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따라주는 술잔을 홀짝홀짝 비우며 술상에 한숨을 토해놓을 뿐 손님과 수작하는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 그녀는 명백한 직무태만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 한마디라도 던졌다가는 당장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그녀가 얼마쯤은 두려워 사내는 잠자코 혼자 술잔을 비웠다.
달빛 젖은 유리창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기어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눈물은 술잔 속으로 떨어지면서 사내의 가슴 속에서 철렁 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물 섞인 술을 꿀꺽 한모금으로 삼키고 나서 멀건히 유리창을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서울은요, 서울은…앉아 울 곳도 없어 서서 울어서 서울이에요.”
사내가 유리창을 바라보니 거기에 허연 달이 꽉찬 동그라미로 틀어박혀 있었다. 추석달이다. 그녀를 울린 건 망할 놈의 추석달이지 자기가 아니라고 그는 변명의 구실을 찾았지만, 아등바등 지지고 볶던 군상들이 명절을 앞두고 썰물처럼 서울을 빠져나간 뒤 덩그러니 남은 허섭스레기 인생들에게 딱 걸맞는 썰렁하고 구접지레한 술집에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는 느낌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통금 시각이 임박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던 사내는 집에 돌아와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백지 위에 볼펜을 굴렸다.
서울 와 3년 / 배운 건 담배와 술 / 슬픔이지요.
가릴 길 없는 가난이 싫어 / 우울한 날들의 젊음이 싫어 / 새벽 열차에 몸을 실은 / 서울의 밤은 휘황했고 / 네온빛처럼 차가웠어요.
앉아 울 자리도 없어 / 서서 울었던 서울, 이젠 돌아가겠어요, / 돌아가 아버지 오랜 가난과 시름을 풀던 / 팍팍한 한 뙈기 땅일지라도 /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사랑과 / 다시는 쓰러지지 않을 더 큰 / 노동의 자식으로 살겠어요.
-박찬중 ‘정례 생각’ 전문
시인은 이 시가 실린 시집을 필자에게 주면서 명절에 고향에 못가는 그 술집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필자는 그가 부드럽고도 힘찬 가락으로 탄주(彈奏)한 ‘정례’가 고향마을의 봄나물 캐던 누이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으로 족하기에 따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 정례 누이들은 찌든 가난의 시골집에서 먹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학교 공부를 접고 도시로 나와 식모가 되고, 버스 차장이 되고, 식당 종업원이 되고, 공장의 여공도 되었다. 그리고 험한 세상을 헤매다가 의지할 곳을 못찾으면 앉아 울 곳도 없어 서서 울다가 그냥 바닥에 뒹굴어 버렸고, 일월화수목금토를 맨몸으로 부딪치며 독하게 되바라지고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래도 이 정례 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꼭꼭 고향집에 돈을 보내주었다. 부모형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각오가 오달지게 뭉쳐져 있었다.
서울 간 누나가 학비를 보내주면서 몇년 동안 고향집엘 오지 않기에 남동생이 방학 기간에 누나를 만나러 간 이야기가 있다. 이 남동생은 누나의 주소지로 찾아갔다가 그만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그곳은 홍등가였던 것이다. 아픔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1978년 3월 한일여자실업고 ‘눈물의 졸업식’. ⓒ KTV-e역사영상관 |
명절에 교복 입고 고향가는 여공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아픔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이 갈마드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도시에 가서 공장에 취직한 딸이 추석 명절에 교복을 입고 고향집에 돌아와 부모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한 일도 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많은 소녀들이 모여 일하는 큰 공장이 있었다. 고맙게도 회사 측은 공부의 기회를 잃은 소녀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세워주었다.
소녀들은 꿈에 그리던 교복을 입고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며 낮에는 공장에서 열심히 작업을 했다. 소녀들은 근로의욕이 왕성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일하고 공부하면서 고달픔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공장의 작업 능률은 더 좋아졌다.
야간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어떤 손님이 공장을 방문한 일이 있다.
키 작고 얼굴 까만 그 남자 손님이 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소원이 무엇이지?”
뜻밖에도 손님은 소녀의 소원을 물었다.
“내가 무슨 일을 도와주면 좋을까?”
“학교 공부를 못한 것이 한입니다. 영어 글씨를 모르니 감독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곳의 소녀들이 하는 일은 합성섬유를 뽑는 작업이었다. ‘마법의 섬유’로 불리는 아크릴사로서 수출용 스웨터, 담요 등에 쓰이는 실이었다. 외국어가 쓰인 수출 상품을 만들면서 소녀들은 볼 줄 모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앞에 늘 마음이 어두웠다.
손님이 옆에 있던 회사 사장에게 말했다.
“돈 없어 공부 못한 한을 풀어줍시다.”
그러자 사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장 회사에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시설을 충실히 해서 공부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시오.”
이렇게 사장에게 당부하는 그 키 작고 얼굴 까만 손님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야간학교야말로 소녀들의 노동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이 소녀들이 만들어주는 합성섬유로 수출이 부쩍 늘어 국가경제가 힘차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산의 한일합섬에 야간학교가 세워졌다. 한일합섬 부설 한일여자실업고였다. 사장(김한수)은 고향인 경남 김해에 중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의 경험이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소녀들을 위한 야간학교는 건물이나 시설들이 어느 일반 학교에 못지 않았고, 학비는 물론 교복도 무료로 지급하는 등 소요 경비를 모두 회사에서 부담했다.
한일합섬 부설 한일여자실업고는 1974년에 생긴 최초의 산업체 부설 야간학교였다. 한일여자실업고 이후 대통령의 지시와 권유로 공단의 기업체마다 향학열에 불타는 근로자들을 위한 야간학교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어려웠던 시절,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데 헌신해준 산업현장의 수출 역군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대통령 박정희는 산업체 부설 야간학교의 생활상을 담은 슬라이드를 통해 소녀들이 처음 교복을 입고 감격해하는 모습과 명절 때 고운 옷 젖혀두고 교복 차림으로 고향 가는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 1974년 10월 5일 대통령 탑승 헬기가 전남 광주 일대의 수해지구에 도착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부인 잃고 추석을 덮친 수재현장에 나타난 낡은 바바리코트의 대통령
소녀들이 명절을 쇠러 돌아가는 고향은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고 마을길도 넓어져 활기에 차 있었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의한 쾌속의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도시와 농촌이 근대화된 생활환경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그런데 활력이 넘치는 민생 현장에 변함없이 시련을 안겨주는 것이 가뭄과 홍수, 태풍 등의 자연재해였다. 특히 추수기를 앞두고 추석 전후로 몰아닥치는 풍수해는 많은 인명과 재산을 모질게 앗아갔으며, 어느 때는 추석 연휴 기간을 덮쳐 명절을 아예 망쳐버리기도 했다.
자연재해가 발생한 지역에는 항상 대통령이 함께 있었다. 그러니 장관과 실무자들은 말할 나위가 없어 일사분란한 지휘로 실태조사와 복구 지원대책 등이 신속히 이루어지곤 했지만, 해마다 그 피해 규모는 국가와 민생 경제에 적지 않은 상흔을 남겼다.
1974년 8월 하순에는 전남 광주 일대가 가장 큰 수해를 입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9월 1일 중앙재해대책위원회에 들러 전국 수해상황을 보고받고, 특히 전남 광주 일대에는 군(軍)의 각종 의료시설과 병원을 총동원해 이재민 구호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관계 장관을 먼저 수해지구로 떠나게 한 다음, 9월 3일에는 그 자신이 헬기로 영산강 유역의 수해지구를 시찰했다.
영산강 유역에 가니 수해 주민들이 관계 기관과 합심해서 복구에 힘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박정희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복구 노력이었다. 의욕이 없는 사람을 돕는 것은 낭비라면서 관계 기관으로 하여금 주민들을 독려해 복구 의욕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도지사로부터 수해와 복구 상황을 보고받은 박정희는 “피해 농토에 대한 보상과 수해복구에 필요한 설계 등 재정과 기술적 지원을 중앙에서 최대한 뒷받침하겠다”고 말하고, 무상 구호양곡과 취로사업비를 충분히 풀어 피해 농가마다 평년 수준의 수입이 돌아가도록 할 것을 지시하면서 “다가오는 추석에는 모든 국민들이 수해를 입고 있는 동포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검소하게 지내야할 것”이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해마다 명절 때면 대통령 부인이 고아원과 나환자촌 등 불우 이웃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그해 1974년 추석을 앞두고는 대통령 딸 박근혜의 이름으로 전달되었다.
그해 8월에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서거했던 것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기쁨보다는, 대통령 부인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슬픔에 잠겨야 했다.
여느 남정네라면 부인을 잃고 나서 아무 것도 돌아볼 경황이 아니겠으나 자연재해 앞의 대통령이란 자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당시 텔레비전에 비치는 홀아비 대통령의 모습을 안쓰럽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꾹 다문 입술, 날카로운 눈매로 국정 전반을 지휘하는 최고 책임자로서의 일거수일투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1974년 9월 30일은 추석이자 대통령 박정희의 57회 생일이었다. 박정희는 국립현충원에 들러 충혼탑에 헌화하고 자녀들과 함께 부인의 묘소에 성묘했다. 생일은 가족이 조촐하게 치르고 넘어갔다. 홀아비 대통령의 생일은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부인의 서거와 큰 수해로 국가적 불행이 겹친 국민의 일상도 시름이 가시지 않아 심란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튿날 10월1일 국군의날 행사는 어느 해보다 크게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여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이때 박근혜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처음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섰다.
박정희는 10월 5일 다시 헬기를 타고 전남 광주 지역으로 날아갔다. 광주와 나주의 수해 복구상황을 돌아보고 주민들과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그때 그는 오래된 바바리코트 차림이었는데, 그것은 6년 전인 1968년 10월 강원도 거진의 풍수해 현장을 시찰할 때도 입었던 것으로 봄, 가을이면 그 허름한 바바리코트를 자주 입고 지방 시찰을 다녔다.
수해로 추석 명절을 망친 기분을 떨쳐내고 복구작업에 땀 흘리던 그곳 주민들은 홀아비 대통령의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대하기가 민망하였으나, 자신의 불행을 접어두고 국민의 불행을 보살피러 온 대통령의 출현 자체만으로도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여러 지역을 두루 공중시찰했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들판은 수해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추수기를 앞두고 황금 물결이어서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올해 추곡 전망이 어떻소?”
옆자리의 농수산부장관(정소영)에게 물었다.
수해 복구도 그렇거니와, 보다 큰 관심은 쌀 수확량이었다. 그해 정초에 박정희는 쌀의 자급자족을 독려하는 뜻에서 ‘主穀의 自給達成’이란 휘호를 써서 관련 부서에 보냈다. 그의 신년 휘호는 그해 국정의 중심 과제를 의미했고, 그런만큼 농수산부장관의 책무는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 최고인 3천만섬을 돌파할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있게 대풍이라는 말에 박정희는 얼굴을 활짝 폈다.
“하늘이 도와주어 대풍이 든 거요. 농수산부장관은 하늘이 뗐다 붙였다 하지.”
모처럼 대통령의 조크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자연재해를 딛고 맞이한 풍년의 기쁨이 침울한 분위기를 씻어주고, 국정과 민생에 활력을 불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는 하늘이 도와주어 대풍이 들었다고 했지만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하늘도 돕지 않는다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 특히 추수기를 앞두고 닥치는 자연재해를 예방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박정희 시대의 자연재해 방비의 키워드는 ‘유비무환’이었다. 그의 재임 18년 동안 댐건설, 산림녹화 등 자연재해 방비를 위한 치산치수(治山治水) 사업은 어떤 장애에도 구애됨이 없이 강력하고 끈질기게 추진되었고, 그리하여 추석 때면 고향 가는 길에 푸른 숲과, 그리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달성된 풍요로운 들판의 황금 물결을 보게 되었다.
◇ (오른쪽)수해 상항을 시찰하는 박 대통령의 표정이 어둡다. 1974년 10월 5일 이때 입고 있는 허름한 바바리코트는 (왼쪽)1968년 10월 29일 강원도 거진의 풍수해지구 시찰할 때 입었던 것과 똑같았다. ⓒ 국가기록원 / 정부기록사진집 |
자연재해가 지도자의 역량을 시험한다
명절 때면 으레 서울역 광장에 귀성 인파가 몰려들어 노숙을 하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는 먼저 타려는 몸싸움으로 아우성을 쳤다. 자가용 몰고 훤히 뚫린 고속도로를 따라 고향집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소원도 이루어지고 나니 모두가 심드렁한 옛이야기다. 이제는 고속도로 왕래의 혼잡을 피해 미리 성묘를 다녀오거나 다른 방법으로 연휴를 즐기는 풍속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변함이 없다. 해마다 집중호우와 태풍은 어김없이 다가와 인간의 대처 능력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다. 요는 국가와 국민의 위기관리 능력이고, 최고 권력을 쥔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자연재해는 국가 지도자에게 어쩔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잘 방비하면 지도력을 인정받지만, 무덤덤히 보는 시각으론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손해다. 리더십에 상처를 입게 되어 있다.
그 교훈을 명징하게 보여준 것이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의 태풍 매미였다.
그해 하필이면 추석 연휴 기간에 태풍 매미가 1959년의 태풍 사라호를 연상시킬 만큼 놀라운 파괴력으로 한반도를 휩쓸었다.
2003년 추석은 9월 11일. 방송과 신문에서는 지난날의 끔찍했던 사라호와 비견되는 엄청난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톱으로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12일에는 태풍 매미의 몸통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한반도의 남해안 일대를 강타해 무려 117명 사망에 실종 13명, 수천 세대의 이재민과 수조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엄청난 국가적 재난이 예고되고 그에 따라 무수한 사람과 재산이 비바람에 휩쓸려 떠내려가는데도 이 나라의 대통령은 국가 위기관리의 책임을 진 자리에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대통령 노무현은 그 시간에 부인과 함께 뮤지컬을 구경하고 있었고, 경제부총리는 골프를 치러 제주도에 가 있었다.
태풍 매미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를 휩쓸었지만 고작 사망 3명에 부상자 110명의 인명 피해를 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자연재해라기보다 인재(人災)였다. 자연재해의 최대 피해자는 서민이다.
소위 노무현 참여정부는 ‘서민의 정부’라 했다. 노무현 집단은 빈부 갈등과 대립의 구도를 내걸고 특권층, 부유층을 공격했고, 노무현은 ‘서민 대통령’을 자임했다. 명절 때면 재래시장의 상인과 택시 운전기사들을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서민들은 그 사진 속의 ‘소품’에 불과했다. 그들은 ‘못가진 자’의 편에서 ‘가진 자’를 공격하며 그들 자신이 ‘가진 자’로 변신했다.
결국 ‘못가진 자’는 프로파간다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국가 정체성에 도전해 박정희 시대를 가차없이 매도했고, 그 추종 세력에 의해 서울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이 쓰러지고 탑골공원 삼일문의 현판이 박정희 글씨라고 해서 떼어졌다. 광기(狂氣)의 나날이 흐르는 동안 민주 사회의 품위를 지탱하는 근간이라 할 65퍼센트나 되던 중산층이 무너져 ‘못가진 자’로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노무현 참여정부가 즐긴 ‘민주주의’ 권력의 방만함은 참으로 볼 만했다.
풍수해가 추석 명절을 덮친 1974년과 2003년의 재난에, 부인을 잃은 경황에도 낡은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나타나 현장을 지휘하는 박정희와, 숱한 사람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그 시간에 태연히 뮤지컬을 구경하는 노무현은 참 볼 만하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박정희에게서 보는 것은 권력의 서비스요, 노무현에게서 보는 것은 권력의 방만한 즐거움이었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최고 권력은 국가 중대사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며, 따라서 태풍 같은 자연재해에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2003년 태풍 매미에 휩쓸려 죽은 사람들은 다 서민들이다. ‘서민 대통령’이라는 노무현, 남을 조롱하는 듯한 웃음도 헤프고 말도 청산유수로 잘하는 노무현은 참으로 볼 만했다.
박정희는 집권 초에 창밖으로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夜半) 0시.
그때 나는 서재의 일우(一隅)에 앉아 붓을 멈추고, 멍하니 비에 젖어가는 밤의 가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저 거리로 뛰어나가, 내 재주로 저 비를 막거나, 아니면 저 비 때문에 수없이 울고 있을 동포와 더불어, 이 밤을 지새워 보고 싶은 격정을 느꼈다.
5천년을 하루같이 시달려 온, 이 피곤한 민족이 모처럼 일어서려는 비장한 마당에, 다시금 하늘은 시련을 내리다니…….
그러나 본인은, 그 격랑 속의 독주(獨舟)를 저어가는 사공일지언정, 조금도 낙망하지 아니하고 실의하지 아니했다. 그 파도의 물결이 모질면 모질수록 더욱 더 강해져가고 있고, 또한 불퇴전의 결의에 불타고 왔었다. (박정희 지음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저 비 때문에 수없이 울고 있을 동포와 더불어’라는 구절에서 박정희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목숨 바쳐 국가적 고난과 맞서는 리더십의 지도자라면 안 따를 국민이 없고, 못할 일이 없다는 신념을 주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서민 대통령이다.
꿈을 주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노무현 추종세력이 쓰러뜨렸던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 앞에 소주잔을 올리고 담배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숙인들이다. 오밤중에 삼일문 현판이 떼어졌을 때 그것을 경찰에 신고한 것도 노숙인들이었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실패해 거리로 나앉아 추석 명절에 고향집에 갈 처지도 못되는 그들이 박정희 시대에 무슨 덕을 보았다고 그러는 걸까.
박정희 시대에 ‘앉아 울 곳도 없어 서서 울었던’ 정례 누이들의 명절 쇠러 고향에 못가는 아픔과 슬픔도 그때는 힘이었다. 악착같이 사는 삶의 힘이었다.
필자는 이 ‘정례 생각’ 작품을 좋아한다. 문학은 ‘못가진 자’의 편이다. 당연히 정례 누이의 소매끝 곤때처럼 묻은 한숨과 눈물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문학은 그녀의 가난을 벗겨낼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고 그녀의 슬픔을 지울 지우개도 없다.
그때는 좌절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엔 돈이 들지 않는다.
정례 누이들은 먹고 입고 쓰는 것을 줄이고 줄여 돈을 모았고 “잘살아야지”라고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1974년에 처음 생긴 한일합섬 부설 야간학교인 한일여자실업고에서 공부하며 섬유공장에서 실을 뽑던 이점자라는 소녀는 뒤에 유럽 오페라 무대를 화려하게 누비는 프리마돈나가 되어 2002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베세토 오페라단의 ‘카르멘 2002’ 공연에 출연했다. 그리고 구로공단의 전기회사에서 3년간 일하면서 산업체 부설 야간학교에서 공부한 신경숙 소녀는 1990년대의 한국문학을 화려하게 장식한 대표적인 작가로 변신했다.
이점자와 신경숙 두 여성은 지난날의 여공 시절을 전혀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하는 의연한 자세로 주위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꿈을 품고 꿈을 이룬 존재가치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 앞에 술잔을 올리는 노숙인들은 무슨 소원을 빌까. 꿈이리라. 께느른하게 널브러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땟국이 흐르는 구접지레한 공동체라고 왜 꿈의 그리움이 없을까. 그리움은 노숙(路宿)하지 않는다. “노루 꼬리만한 꿈 한조각이라도 주오”라고 빌 것이다.
적어도 박정희 시대에는 꿈이 있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박정희는 꿈을 주는 지도자임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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