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갑식 선임기자
60년 전, 1951년 8월 한국 해병대는 강원도 홍천에 있었다. 상륙부대가 산악전에 투입된 것은 양구 '도솔산(1148m)의 비극' 때문이었다. 거기서 미 해병 1사단이 인민군 정예 12·32사단에게 궤멸적 타격을 당했다. 반격에 나선 한국 해병 1연대가 1951년 6월 4일부터 17일까지 인민군 2000명을 사살했다. 그 후 주둔지를 홍천으로 옮겼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왔다. 명목은 격려였지만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밴 플리트 UN군 사령관에게 말했다.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탈환한 자랑스러운 한·미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을 지키게 하시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습네다." 당시 전시작전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노(老)대통령이 딴청을 부린 이유가 있었다.
두 차례 서울을 적에게 내주었던 이승만은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처럼 역사에 기록되는 걸 겁냈다. 다행히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받들던 밴 플리트가 있었기에 한·미 해병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1952년 3월 17일이었다.
이승만의 예감은 정확했다. 중공군사령관 팽덕회는 휴전회담장으로 서울을 점찍고 있었다. 그가 정예 19병단 예하 193·194·195사단과 제8포병사단 등 4만2000명을 개성에 배치한 데는 그런 흑심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 맞선 한국 해병은 5500명에 불과했다. 숫자만 8대1로 불리한 게 아니었다. 중공군은 덕물산(288m)·군장산(213m)·천덕산(203m)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군은 도라산(155m)을 제외한 개활지에서 위를 보며 싸워야 했다.
1952년 추석 전야(前夜)의 1차 추계공세 때 사천강 전초진지를 빼앗긴 김용호 소대장은 자결하며 유서를 남겼다. "부하들을 다 잃어버린 죄책감에 그들이 잠든 고지 위에서 죽음을 같이하여 속죄합니다." 김용호 소위의 3형제는 모두 전장(戰場)에서 산화했다. 군에서 경북 영천에 사는 그의 부친에게 조위금을 전달하려 했지만 두부 배달을 하던 아버지는 거절했다. '자식들 목숨 값을 받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분개한 한국 해병은 10월 31일부터 벌어진 중공군 2차 추계공세에서 대승했다. 1953년 7월 27일까지 거기서 한국 해병 776명이 전사하고 3214명이 중상을 입었다. 중공군은 1만4017명이 죽고 1만1011명이 다치는 참패를 맛봐야 했다.
이 대첩을 기리려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파로비(破虜碑)가 2008년 10월 28일 세워졌다. 당시 친북(親北)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2007년 추진된 일이 1년 넘게 미뤄진 것이다. 그렇게 충혼(忠魂)들을 위로할 비석 하나 세우는 게 힘들었다.
볕 좋은 가을 하늘을 보며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말했다. "우리는 서울을 이렇게 지켰습니다." 떠난 전우(戰友)가 떠오르는 듯 여든여섯 노병(老兵)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런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자유가 있어야 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넘어갈지도 모를 서울을 왜 그렇게…" 노병은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