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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105mm 견인야포 KH-178
여동활
2010. 1. 24. 21:03
제목 | 국산 105mm 견인야포 KH-17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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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178 105mm개량 곡사포, 속초의 동해군단에 1개대대가 남아 있다고 웹에서 보았는데..
http://www.owonchol.pe.kr/10ceoi%28text%29/10ceoi%28text50%29.htm에서 기져온 국산 야포개발사입니다.
박 대통령은 72년 4월 3일에 거행된 국산병기의 시사회 때 출품된 병기만 대량 생산하면 250만 예비군을 전력화 할 수 있으니 그 군사적 의의는 실로 막대한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병기개발에 대해 큰 자신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그날밤 잠을 자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필자를 불러 「105mm 곡사포를 시급히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여진다.
이 지시는, 첫 번째가 앞으로의 병기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북한은 대대적인 화력증강을 하고 있는데, 우리쪽은 대구경(大口徑)화포에서 크게 열세에 놓여 있다. 시급히 105㎜ 곡사포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시는 국군의 전력강화 면에서 실로 중대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현역군에서 사용할 대구경화포를 개발하라는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라는 게 미군이 쓰다가 한국군에 대여해 준 미국 정부 재산으로서 오랜 기간 사용하다 보니 수명이 다 된 것이 많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생산이 중단된 구형(舊型)이었기 때문에 부속품 구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인 주퇴복좌기(駐退復座器) 같은 것은 고장이 나도 수리할 수조차 없었다. 명중률도 떨어졌는데 그나마 이러한 화포도 북한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박 대통령은 포병출신이다. 이러한 내용은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화포의 수를 대폭 증강하고 고물이 다 된 미국 대여병기를 하루속히 신품으로 교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시에는 예비군도 105㎜ 곡사포까지를 장비시켜 현역군 수준의 전투사단화할 것을 구상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현역사단 외에 10개의 예비사단이 있었는데, 전쟁발발과 동시에 예비역 군인을 동원, 현역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무장하고 전선에 출동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부대였다. 그런데 105㎜가 부족해서 이들 예비사단에는 지급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전력 면에서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고쳐 말해 105㎜ 포만 국산화되면 현역군과 똑같은 수준의 예비사단 10개가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니 남북간의 군사 대결상 중대한 뜻을 지니게 된다.
박 대통령은 현역군의 전력증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뜻이다. 필자가 방위산업을 담당할 당시에는 "60㎜ 박격포까지만 장비하는 20개사단의 예비군 무장화"를 책임지라는 지시였는데, 이번에는 곡사포까지 개발하라는 확대지시를 한 것이다. 그 날짜가 1972년 4월 4일이었으니 필자가 방위산업을 담당하고 난 후 불과 5개월이 지났을 때이다. 이 지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의는 실로 중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72년 4월 4일 결단」이라고 한다고는 이미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역군용 대구경화포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우선 90㎜ 무반동 총이 개발되었고 곧이어 106㎜ 무반동 총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106㎜ 무반동 총은 지프차에 장착하는 대전차포로서 포의 길이가 3.4m나 되는데 큰 대포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제작상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음 단계가 105㎜ 곡사포였는데, 우선 추진장약이 약실 안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이에 견뎌내는 강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원거리를 정확히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포신 내부는 정밀가공을 해야 하고 강선(腔線)이 있어야 한다. 1만 분의 1인치(1만 분의 25㎜) 초정밀가공을 요하는 주퇴복좌기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화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미 대량생산해서 실전에 배치하고 있으니 우리도 개발하라는 것이 박 대통령의 긴급명령이었던 것이다. 화포개발에 대해서는 미국의 반대가 강경했다.
다음은 국방과학연구소 구상회(具尙會) 박사의 회고담이다.
저는 당시 미국 정부에서 국방과학연구소에 파견한 기술고문단장인 하딘(Hardin)씨를 만나서 "105mm 곡사포 시제 명령이 떨어졌다. 105mm 곡사포에 대한 기술자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딘씨는 껄껄 웃으며 "105mm 곡사포는 카빈총과 다르다. 한국은 기술부족으로 불가능하다. 105mm 곡사포의 기술재료는 너무 양이 많아서 방(房) 하나쯤은 될 것이다. 재료검토에만 1년은 족히 걸린다. ADD는 소화할 능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졸라대니 하딘씨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에 문의를 했는데, 그때의 답은 "N0! Gun Never!"라는 단지 세 마디 단어였습니다. 게다가 미 대사관은 하딘씨에게 "105mm 포 개발을 못하도록 막으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미국 정부는 냉담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견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美 국무부와 주한 美 대사관은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필요한 병기는 미국에서 구입해서 쓰고, 한국은 독자적으로 병기개발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존슨 美 대통령 방한 때 국군 파월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KIST라는 종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는데, 병기개발이 필요하다면 KIST를 이용하면 될 것이지 왜 별도로 병기연구소를 만들려고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셈은 남북한의 대치관계가 군비확충경쟁으로 전환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러니 중국을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심까지도 써야 했다.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고 나머지 주한미군도 조만간에 철수한다는 「애드벌룬」을 띄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 중국은 38도선을 자기 나라의 이익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만 했다. 중국이 북한과 「즉시개입조약」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과 친선을 꾀하려면 북한도 자극하지 말아야 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남한의 군사력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길밖에 없는데 남한에서 대구경화포를 개발한다니 닉슨 행정부로서는 자못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렇게 돼서 우리나라의 대구경화포(105mm 곡사포) 개발은 기술자료도 없이 간단한 청사진 도면 몇 장만 갖고 시작하게 됐다.
당시 화포의 시제개발을 총괄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개발요원 김대선(金大善: 現 국방부 품질관리소 부소장)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오 수석(필자)의 지시는 105mm 곡사포를 시제하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이 말을 듣자 아찔했습니다. 105mm 곡사포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사정으로는 당치도 않은 과욕이었습니다.
우선 도면도 한 장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면도 없이 어떻게 만드느냐?"고 따지니, 실물 105mm 포를 갖다가 치수를 재가며 도면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105mm 포의 정밀도는 100분지 1mm를 따져야 합니다. 이 정도의 정밀도는 책상 위에서 측정하는 데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대포 구석구석을 측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한 도면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국군이 소유하고 있는 105mm 포는 6.25 전쟁 당시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라서, 마모가 심해 정확히 측정한들 소용이 없는 수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포의 내부를 가공하려면 전문기계가 필요합니다. 길이가 긴 포신을 깎아내는 보링기계가 필요하고, 100분지 1mm의 정확도를 내려면 내부를 연마해야 됩니다. 그리고 강선을 파려면 강선 파는 기계도 필요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었는데 화포를 만들자면, 이런 기계가 전부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계가 당시 국내에 있을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 수석은 "기계가 없으면 머리를 짜서 만드는 것이 기술자가 아니냐? 꼭 필요한 기계는 만들어서 써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기계를 들여다가 만들면 되는데 왜 그리 서두르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오 수석은 "이런 식으로 만든 대포를 실제로 사용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소. 대포가 완성되어도 쏘아보지 않아도 좋소. 다만 대포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훈련을 시키자는 뜻이오. 개발하는 사람이나 제작하는 기술자 모두 대포를 만드는데 대한 공포증이 있는가 본데, 이것을 타파하자는 게 목적인 것이오. 이런 식으로라도 대포를 만들어 보면, 애착이 생기고 자신이 생길 것 아니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추진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105mm 곡사포 시제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서울공대 기계과를 막 졸업하고 새로 입사했던 이원백(李元柏)씨(現 ADD 탄도연구실장)의 회고도 들어보자.
화포류의 도면이라곤 청사진으로 된 일부분을 비공식 경로로 입수한 것뿐이었는데 TM 35P를 보고 얼기설기 꿰어 맞추어 부품 목록과 도면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수영(李水永) 실장(故人)이 105mm 곡사포 한문을 구해 갖고 와서 ADD요원들은 그것을 분야별로 나누어서 역설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역설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장비의 원 설계자의 설계 개념을 파악하는 일인데 화포를 처음 대하는지라 쉽지 않았습니다.
주퇴복좌기는 진주에 있는 대동(大同)중공업이 담당하였고, 포신은 서울 구로동에 있는 대한중기(大韓重機)에서 담당하였습니다. 저는 주퇴복좌기와 마운트를 담당했는데, 진주와 구로동과 전방 사격장을 오가는 출장으로 신혼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진주까지의 교통편은 남해선 밤열차와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뿐이었는데, 부산까지 고속버스로 간후 진주행 시외버스로 갈아 탈 때도 있었습니다. 9시간 내지 10시간이 걸렸습니다.
포신을 가공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강선가공과 약실 테이퍼 가공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 이수영 실장이 일제시대 때 조병창에서 일했던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의 조언으로 강선 가공기계를 제작하였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1973년 3월 105mm 곡사포의 총조립이 대한중기 구로동 공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밤을 새워 잘 맞지 않는 것은 줄로 갈고, 덧붙이고 해서 억지로 끼워 맞추었습니다. 그런 후 포차로 견인해서 전방사격장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국산초유의 대포를 끌고 서울거리를 달릴 때의 그 뿌듯한 성취감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잘 나갈까? 어떤 사람은 첫발에 팍 주저앉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국기술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평하면서 우리 연구원들이 헛고생만 하고 있다며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105mm 곡사포의 시제가 완성되고 성공적으로 시사까지 끝냈다는 보고를 듣고는 심히 기뻐했다.
우리나라가 대구경포를 국산화했다는 것은 사실, 일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포병출신이니 그 감개가 더 컷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래서인지 필자에게 "105mm 포를 보고 싶으니 시사회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돼서 동년(73년) 6월 25일에 대구경화포, 즉 106mm 무반동포, 4.2인치 박격포, 105mm 곡사포에 대한 시사회가 열리게 됐다. 장소는 다락대였다. 참석인원은 극히 제한되었다.
시제포는 모두 3문밖에 없으니 2문으로 사격하고 한문은 전시를 했다. 시사는 105mm 곡사포부터 먼저 시작했는데, 먼저 곡사(曲射)로 발사했다. 그리고 곡사포는 포차로 끌고 와서 직사(直射)를 하게 된다. 그 중간에 4.2인치 박격포와 106mm 무반동포의 시사를 했다. 4.2인치라고 하면 직경이 10.67cm로 60mm나 81mm 박격포탄과는 위력이 다르다. 4.2인치 박격포에는 명중도를 높이기 위해 강선도 있다. 'T'라고 표시된 타켓에 명중되어 폭음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106mm 무반동포가 목표물인 고물전차 표적을 명중시킨다. 맨 나중에 105mm 곡사포의 직사 사격이 있었다. 근거리에서 포를 목표물인 바위에 정조준해서 쏘는 사격이다. 명중률은 대단히 좋았다. 다음은 이원백씨의 회고이다.
드디어 시범사격 날이 왔습니다. 많은 훈련을 한 포병들 덕분에 곡사, 직사 모두 명중을 하여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와 웃음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시범사격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후면에 전시된 화포들을 돌아보고 개발 종사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아! 우리는 결국 해냈습니다. 그 당시의 우리는 젊었고 국방과학연구소도 활기가 넘칠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불철주야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학도의 애국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행사가 있게 되면 보통 행사 날짜가 먼저 잡히고 난 후 거꾸로 여기에 맞추어 준비작업에 대한 일정을 짜게 되는데,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빡빡한 일정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개발업체도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뒤처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중량물이기 때문에 중노동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허리가 온전치 못하고 얼굴이 부어오르는 증상이 생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시끌벅적했던 행사장에서 내빈들이 돌아가고 나면 산새소리,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적막감에 빠져듭니다. 바로 근처에는 한탄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선지구라 무인지경입니다. 수영복도 없이 멱을 감기도 하였는데, 물은 수정같이 맑고 모래자갈이 곱고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그 경치에 감탄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낭만도 잠깐, 다음날부터 또 다시 불철주야 뛰어야 했습니다.
1973년 6월 시사회가 끝나고 난 후 하비브(Harbib) 미 대사의 식사초청이 있었다. 이때 미 대사는 "국산 105mm 포에 문제가 많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식사 후 실무자의 의견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쓰지도 못하는 포를 만들려고 생각지 말고 미국 제품을 사다 쓰라는 뜻이라고 느껴졌다. 식사 후 동석했던 부대사의 안내로 정원으로 나가보니 몽고메리(Montgomery)대령(주한 미국 군사원조고문단 JUSMAG-K의 연구개발 및 방산 책임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툼한 자료철을 내보이면서 한 조목씩 설명을 했는데, 국산포의 각 부위의 치수가 미군 규격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 이런 조사를 했는지 필자도 놀랐다. 그래서 필자는 "설계도면도 없이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도면만 있으면 미제 포와 똑같이 만들 자신이 있다. 어떤 방법을 쓰던 도면을 구해서(즉 미국이 제공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구해서라도) 화포는 국산화하겠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미국정부는 「한국측에 기술을 넘겨주지 않는 한 병기개발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기술자료도 없고 전문기계도 도입하지 않은 한국이 105㎜포 현물만 보고 시제개시 후 불과 11개월만에, 비록 미국 규격에는 합격하지 못하는 화포일망정 한국이 시제품을 만들어내고 시사까지 성공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측의 화포 국산화 의지가 강경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1973년 6월 9일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과 스틸웰 주한 美 군사령관이 각기 양국을 대표해서 「군병기·장비, 물자에 관한 기술자료 교한 부록」에 서명을 했고, 같은 해 9월 12∼13일에 있었던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최종 결말이 났다. 이로써 105㎜ 곡사포를 포함한 각종 병기에 대한 기술자료(도면 포함)는 1974년부터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美 국방부 클레멘츠 차관은 "한국이 방위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기반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산업기술과 한국의 산업을 결부, 활용하는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권고하고 이 분야의 적절한 원조를 제공토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발표하면서 미국의 태도를 밝혔다. 추가 설명을 하면「방위산업은 한국에서 단독으로 추진하지 말라.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한국업체가 공동 생산하는 방식, 즉 한미 공동생산 방식에 의해 추진해야 미국은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협약으로 인해 생산된 제품은 한국군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수출할 때에는 미국정부와 협의를 해야 했다. 미국측은 우리나라에서 국산병기가 양산된 후에도 「수출에 대해서는 철저한 감시를 하겠다는 것이고 거부권을 갖겠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수출하고자 할 때에는 미국정부의 승인을 받게끔 되었는데 미국이 합의를 잘 해주지 않아 현재까지도 애를 먹고 있다.
한편 미국의 기술고문단 「하딘 팀」이 한국측에 기술자료 등을 임의로 너무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74년 「하딘 팀」으로 하여금 JUSMAG-K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철수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대해 미국측에서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부터 미국의 ADD 파견 요원의 임무는 기술원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ADD를 감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105mm 곡사포에 대한 각종 기술자료를 얻게 된 후로부터의 진척속도는 빨랐다. 포 제작에 필요한 각종 소재를 생산하는 삼미특수강공장, 포신을 제조하는 대한중기(대한중기는 나중에 기아그룹에 인수되어, 창원공장은 기아기공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기아특수강이 되었다), 포가를 제조하는 기아기공(현 기아중공업) 등 대형공장을 창원기계공업기지에 긴급히 건설했다. 포를 제작하는 각종 최신기계 설비도 도입했다. 포를 정밀하게 대량생산하는 데 필요한 특수케이지(計測器具)와 특수 치구(治具, 기계제작을 할 때 정밀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기구)도 일절 제작했다.
이들 작업을 1976년말까지 모두 완성하고 77년부터는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곧이어 155mm 곡사포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군에서 요청만 있다면 어떠한 대구경포도 필요한 수량만큼 생산해 낼 수 있는 완전한 기반이 이때 완성된 것이다. 창원기계공업기지에 맨 처음 입주한 공장들이 이들 방위산업체였는데, 이들 공장의 입주가 기폭제가 돼서 창원기지 건설이 촉진됐다.
http://www.owonchol.pe.kr/10ceoi%28text%29/10ceoi%28text50%29.htm에서 기져온 국산 야포개발사입니다.
박 대통령은 72년 4월 3일에 거행된 국산병기의 시사회 때 출품된 병기만 대량 생산하면 250만 예비군을 전력화 할 수 있으니 그 군사적 의의는 실로 막대한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병기개발에 대해 큰 자신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그날밤 잠을 자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필자를 불러 「105mm 곡사포를 시급히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여진다.
이 지시는, 첫 번째가 앞으로의 병기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북한은 대대적인 화력증강을 하고 있는데, 우리쪽은 대구경(大口徑)화포에서 크게 열세에 놓여 있다. 시급히 105㎜ 곡사포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시는 국군의 전력강화 면에서 실로 중대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현역군에서 사용할 대구경화포를 개발하라는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라는 게 미군이 쓰다가 한국군에 대여해 준 미국 정부 재산으로서 오랜 기간 사용하다 보니 수명이 다 된 것이 많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생산이 중단된 구형(舊型)이었기 때문에 부속품 구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인 주퇴복좌기(駐退復座器) 같은 것은 고장이 나도 수리할 수조차 없었다. 명중률도 떨어졌는데 그나마 이러한 화포도 북한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박 대통령은 포병출신이다. 이러한 내용은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화포의 수를 대폭 증강하고 고물이 다 된 미국 대여병기를 하루속히 신품으로 교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시에는 예비군도 105㎜ 곡사포까지를 장비시켜 현역군 수준의 전투사단화할 것을 구상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현역사단 외에 10개의 예비사단이 있었는데, 전쟁발발과 동시에 예비역 군인을 동원, 현역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무장하고 전선에 출동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부대였다. 그런데 105㎜가 부족해서 이들 예비사단에는 지급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전력 면에서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고쳐 말해 105㎜ 포만 국산화되면 현역군과 똑같은 수준의 예비사단 10개가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니 남북간의 군사 대결상 중대한 뜻을 지니게 된다.
박 대통령은 현역군의 전력증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뜻이다. 필자가 방위산업을 담당할 당시에는 "60㎜ 박격포까지만 장비하는 20개사단의 예비군 무장화"를 책임지라는 지시였는데, 이번에는 곡사포까지 개발하라는 확대지시를 한 것이다. 그 날짜가 1972년 4월 4일이었으니 필자가 방위산업을 담당하고 난 후 불과 5개월이 지났을 때이다. 이 지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의는 실로 중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72년 4월 4일 결단」이라고 한다고는 이미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역군용 대구경화포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우선 90㎜ 무반동 총이 개발되었고 곧이어 106㎜ 무반동 총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106㎜ 무반동 총은 지프차에 장착하는 대전차포로서 포의 길이가 3.4m나 되는데 큰 대포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제작상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음 단계가 105㎜ 곡사포였는데, 우선 추진장약이 약실 안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이에 견뎌내는 강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원거리를 정확히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포신 내부는 정밀가공을 해야 하고 강선(腔線)이 있어야 한다. 1만 분의 1인치(1만 분의 25㎜) 초정밀가공을 요하는 주퇴복좌기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화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미 대량생산해서 실전에 배치하고 있으니 우리도 개발하라는 것이 박 대통령의 긴급명령이었던 것이다. 화포개발에 대해서는 미국의 반대가 강경했다.
다음은 국방과학연구소 구상회(具尙會) 박사의 회고담이다.
저는 당시 미국 정부에서 국방과학연구소에 파견한 기술고문단장인 하딘(Hardin)씨를 만나서 "105mm 곡사포 시제 명령이 떨어졌다. 105mm 곡사포에 대한 기술자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딘씨는 껄껄 웃으며 "105mm 곡사포는 카빈총과 다르다. 한국은 기술부족으로 불가능하다. 105mm 곡사포의 기술재료는 너무 양이 많아서 방(房) 하나쯤은 될 것이다. 재료검토에만 1년은 족히 걸린다. ADD는 소화할 능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졸라대니 하딘씨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에 문의를 했는데, 그때의 답은 "N0! Gun Never!"라는 단지 세 마디 단어였습니다. 게다가 미 대사관은 하딘씨에게 "105mm 포 개발을 못하도록 막으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미국 정부는 냉담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견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美 국무부와 주한 美 대사관은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필요한 병기는 미국에서 구입해서 쓰고, 한국은 독자적으로 병기개발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존슨 美 대통령 방한 때 국군 파월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KIST라는 종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는데, 병기개발이 필요하다면 KIST를 이용하면 될 것이지 왜 별도로 병기연구소를 만들려고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셈은 남북한의 대치관계가 군비확충경쟁으로 전환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러니 중국을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심까지도 써야 했다.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고 나머지 주한미군도 조만간에 철수한다는 「애드벌룬」을 띄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 중국은 38도선을 자기 나라의 이익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만 했다. 중국이 북한과 「즉시개입조약」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과 친선을 꾀하려면 북한도 자극하지 말아야 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남한의 군사력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길밖에 없는데 남한에서 대구경화포를 개발한다니 닉슨 행정부로서는 자못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렇게 돼서 우리나라의 대구경화포(105mm 곡사포) 개발은 기술자료도 없이 간단한 청사진 도면 몇 장만 갖고 시작하게 됐다.
당시 화포의 시제개발을 총괄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개발요원 김대선(金大善: 現 국방부 품질관리소 부소장)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오 수석(필자)의 지시는 105mm 곡사포를 시제하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이 말을 듣자 아찔했습니다. 105mm 곡사포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사정으로는 당치도 않은 과욕이었습니다.
우선 도면도 한 장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면도 없이 어떻게 만드느냐?"고 따지니, 실물 105mm 포를 갖다가 치수를 재가며 도면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105mm 포의 정밀도는 100분지 1mm를 따져야 합니다. 이 정도의 정밀도는 책상 위에서 측정하는 데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대포 구석구석을 측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한 도면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국군이 소유하고 있는 105mm 포는 6.25 전쟁 당시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라서, 마모가 심해 정확히 측정한들 소용이 없는 수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포의 내부를 가공하려면 전문기계가 필요합니다. 길이가 긴 포신을 깎아내는 보링기계가 필요하고, 100분지 1mm의 정확도를 내려면 내부를 연마해야 됩니다. 그리고 강선을 파려면 강선 파는 기계도 필요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었는데 화포를 만들자면, 이런 기계가 전부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계가 당시 국내에 있을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 수석은 "기계가 없으면 머리를 짜서 만드는 것이 기술자가 아니냐? 꼭 필요한 기계는 만들어서 써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기계를 들여다가 만들면 되는데 왜 그리 서두르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오 수석은 "이런 식으로 만든 대포를 실제로 사용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소. 대포가 완성되어도 쏘아보지 않아도 좋소. 다만 대포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훈련을 시키자는 뜻이오. 개발하는 사람이나 제작하는 기술자 모두 대포를 만드는데 대한 공포증이 있는가 본데, 이것을 타파하자는 게 목적인 것이오. 이런 식으로라도 대포를 만들어 보면, 애착이 생기고 자신이 생길 것 아니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추진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105mm 곡사포 시제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서울공대 기계과를 막 졸업하고 새로 입사했던 이원백(李元柏)씨(現 ADD 탄도연구실장)의 회고도 들어보자.
화포류의 도면이라곤 청사진으로 된 일부분을 비공식 경로로 입수한 것뿐이었는데 TM 35P를 보고 얼기설기 꿰어 맞추어 부품 목록과 도면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수영(李水永) 실장(故人)이 105mm 곡사포 한문을 구해 갖고 와서 ADD요원들은 그것을 분야별로 나누어서 역설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역설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장비의 원 설계자의 설계 개념을 파악하는 일인데 화포를 처음 대하는지라 쉽지 않았습니다.
주퇴복좌기는 진주에 있는 대동(大同)중공업이 담당하였고, 포신은 서울 구로동에 있는 대한중기(大韓重機)에서 담당하였습니다. 저는 주퇴복좌기와 마운트를 담당했는데, 진주와 구로동과 전방 사격장을 오가는 출장으로 신혼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진주까지의 교통편은 남해선 밤열차와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뿐이었는데, 부산까지 고속버스로 간후 진주행 시외버스로 갈아 탈 때도 있었습니다. 9시간 내지 10시간이 걸렸습니다.
포신을 가공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강선가공과 약실 테이퍼 가공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 이수영 실장이 일제시대 때 조병창에서 일했던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의 조언으로 강선 가공기계를 제작하였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1973년 3월 105mm 곡사포의 총조립이 대한중기 구로동 공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밤을 새워 잘 맞지 않는 것은 줄로 갈고, 덧붙이고 해서 억지로 끼워 맞추었습니다. 그런 후 포차로 견인해서 전방사격장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국산초유의 대포를 끌고 서울거리를 달릴 때의 그 뿌듯한 성취감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잘 나갈까? 어떤 사람은 첫발에 팍 주저앉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국기술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평하면서 우리 연구원들이 헛고생만 하고 있다며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105mm 곡사포의 시제가 완성되고 성공적으로 시사까지 끝냈다는 보고를 듣고는 심히 기뻐했다.
우리나라가 대구경포를 국산화했다는 것은 사실, 일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포병출신이니 그 감개가 더 컷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래서인지 필자에게 "105mm 포를 보고 싶으니 시사회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돼서 동년(73년) 6월 25일에 대구경화포, 즉 106mm 무반동포, 4.2인치 박격포, 105mm 곡사포에 대한 시사회가 열리게 됐다. 장소는 다락대였다. 참석인원은 극히 제한되었다.
시제포는 모두 3문밖에 없으니 2문으로 사격하고 한문은 전시를 했다. 시사는 105mm 곡사포부터 먼저 시작했는데, 먼저 곡사(曲射)로 발사했다. 그리고 곡사포는 포차로 끌고 와서 직사(直射)를 하게 된다. 그 중간에 4.2인치 박격포와 106mm 무반동포의 시사를 했다. 4.2인치라고 하면 직경이 10.67cm로 60mm나 81mm 박격포탄과는 위력이 다르다. 4.2인치 박격포에는 명중도를 높이기 위해 강선도 있다. 'T'라고 표시된 타켓에 명중되어 폭음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106mm 무반동포가 목표물인 고물전차 표적을 명중시킨다. 맨 나중에 105mm 곡사포의 직사 사격이 있었다. 근거리에서 포를 목표물인 바위에 정조준해서 쏘는 사격이다. 명중률은 대단히 좋았다. 다음은 이원백씨의 회고이다.
드디어 시범사격 날이 왔습니다. 많은 훈련을 한 포병들 덕분에 곡사, 직사 모두 명중을 하여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와 웃음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시범사격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후면에 전시된 화포들을 돌아보고 개발 종사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아! 우리는 결국 해냈습니다. 그 당시의 우리는 젊었고 국방과학연구소도 활기가 넘칠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불철주야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학도의 애국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행사가 있게 되면 보통 행사 날짜가 먼저 잡히고 난 후 거꾸로 여기에 맞추어 준비작업에 대한 일정을 짜게 되는데,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빡빡한 일정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개발업체도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뒤처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중량물이기 때문에 중노동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허리가 온전치 못하고 얼굴이 부어오르는 증상이 생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시끌벅적했던 행사장에서 내빈들이 돌아가고 나면 산새소리,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적막감에 빠져듭니다. 바로 근처에는 한탄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선지구라 무인지경입니다. 수영복도 없이 멱을 감기도 하였는데, 물은 수정같이 맑고 모래자갈이 곱고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그 경치에 감탄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낭만도 잠깐, 다음날부터 또 다시 불철주야 뛰어야 했습니다.
1973년 6월 시사회가 끝나고 난 후 하비브(Harbib) 미 대사의 식사초청이 있었다. 이때 미 대사는 "국산 105mm 포에 문제가 많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식사 후 실무자의 의견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쓰지도 못하는 포를 만들려고 생각지 말고 미국 제품을 사다 쓰라는 뜻이라고 느껴졌다. 식사 후 동석했던 부대사의 안내로 정원으로 나가보니 몽고메리(Montgomery)대령(주한 미국 군사원조고문단 JUSMAG-K의 연구개발 및 방산 책임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툼한 자료철을 내보이면서 한 조목씩 설명을 했는데, 국산포의 각 부위의 치수가 미군 규격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 이런 조사를 했는지 필자도 놀랐다. 그래서 필자는 "설계도면도 없이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도면만 있으면 미제 포와 똑같이 만들 자신이 있다. 어떤 방법을 쓰던 도면을 구해서(즉 미국이 제공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구해서라도) 화포는 국산화하겠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미국정부는 「한국측에 기술을 넘겨주지 않는 한 병기개발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기술자료도 없고 전문기계도 도입하지 않은 한국이 105㎜포 현물만 보고 시제개시 후 불과 11개월만에, 비록 미국 규격에는 합격하지 못하는 화포일망정 한국이 시제품을 만들어내고 시사까지 성공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측의 화포 국산화 의지가 강경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1973년 6월 9일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과 스틸웰 주한 美 군사령관이 각기 양국을 대표해서 「군병기·장비, 물자에 관한 기술자료 교한 부록」에 서명을 했고, 같은 해 9월 12∼13일에 있었던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최종 결말이 났다. 이로써 105㎜ 곡사포를 포함한 각종 병기에 대한 기술자료(도면 포함)는 1974년부터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美 국방부 클레멘츠 차관은 "한국이 방위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기반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산업기술과 한국의 산업을 결부, 활용하는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권고하고 이 분야의 적절한 원조를 제공토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발표하면서 미국의 태도를 밝혔다. 추가 설명을 하면「방위산업은 한국에서 단독으로 추진하지 말라.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한국업체가 공동 생산하는 방식, 즉 한미 공동생산 방식에 의해 추진해야 미국은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협약으로 인해 생산된 제품은 한국군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수출할 때에는 미국정부와 협의를 해야 했다. 미국측은 우리나라에서 국산병기가 양산된 후에도 「수출에 대해서는 철저한 감시를 하겠다는 것이고 거부권을 갖겠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수출하고자 할 때에는 미국정부의 승인을 받게끔 되었는데 미국이 합의를 잘 해주지 않아 현재까지도 애를 먹고 있다.
한편 미국의 기술고문단 「하딘 팀」이 한국측에 기술자료 등을 임의로 너무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74년 「하딘 팀」으로 하여금 JUSMAG-K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철수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대해 미국측에서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부터 미국의 ADD 파견 요원의 임무는 기술원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ADD를 감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105mm 곡사포에 대한 각종 기술자료를 얻게 된 후로부터의 진척속도는 빨랐다. 포 제작에 필요한 각종 소재를 생산하는 삼미특수강공장, 포신을 제조하는 대한중기(대한중기는 나중에 기아그룹에 인수되어, 창원공장은 기아기공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기아특수강이 되었다), 포가를 제조하는 기아기공(현 기아중공업) 등 대형공장을 창원기계공업기지에 긴급히 건설했다. 포를 제작하는 각종 최신기계 설비도 도입했다. 포를 정밀하게 대량생산하는 데 필요한 특수케이지(計測器具)와 특수 치구(治具, 기계제작을 할 때 정밀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기구)도 일절 제작했다.
이들 작업을 1976년말까지 모두 완성하고 77년부터는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곧이어 155mm 곡사포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군에서 요청만 있다면 어떠한 대구경포도 필요한 수량만큼 생산해 낼 수 있는 완전한 기반이 이때 완성된 것이다. 창원기계공업기지에 맨 처음 입주한 공장들이 이들 방위산업체였는데, 이들 공장의 입주가 기폭제가 돼서 창원기지 건설이 촉진됐다.
2005-01-29 16: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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