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박정희와 동명목재.
1) 일터에서 겪었던 일
1960년대 말 이 곳 부산지역에는 '東明木材'라는 굴지의 기업이 있었다.
해방후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한국인 종업원 '강석진'이라는 청년에게 넘겨 준 조그마한 목재소..,
일본인 눈에 성실하게 비쳤던 청년 '강석진'에게 물려주어 가내공업식의 합판(合板)을 제조하고
6.25전쟁 중에 미군납을 하게 되어 점점 사세가 확장되기 시작해서...
1970년대 초에는 인천의 대성목재를 제치고 수 년간 수출의 날에는 금탑산업훈장을 타기도 하고
당시 미국의 '이동주택' 붐을 타고 호황을 누려 주 수출거래선인 Evans라는 회사는 '동명목재'가 만들어
공급한 합판으로 재미를 본 탓에 최고의 목재로 평가되는 티크(Teak)로 만든 욧트를
강 사장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516군사혁명 전후로, 군재직시 청렴성을 인정받아 부산지역
군최고위직인 '군수사령관'에 재임하였던 박정희 소장은 주말이면 그의 군사혁명의 웅지를 이 욧트를 타고
키우기도 했다고 할 정도로 강석진 사장과는 돈독한 유대를 쌓기도 했던 것이다.
지속적인 합판의 대미수출 증가로 사세가 확장되면서 동명목재도 부를 축적하게 되고,
수입목재의 보관(저목장)과 공장확장을 위해 '부산진구 용당동' 일대와 '신선대(神仙臺,부산의 6대중
하나)'부근을 매입하여 바다를 매립하고, 방파제를 축조하면서,공장을 현대식으로 지어서
당시 국내기업 최대규모의 종업원 수, 수출실적 등으로 외화획득에 매진하던 박정희 정부의
큰 원동력이 되어 대통령으로부터 더욱 신임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명산업(고무벨트나 페인트), 동명중공업(유압기기 및 선박의 조타장치와 지게차 생산) 등으로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일역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경북 청도가 본적이었던 강석진 사장은 그의 성공을 기리기 위한
개인적 욕심에서 용당동 일대의 야산과 부지를 매입하여 본적지에 있던 조상의 묘를 이장(移葬)하기 위해서
많은 사비를 들여 당시 최고 수준의 석공이나 중장비를 투입하여 산을 깍아 매립하고,
그 산에는 불원을 조성하기 위해 석물(石物)을 만들고 절을 세우고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주간한국'이 이를 특종기사로 파헤쳐 강 사장의 호화분묘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종래에는 박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당시 동명목재의 종업원은 약 6,00여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주야 2교대로 24시간 풀가동 체제로 합판을 만들기가 바쁘게 선적해야 할 정도로 호황이어서
부산지방에서 동명목재와 거래 하는 업체는 모두가 현금거래를 하고 동명목재는
어음거래를 하지 않는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강석진 사장은 박 대통령이 군수사령관으로 재직할 때의 친분 으로 인해,
그리고 국내최대 수출기업의 공로로 청와대를 '무상출입'할 정도로 대통령의 신뢰를 받던 분이었는 데,
이 사건으로 인해 박 대통령에게 불려가서 엄한 힐책을 받게 되었다.
"왜 종업원을 혹사시키면서 그들의 복지를 위한 기숙사를 짓고
장학금을 주고 하는 데는 소홀하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느냐?
그래선 안된다!" 라고 강사장을 탓하니...
강 사장이 답하기를,
"각하 저가 17살에 부모님 슬하를 떠나 일본인들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 나이(당시 60대 중반?)에 돈을 벌게되니
마지막으로 가난하게 살다 세상을 뜬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길인줄 알고 그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고,
"앞으로 종업원들을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박 대통령의 분노를 어느 정도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이후 확실한 시기를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舊부산시청앞 광장에서 부산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어
그 집회를 마치고 숙소인 해운대의 극동호텔(당시 유일한 고급호텔)로 가기 위해서 승용차를 타게 되었는 데,
이때 이용한 자동차가 시장(김대만) 전용차가 아닌 벤즈600이라는 신형 고급차여서
(중국의 모택동, 한진 조중훈 등 아시아에서는 몇 안되는 사람만 구입한 것으로 알려짐)
차중에서 박 대통령은 "이 차가 누구차냐?"고 묻게 되었다.
김 시장은 " 아~ 네, 동명의 강 영감님의 차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아~그래?....강 사장이 이런 좋은차를 타..??!!으음~"하고 낮은 신음을 내고는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당시 승용차 전용기사의 증언)
이 두 사건을 계기로, 동명목재의 강석진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그가 동명학원(후일 동원재단:고등학교, 전문대학 설립 등)을 세우고,
동명불원을 조성 후 부산시에 헌납하고 했으나...
함께 온 목재산업의 사양화, 동명산업의 부실, 동명중공업의 과대투자 등으로 사세가 기울고,
5공시절에는 모든 재산을 환수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전태일'사건이나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많았지만,
강석진 사장의 예나, 한일합섭의 김택수씨 일가의 문제 그리고
민주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의 부정축재 척결 등에서 매우 단호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진면모를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을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는 강석진 사장과 얽힌 위의 일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진면모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그 동명목재의 남여 종업원 6,000여명의 일원으로
손발이 부러트도록 산업현장에서 일했던 공돌이의 한 사람이었기에 옛일을 기억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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