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조국근대화에 밑바탕이된 월남파병
여동활
2008. 7. 5. 23:08
피와 바꾼 달러 - 가난 탈출 종자돈
▲ 지금은 민항 활주로가 � 1사단의 포항 공항 입니다.



청룡.맹호 부산항 출국영상 / 시작클릭

▲ 1967년 베트남의 늪지대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장병들
1964년 봄, 주미대사 김정렬은 워싱턴에 온 주독 대사 최덕신을 통해 대통령
박정희가 내린 특명을 전달받았다. "미국 정부 요인들에게 월남(越南·베트남)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한국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시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미국조차 탐탁잖은 반응을 보이고 있던 월남
파병을 강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월남이 공산화된다면 동남아와 한국의 안보도 위협받을 것이 분명하고, 또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내 월남에 투입하려는 구상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 파병은 이렇듯 미국이 아닌 한국 정부의 전략적인 주도로 시작됐다.
1964년 9월에 이동병원 부대등 140명이 처음으로 월남에갔고 1965년 2월 2000명의
공병·수송부대가 파견됐다. 마침내 10월 12일, 해병 청룡 부대와 육군 맹호 부대로
이뤄진 전투부대 2만명이 30만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본격적인 파월(派越)의 막을
올렸다. 1973년 3월 철수를 끝낼 때까지 모두 31만2853명의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들은 1만여 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여 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쳐 4만10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줬다.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국내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월남으로의 수출이 급증했다.
군인·노동자가 받은 봉급과 현지 한국 기업의 사업수익까지 합하면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재원이 됐다.
'월남'이란 말은 시대를 대변하는 코드였다.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히트했고,
월남치마'가 유행했으며 '월남뽕'이라는 게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번영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피와 희생이 필요했다.
5.000여 명의 장병이 이역만리에서 전사했고, 1만70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는 아직도 수 많은 참전 용사 들에게 고통으로 남아있다.
파월장병 가족위안 공연영상 / 시작클릭
*천자봉 쉼터 가는 길*