방식이었다.


박정희도 헨리 포드와 비슷하다. 그의 위대한 발명품은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이 아니라 ‘문민 관료 시스템’ ‘수출 공업화 노선’ 그 자체였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도로와 공장은 ‘물질’이다. 그러나 애국심과 프로패셔널리즘으로 무장된 '문민 관료 체제'와, ‘수출 공업화’라는 국가 발전 노선은 ‘정신의 힘’이다.

물질적 풍요를 창출하는 정신의 힘—이 분야에서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이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당시 주미 일본대사 키치사부로 노무라는 이렇게 말했다.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하는 나라와 전쟁을 벌여서는 이기기 어렵다.”

타이프라이터는 표준화의 상징이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문서를 만드는 것에서 행정표준화가 시작된다. 박정희 이전의 관공서에서는 미농지(얇고 질긴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썼다. 

박정희는 “행정표준화가 표준 문서에서 시작된다”라는 이치를 꿰뜷어 봤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동사무소까지 타자기와 복사기를 들여 놓았다. 당시엔 자동차가 귀해서 복사기를 지게에 실어 움직였다. 지금과 같은 일반용지(pp) 복사기가 아니라 사진 인화 때 사용하는 감광액이 발라진 특수 복사지를 사용했다. 대한민국 행정표준화는 지게로 시작된 것이다. 

또한 1963년에 고등고시를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로 나누어 대량으로 행정고시 채용 폭을 늘렸다 젊고 똑똑한 인재들을 체계적으로 문민 관료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행정고시를 통과한 문민관료 1세대가 바로 ‘건전 재정 포럼’의 주축 멤버들이다. 강경식, 진념, 강봉균, 최종찬,…. 이들이야말로 ‘박정희로부터 마인드와 일 처리 방식을 직접 전수받은’ 사람들이다.

물론 얼굴을 맞대고 전수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충직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겁없이 상상을 펼치고, 치밀하게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집요하게 계획을 실행하는 스타일(기풍)을 배운 것이다. 충직, 겁없음, 치밀, 과감, 집요가 이들의 문화 코드이다.

요즘의 야들야들한 웰빙 관료들에 비하면 그 정신의 강도와 척추뼈의 밀도가 비할 바 없이 높다. 이들이야말로 ‘박정희의 아이들’이다.  


문민 관료 시스템
과 더불어 박정희의 또다른 위대한 발명품인, ‘수출공업화 전략’ 대해 살펴 보자.

1960년대의 경제개발론에서는, 후진국 공업화 모델은 죄다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였었다. 수입 물품을 대체하는 공업화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미치광이 같은 발상’을 했다. 수출해서 팔아먹을 수 있는 물품을 만들어 공업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어떤 경제개발론에도 없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수출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우선 광부간호사—해외 파견 노동력부터 수출했다. 그리고 눈썹가발이 따라갔다. 요즘은 중국에서조차 이 물건들을 생산하지 않는다. ‘중국제 눈썹과 가발’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미얀마 북부에서 만드는 물건들이다. 그리고 피혁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그게 60년대 말부터의 일이다.

피혁에 대해서는 잠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오늘 삼성전자의 숨은 힘이 피혁 산업에서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 물론 삼성은 피혁제품을 생산한 적이 없다. 나는 제품이 아니라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혁은 원래 부티크 제품—반(半)수작업으로 소량 생산하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이 겁 없고 ‘무식한’ 한국인들이 피혁제품 생산 방식을 대량생산 프로세스로 바꾸어 버렸다.

“가죽제품이라고? 고상하게 부티크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웃기지 마! 조립라인 방식을 못 사용할 게 뭐 있어?"

한국인 특유의 응용력이다. 생산성이 급속히 높아졌다. 한국은 80년대 중반까지 거의 15년 이상 전세계 피혁 시장을 평정했다.

이게 삼성전자와 무슨 상관이냐고? 삼성전자 반도체는 ‘대량생산 프로세스 개선’에 있어서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피혁에 있어 부티크 방식을 조립라인 공정으로 바꾸었던 응용력이 똑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인의 이 같은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호소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If not feasible, then make it feasible!"

    - 박정희의 위대한 슬로건에 바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필자의 영역이다


박정희 최대의 유산


박정희 최대의 발명품이 고속도로 혹은 포항제철이 아니라 문민관료 시스템수출공업화 전략이었듯, 박정희 최대의 유산 역시 철강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한 장의 청사진이었다.

암살당하던 1979년에 만들어진 안정화 정책.
정부 주도형 경제시장 주도형 경제로 바꾸는 야심찬 계획이다.

스승이 누리는 최대의 행복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보는 것이다. 부모가 누리는 최대의 행복은 자식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박정희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뽑아서 조련시킨 ‘박정희의 아이들’이 박정희가 만든 ‘정부 주도형 경제’를 넘어선 청사진—안정화 정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1979년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는 강경식. 그의 오른팔인 김재익(아웅산에서 순국)은 예산기획국장. 40대 엘리트 관료들이었던 이 두 사람이 안정화 정책을 입안했다. 그리고 경제기획원의 수장 신현확을 설득했다.

마침내 조용하지만, 매우 중요한 노선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 경제사는 이 노선 투쟁을, 정부 주도형 경제를 주장해온 서강학파(수장 남덕우 총리)와 안정화론자(신현확, 강경식, 김재익) 사이의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암살되던 해인 1979년에 안정화 정책을 선택한다. 그리고 미처 실행하지 못 한 채 이승을 떠났다.

박정희는 정치에 있어 문민 정부로의 이행을 실현하지 못 했지만 이보다 더 큰 이행을 준비했던 것이다.

정부의 경제 권력을 해체하고 시장 자율기능으로 이양하는 것!

어찌 보면 이는 다른 권력자로 권력을 이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훨씬 더 위대한 자기 희생, 자기 해체이다.


시장의 자율 기능이 작동하는 나라, 그래서 ‘먹고 살만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민주화되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시장을 우뚝 세우고자는 청사진에 결재 도장을 찍은 것이다.

‘안정, 자율, 개방’이 그 당시의 핵심 컨셉이었다.

‘안정’은 정부가 함부로 산업에 끼어들어 돈을 쏟아 붇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은 시장 가격의 형성과 수요-공급 원리의 작동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개방’은 환율과 외환 분배를 시장 기능에 맡기고 수입 장벽을 낮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안정, 자율, 개방’이라는 당시의 키워드는 모두 시장 기능의 강화를 가리킨다. ‘안정화 정책’이라 불린 청사진의 이면에는 이렇게 큼직하게 찍혀있다.

“번영한 시장경제는 필연적으로 민주 사회가 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경제학자 프리드만(Friedmann)의 이야기였다.


충실한 ‘박정희의 아이들’


흔히 전두환의 경제 과외 교사는 김재익이라고 한다. 과외교사 김재익은 정말 널널한 과외를 했다. 김재익, 강경식 같은 ‘박정희의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두환은 어차피 복잡한 논리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직관적 깨달음으로 정확하게 인도하면 된다.

그래서 전두환이 깨우친 레슨은 단 한 문장, 44글자 밖에 없다.

“문민관료들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께서 최종 결정하신 시장 이행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도록 보장해 준다."


김재익이 경제수석을 맡고 강경식이 경제기획부(EPB)와 재무부를 코디했다.

안정화정책(시장 이행정책)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1985경부터 대한민국 경제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달러가 쌓여서 소비재와 농산물 수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나나는 ‘있는 집 아이들도 1년에 한 두 번 먹을까 말까 한 별식’에서 ‘흔해빠진 음식’이 되었고 밥상에 닭고기와 돼지고기가 빈번히 오르기 시작했다. 풍요가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회가 넉넉해지자 정치도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김일성주의로 무장한 급진 청년 학생운동이 (역설적으로, 의도와는 달리) 민주화를 위한 ‘창날’(spear head)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방화범으로 몰린 소방수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권리 주장과 시위가 터져 나왔다. 생산성 상승분을 초과하는 급격한 임금상승이 일어났다. 대한민국과 같이 세계시장과 합일체를 이룬 경제는, 생산성 상승을 초과해서 소비(임금)가 상승하면 바로 경상수지 적자로 나타난다. 이게 바로 1997년 12월에 IMF 파국을 불러온 구조적 원인이다.

그러나 현실은 구조적 원인만 가지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구체적 계기가 존재해야 한다. 

1997년 초, 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김영삼 정부는 1997년 3월, 명의(名醫) 강경식을 재정경제원(지금이 기획재정부) 수장(부총리)로 앉힌다. 소방수로 부른 것이다.

당시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던 기아자동차였다. 기아자동차가 부도나면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미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미 자율 기능에 의해 돌아가기 시작한지 10년이 넘은 경제에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임자를 찾아서 M&A를 하도록 유도하는 길 밖에 없었다. 강경식은 자동차 산업 진출을 검토하던 삼성에 의한 인수를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기아차 오너 김선홍은 야당의 실세 김원기 당시 의원과 동서지간이었고  DJ 진영과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기아차 오너 측은 기업 문제를 정치화시키기 시작했다. 오너, 민주당, 언론은 “삼성의 음모” “전라도 기업 죽이기”라고 공격하기 시작했고, 기아자동차의 노조 역시 이 같은 정치 권력 놀음에 편을 들었다.

위기에 몰린 기업의 인수합병(M&A)이라는 ‘기업 이슈’가 대선(1997년 12월) 용 ‘선거용 투쟁 이슈’로 변질되고 말았다. 드디어 1997년 10월 기아차는 부도가 났다.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부도유예 처분을 받았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라도, 또한 대선에서 영호남 구분을 위해서라도, 기아차는 더욱 더 극적인 정치 이슈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냉정하게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 ‘호남 기업 죽이기’ 혹은 ‘삼성의 음모’라는 선동에 묻혀 마비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기아 이슈가 정치화되자 국제 금융계는 대한민국 경제 시스템 전체를 매우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 종합금융사와 같이 엄청난 외화 부채를 걸머지고 있는 금융기관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경상수지는 이미 몇 년째 적자였다. 언론은 외환위기 파멸이 코 앞으로 닥쳤다고 맹렬히 경고 씨그널을 보냈다. 삐..삐..삐…삐..삐...

그럼에도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여전히 ‘삼성 음모’ ‘호남 기업 죽이기’ 타령만 떠들었다. 외환위기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며 한국 경제를 덮치기 시작했다.

한편 강경식은 문턱이 닳아지도록 IMF를 드나들며 구제금융신청을 피하기 위한 패키지를 짜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가 숨가쁜 시절이었다.

강경식은 일찍이 1990년대 전반기부터, 자신이 이끌던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이 검토해 오고 있던 ‘금융개혁법’을 IMF에 제시했다. 금융시장의 개혁 개방이 그 골자였다. IMF로부터 지원을 받되 파국적 추락(hard landing)이 아니라 스무스한 연착륙(soft landing)을 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금융 자율화를 하는 대신에 구제금융신청을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방식. .

그러나 아뿔싸!

이 금융개혁법안을 낙태시킨 것은 여의도였다. 민주당의 기세 등등한 공격에 놀란 웰빙 신한국당 의원들은 법안을 상정시키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

이 비겁한 행태의 핵심에는 이회창 측김대중 측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오로지 대선에만 골몰했기 때문에 이렇게들 계산했을 것이다.

“파국이 오면 어때? 누구한테 더 유리할까? 나한테 불리할 것은 없잖아?"

신한국당은 금융개혁법안을 유산시켜 버렸다. 본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IMF로 가는 고속도로—구조적 원인은 민주화 및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에 따른 급격한 소비수준의 상승에 의한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였다.

IMF로 가는 자동차는 기아자동차—기아 부도 사태—였다.

만취 상태에서 그 차를 몰은 사람은 기아차 오너였다. 그는 기아자동차 경영 문제를 ‘영호남 대선 이슈’로 만들어 어떻게든 기업을 틀어쥐려고 시도했다고 추정된다.


“기아차를 대선 이슈로 만든다”라는 전략을 민주당과 DJ가 낼름 받아들였고, 신한국당의 이회창도 이에 눈감았다. 기아자동차를 기업 이슈가 아니라 정치이슈로 만들어서, 지역 대결구도를 강화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삼성 음모 분쇄!’ ‘호남 기업 사수!;’라는 식의 구호가 난무했다. 그에 반발해서 영남표, 신한국표가 결집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권당인 웰빙 신한국당은 기아자동차 마비 사태가 몰고 온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금융개혁법 통과—를 스스로 내다 버린 셈이다.

대선 후보 이회창이 뜨듯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법사위원장인 최병렬이 이 카드를 휴지통에 내다버렸다. 집권당으로서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었던 비열한 작태였다. 이 같은 신한국당의 국정 배임행위를 막을 수 있던 유일한 사람—법사위원장 최병렬은 자신의 임무를 배신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별칭 처럼 최틀러가 아니라 배임자, 탈영병일 뿐이다. 그 결과 IMF 파국이 왔고 경제주권을 IMF가 가져가게 된다.


기아자동차 부도에서 IMF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대선 정국의 여의도 정치판 여야가 함께 벌인 완벽한 공동범죄였다.

이런 식으로, 여야 모두 힘을 합쳐 저지른 공동범죄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희생양을 조작하기 쉽다. DJ 정부는 재빨리 두 명의 희생양을 만들었다. 주범 강경식. 종범 김인호(당시 경제수석. 경제기획원 출신). 

죄목은 “대통령에게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의 업무를 망친 것”.

강경식을 소방수로 불러들여 놓고 방화범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 경제 전체를 불태운 초대형 방화사건이라서 덤으로 김영삼의 경제수석비서인 김인호까지 한꺼번에 종범으로 몰렸다.

DJ 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 임창렬이 입 큰 개구리(나팔수) 역할을 했다. “강경식! 저 사람이 나쁜 놈이에요! 저 사람이 IMF를 초래했어요!”라고 개골개골 엄청 시끄럽게 거짓말을 짖었다. 강경식(그리고 김인호)을 법정으로 끌고 간 마녀사냥은 결국 무죄가 되어 실패했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IMF = 김영삼= 강경식’이라는 거짓말이 각인되었다.


안정화 정책의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했던 천하의 명의(名醫) 강경식은 오욕을 뒤집어 쓴 채 1997년 쓸쓸히 공직을 마감하게 된다. 소방수가 방화범 누명을 쓰고 세상 밖으로 추방된 것이다.


‘방화범’이 준비해 놓았던 또 다른 소방수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금융 테크너크랫들, 특히 ‘박정희의 아이들’은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강경식은 1997년에 오욕을 뒤집어 쓰기 10년 전부터 야인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끈끈하게 경제/금융 테크너크랫들의 네트워크를 유지해왔다. 국가경영전략연구소(NSI)라는 ‘거창한 이름의’—그러나 실은 매우 단촐한 사랑방이 그것이었다. 사당동 이수역(당시는 ‘총신대역’이라고 불렀다) 부근에 있었다.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전두환 시절 말기에 강경식은 금융실명제를 밀어 붙이다가 옷을 벗었다. 루머에 의하면 당시 실세였던 H가 강경식(당시 재무부 장관)에게 권총을 들이댔다고 한다.

그 후 YS가 경제부총리로 그를 영입하기까지 약 10년 동안 강경식은 야인으로 지내면서 사당동에서, 위에서 언급한 사랑방을 운영했다. 이곳이 중심이 되어 전현직 경제/금융 테크너크랫과 대학교수들이 끊임없이 ‘아무도 경청해 주지 않는’—그러나 매우 의미심장한 개혁 개방 정책에 관한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아이러니다. IMF가 터지고 동원된 구원투수들은 대부분 사당동 사랑방에서 강경식과 함께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던 사람들이다. 진념, 강봉균, 최종찬….

권력을 어느 정당이 잡든 오직 경제/재정/금융 부문의 책임 테크너크랫으로서 해야 할 일에 관해 바삭하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한미FTA의 경우, 이미 1992년에 발간되었던 <국정과제 24>란 책에 언급되어 있다.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이루어진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한미FTA 합의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으로 결정한 ‘안정화 정책’의 궁극적 종착점이다. 

작년 말에 한미FTA가 통과됨으로써 ‘안정화 정책’이라 불린 청사진은 32년 만에 지금 우리가 보는 대한민국 경제로 일단 완성되었다.

‘박정희의 아이들’은 전현직 테크너크랫으로서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보스이자 스승인 박정희 생전에 안정화 정책을 만들었고, 그의 죽음 이후 32년에 걸쳐 이를 꽃피우도록 만들었다.

그, 성과가 바로 지금 글로벌 공황 속에서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한국 경제의 막강 체질. 이제 대부분 70을 넘긴 ‘늙어 버린 [박정희의 아이들]’(이 중에서 강경식이 가장 연배가 높다. 1936년생)은 이제 편히 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박정희의 아이들’이 시민 사회의 노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큰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 정치판이 이상야릇하게 변해서 새누리든 야권이든 온통 복지타령 뿐이다. 특히 요즘 새누리의 행태는 1997년 IMF 파국을 자초했던 신한국의 썩은 정신머리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 하지 않다. 민통당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고. 안철수는? 여전히 애매모호 안개 속에 있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

그래서 원래 우아하게 쉬고 있어야 할 원로 경제/금융 테크너크랫들이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번에는 시민으로서! 동료 시민인 언론인들, 교수들과 함께. 앞서 언급한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과 재정학회가 손을 잡고 '건전재정포럼'을 띄운 것이다. 앞으로 ‘건전재정 지킴이 시민 운동 네트워크’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폭도의 광기를 앞세워서, 사회 전체에 대고 이렇게 으르렁 거렸다.

“너, 날 어떻게 생각해?”
What do you think of me?



2012년 건전재정포럼은, 나라 곳간을 거덜내는 복지-만능 풍조에 대고 이렇게 으르렁 거린다.

‘너, 날 어떻게 생각해?” What do you think of me?



세 명의 주요 대선 후보, 그리고 그들 각각이 대표하는 진영은 지금의 이 흐름을 곰곰히 봐두어야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테크너크랫들과, (지난해 8.24 주민투표에서 순교당한) 2백 16만 표무덤에서 분출되는 에너지가 결합한 흐름이다.

정책의 방향은 당신들 마음대로 선택하라. 그러나 당신들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될 지는 우리가 선택한다. 당신들은 선택의 대상일 뿐이다. 칼자루는 우리, 시민이 쥐고 있거든!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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