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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인사들이 본 박정희대통령

여동활 2009. 11. 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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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대한민국 박정희’
외국인들은 세계 최빈국을 경제강국으로 끌어올린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한국을, 그리고 한국에 박정희기념관이나 동상 등 국가기념물이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2009-11-23

한류(韓流)는 아시아 일원에 유행하는 한국문화의 인기현상이다. 이같은 문화의 힘을 뒷받침하는 것은 정치사회적, 경제적 선망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국가 위상이다. 
지구촌을 누비는 한국 상품과 한국인의 이미지를 뭉뚱그려 외국인들은 대한민국 하면 무엇을 머리에 떠올릴까. 한국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지구촌을 향해 한국과 한국인을 이끌고 선두를 독보(獨步)하는 인물이 있다.
재임기간 5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49개국을 순방,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다 해외여행 기록을 갖고 있는 노무현은 봉하마을을 방문한 김형아 교수(호주 국립대)에게 “외국에 돌아다녀 보니 외국 지도자들이 온통 박정희 얘기뿐이더라”고 고백한 바 있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지도자 박정희는 서거 30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로 국가 위상과 국익(國益)의 선두에 위치하고 있다.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국민여론은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선 그를 음해하는 반대세력, 실패의 역사로 용도폐기된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시대착오적인 분열세력의 준동이 멈추지 않고 있다.
당연히 많은 외국인들은 불과 반세기 전의 세계 최빈국을 경제강국으로 끌어올린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한국을, 그리고 한국에 박정희기념관이나 동상 등 국가기념물이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박정희’에 대한 연구는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활발한 편이고, 적지 않은 외국 국가원수와 전문가들이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평가해왔다. 그것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밖에서 본 ‘대한민국
정희’, 언론에 보도된 외국인들의 ‘박정희 평가’를 발췌 수록해 보았다. / 편집자 주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검약하고 정직했다


▲카터 에커트(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장ㆍ역사학자)

-박사께서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저서를 집필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동기라도 있으신지요.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부패가 그 시절부터 본격화 됐는데도 그가 (금전면에서) 매우 자신에 엄격했고 검약했으며 정직했다는 면에서 후임자인 全ㆍ盧씨와 달랐다는 점입니다. 정부와 기업의 돈을 모두 국가의 경제발전에 쏟아 넣었을 뿐 개인의 치부로 악용하지 않았고 이 사실은 지금 그의 유족들의 생활을 통해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박정희씨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가 고개를 드는 건 바로 이 점 때문으로 봅니다. 한국 국민들이 명확한 권위나 비전,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국가 지도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도 이런 노스탤지어 탓이라고 봅니다.” / 문화일보 1997-11-01


박 대통령이 옳았다


▲키신저(전 미 국무장관).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8년 9월 4일 김종필 총리를 예방한 모습. ⓒ e영상역사관
 
김종필 총리는 (1999년 10월) 21일 오후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을 화두로 얘기를 나눴는데 김 총리는 “자유를 좀 누르더라도 경제를 회생시켜야 한다고 봤던 박 대통령의 생각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했었다.
키신저 박사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러시아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대답을 했다. / 국민일보 1999-10-23


한국의 대단한 인물을 만나보라


▲허만 칸(미 허드슨연구소장). 1979년 4월 17일 한국무역협회 초청 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 한국무역협회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 수상은 기개가 높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과는 은근한 경쟁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앞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비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듯했다. 우리 외무부가 리콴유 수상을 초청하려 외교 경로를 통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보류되곤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었다.
리콴유 수상은 미국의 공공정책과 국제관계를 주로 연구하는 허드슨연구소 소장 허만 칸으로부터 싱가포르의 경제, 사회발전에 관한 많은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허만 칸이 리콴유 수상에게 “당신이야말로 한국의 박정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보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나면 서로 의기투합할 것”이라고 권했던 것이다. 허만 칸의 권유에 리콴유 수상은 한국 방문을 수락하게 됐다. / 월간조선 1999년 9월호


박정희 전기 애독하는 대통령


▲카리모프(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방한 중이던 2006년 3월 30일 서울시청을 방문한 카리모프 대통령. ⓒ e영상역사관

최영하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는 한국이 우즈벡의 최고 경제파트너라고 말했다.
최 대사는 “우즈벡이 서방세계와 가까워지려고 하나 서방세계가 아직 우즈벡의 권위적인 정치체제 등의 이유로 일정 거리를 두고 있어 한국,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며 “일본보다는 한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한국은 우즈벡에 12억달러를 투자한 최대 투자국이다”라고 말했다.
최영하 대사는 “카리모프 대통령이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중요시하고 있다”며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를 많이 읽으며 박정희식 발전 모델을 참고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영남일보 1999-12-18


한국의 발전모델 전수해 달라


▲장쩌민(중국 국가주석). 1997년 11월 25일 캐나다 벤쿠버에서의 한중정상회담 모습. ⓒ e영상역사관

황병태 경산대 총장(69)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인기있는 인물이다. 1993년 4월부터 95년 12월까지 2대 주중대사를 역임한 그는 7년 세월이 지난 요즘도 중국정부가 안부를 물어오고 환대할 만큼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그가 중국에서 이임할 때 전례없이 석별의 정을 읊은 ‘早發白帝城’이란 이백의 시를 친필로 써주며 각별한 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2002년) 7월 22일부터 29일까지 그를 잊지 않고 공식초청해 국빈에 버금가는 환대를 했다.
중국에서 그렇게 인기있는 비결을 물었다.
“아마도 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험한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노하우를 아주 성심성의껏 중국측에 전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국은 한국경제의 성공 배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쩌민 주석 등 고위관계자들이 주중대사 시절 저만 보면 장관들 토론회나 전인대회에서 한국경제개발의 노하우를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장쩌민 전 주석은 당시 황병태 주중대사에게 새마을운동과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 등 한국의 발전모델을 전수해줄 것을 특별히 요청했고, 각 성장(省長)과 인민대표들에게도 황대사의 특별교육을 받도록 지시했다. / 영남일보 2002-08-22


미소 속에 비친 고독
 


▲후쿠다 쓰네아리(일본 문예평론가). 1978년 10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이 후쿠다 쓰네아리를 접견하는 모습. ⓒ 국가기록원 

박정희 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일 북이 쳐내려 온다면 나는 한 발자국도 서울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선두에 서서 죽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런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 박 대통령이 전사한다면 전군의 사기가 문제될 것이다.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대통령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는 편이 국민의 전의를 더욱 강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미소 속에 그분의 고독을 간취했다. / 뉴스앤뉴스 2005-02-10


베트남엔 박정희 같은 영웅이 없어서…


▲동티모르에서 만난 베트남 언론인

필자(최삼봉ㆍ국제정치 평론가)는 1999년 8월 말,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UNAMET(유엔동티모르선거지원단) 본부에서 베트남 언론인 A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통일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 군인이었다고 운을 뗐다.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베트남전에는 한국도 군대를 보낸 처지 아닌가. 그는 자신도 한국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고 말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박정희를 존경한다. 현재 베트남과 한국이 왜 국력 차이가 나는 줄 아는가. 베트남에는 박정희 같은 건설영웅이 없었다. 베트남이 한국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프랑스와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승리했고 세계최강국 미국과도 싸워 이겼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통일까지 이루었다. 그런 베트남이 왜 한국보다 뒤처지는가?”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언론인 입에서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듣다니?
“한국이 국산소총, 국산 탱크, 박격포, 미사일을 개발하며 1970년대에 자주국방을 추진한 것이 누구 덕인지 아는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면서 미국에 애걸 반 협박 반으로 얻어낸 것이다. 베트남 처지에서는 그는 침략 군대를 보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건설영웅이 베트남에 있었다면 현재 같은 후진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뉴라이트 2005-07-04


박정희 리더십과 개발모델 필요



▲잔라빈 차츠랄트(전 몽골 총리)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은 몽골의 엘리트들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많은 몽골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개발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한국은 박 전 대통령의 지도 아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 안정은 필수적 요건이지만 현재 몽골은 강력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다. 특히 몽골 공무원들의 부패ㆍ부정은 심각하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에는 박정희식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헤럴드경제 2005-11-02


부패하지 않은 박정희, 진정으로 국력 키웠다


▲브루스 커밍스(미 시카고대 교수ㆍ역사학)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그는 소농 출신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신분상승을 위해 일본 군인이 됐었다. 그의 인권탄압이나 독재정권은 인정할 수 없지만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부패하지도 않았다. / 문화일보 2006-08-14


박정희가 없었으면 오늘의 한국은 없다



▲에즈라 보겔(미 하버드대 교수ㆍ사회학)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특히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당시 한국은 철저히 통제된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 민주적인 정부하에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독재적인 리더십은 잔혹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결국 좋은 것으로 결과를 맺을 때가 있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보겔 교수는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다.) / 조선일보 2006-11-11


박 대통령 책 모두 구해달라



▲푸틴(러시아 대통령). 방한 중이던 2001년 2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에 분향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지난달 초 반기문(潘基文) 유엔 차기 사무총장이 크렘린을 방문했다. 반 차기 총장의 얼굴엔 시종 미소가 끊이질 않는데, 푸틴 대통령 표정은 딱딱했다.
푸틴의 경제 개발방식은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유사하다. 실제로 푸틴은 1990년 레닌그라드대(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의 국제문제보좌관 시절 이석배 주 카자흐스탄 공사에게 “박 대통령에 관한 책이 있으면 한국어든 다른 언어로 쓰였든 모두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푸틴은 “어찌나 허름한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은 곳에 살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래서 가난을 딛고 국부(國富)를 일궈낸 박 전 대통령이 유독 인상 깊었을지 모른다. / 조선일보 2006-12-11


‘박정희 혁명’이 신분제도 무너뜨렸다


▲인도 기자 마유르

인도인 기자(記者)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름은 마유르(Mayur). 인도 최대 경제지인 이코노믹타임스의 기자로 3년째 일하고 있다.
며칠 전이었다. 인도의 서로 다른 카스트 간 결혼(Inter-caste marriage)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게 됐다. 얘기를 하던 중 마유르는 갑자기 박정희 전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박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돌입하고 있는 인도 지식층에선 화제인 모양이다.
그는 “박정희는 혁명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박 전 대통령은 군사혁명을 해 독재를 한 지도자란 이미지가 있다”고 설명하자 그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에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근대화를 성공시킴으로써 단번에 무너뜨린 게 박정희 아니냐. 정주영(현대 창업자)도 그래서 가능했다고 들었다. 인도도 경제 성장을 해내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카스트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박정희에겐 군사혁명가의 이미지와 함께 한국 사회의 신분제도를 실질적으로 철폐한 혁명가란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기존의 관습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혁명의 사전적 의미 아닌가. / 조선일보 2007-01-12 이인열 뉴델리특파원


박정희 모델 따르고 있다


▲훈센(캄보디아 총리). 방한 중이던 2006년 3월 23일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을 방문한 훈센 총리. ⓒ e영상역사관

“가난을 경험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캄보디아는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더 많은 한국 기업의 투자를 기대합니다.”
제주 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앞두고 23일 캄보디아 프놈펜 총리 관저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훈센 총리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훈센 총리는 또 “한국은 전쟁 후 빈 손으로 일어선 나라고 캄보디아 역시 내전 후 재건을 위해 노력 중”이라며 “캄보디아 경제 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한국이 캄보디아와 유사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모델을 많이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 한국일보 2009-05-29


중국엔 박정희가 없어서…


▲리콴유(싱가포르 총리). 방한 중이던 1986년 6월 28일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 ⓒ e영상역사관

문화혁명이 끝난 뒤 복권된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11월 중국 현대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해외 벤치마킹을 떠난다. 방문지는 작지만 강한 도시국가 싱가포르. 가진 것이라고는 인민복 한벌 밖에 없었던 당시 중국 지도자들에게 싱가포르의 발전상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싱가포르에서 리콴유(李光耀) 총리를 만나 여러가지 조언을 들었던 덩은 리 총리로부터 충격적인 말 한마디를 듣고 마음가짐을 고쳐잡는다.
“중국은 한국의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없어 성공적인 경제모델을 갖추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충격을 받은 덩은 싱가포르 참관을 마치자마자 한달뒤 바로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한다. / 아시아경제 2009-09-29 ◎

[좋아하는 사람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